박흥식 편집인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흥식 칼럼] 질문과 사유의 시간

인간은 답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묻는 존재입니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답을 제시하는 시대,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정작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지금, 다시 질문하는 힘이 필요 합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고, 주저함 없이 결론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그 속도와 정확성에 감탄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AI의 답을 받아듭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이 모든 답들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본래 답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묻는 존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옳은가.”

이 질문들은 단번에 해결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철학을 만들고, 종교를 세우고, 예술과 학문을 이어왔습니다. 질문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습관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질문 없이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믿을지까지 알고리즘이 추천해 줍니다.

편리함은 늘어났지만, 삶의 방향에 대한 사유는 점점 얇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공받는 존재’가 되어가는듯 합니다. 존재의 주체가 아니라, 응답자의 위치로 밀려나는 셈입니다.

삶이란 본래 정답지가 없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삶에도 모범답안을 기대합니다. 성공의 공식, 행복의 레시피, 올바른 판단의 매뉴얼. 문제는 그런 답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삶이 단단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질문을 잃을수록 삶은 가벼워지고, 존재는 공허해진다고 느낍니다.

진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진리는 검색창에서 즉시 출력되는 문장이 아닙니다. 진리는 질문을 견뎌낸 생각의 결과이며, 삶 속에서 검증된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늘 불편하고, 완결되지 않으며, 때로는 침묵 속에 남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진리는 교리가 되고, 사유 없는 확신은 독단이 됩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역할은 분명해집니다.

더 빨리 답하는 존재가 아니라, 왜 이 질문이 중요한지를 묻는 존재가 되는 것.

“이 질문은 누구의 삶과 연결되는가?”

“이 답은 어떤 전제를 숨기고 있는가?”

“이 판단은 나의 책임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 내 삶의 속도를 늦춥니다. 그리고 속도를 늦출수록 나의 존재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삶을 곱씹는 시간, 결론을 미루는 용기, “아직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겸손. 그 여백 속에서 인간은 다시 사유하는 존재로 돌아옵니다.

오늘 하루쯤은 답을 조금 덜 믿어도 괜찮습니다.

뉴스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질문해보고,

AI의 답을 저장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질문은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질문은 나의 삶이 자동재생 되는 것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게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질문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나를 바꿉니다.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 질문하는 시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일지 모릅니다.

인공지능은 쉽게 답을 줍니다.

하지만, 깊은 사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