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크리에이터,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시간, 존재 그리고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시간은 늘 인간보다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던 시간 속으로 던져지고, 죽음 이후에도 멈추지 않을 그 흐름을 잠시 빌려 쓰다 돌아간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래도록 시간을 붙잡고자 열망했다. 태양의 그림자를 재고, 모래가 떨어지는 속도를 세고, 결국에는 스프링과 톱니바퀴를 발명하였고 시간을 인간의 세계에 가두려 했다. 시계는 그렇게 인간의 부단한 집착 끝에 탄생했다.

그러나 시계는 시간을 가두는 데 실패했다. 얼마큼 물리적 양을 가두는 데는 성공했겠지만, 시간의 거대한 함의를 가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항구히 연속적이며 무한히 양적인 우주의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다. 그 거대한 크로노스의 흐름 안에서 인간에게 유의미한 ‘찰나’이거나 ‘결정적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시계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끝내 인간의 세계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수많은 철학과 신학이 동원되었다. 대신 인간은 시계를 통해 자신이 시간 속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림1. 크로노스와 요즘 젊은 카이로스의 시간, Generated AI, 2026, 이홍석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수량화된 단위가 아니라 ‘지속(duré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는 시간은 초와 분으로 잘려 있지 않고, 기억과 감정, 망설임과 후회가 뒤섞인 채 흐른다는 것이다. 시계와 달력, 숫자로 측정되는 시간의 질서를 의심하며, 살아 있는 생명과 의식이 겪는 시간의 고유한 결을 다시 불러오고자 하는 시도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1초, 1분, 1시간처럼 균등하게 잘려 나가는 선형적이고 추상적인 흐름으로 이해된다. 이때 시간은 마치 공간처럼 쪼개어 세고 배열할 수 있는 것이 되는데, 베르그송이 “공간화된 시간”이라고 비판한 바로 그 지점이다.

‘지속(durée)’은 시계가 가리키는 류의 균일한 시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그것은 의식과 생명 속을 흘러가는, 질적으로 변화하는 시간, 다시 말해 “사는 시간, 체험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서 순간은 잘려 나가지 않고, 이전의 모든 기억과 정서, 욕망을 품은 채 다음 순간으로 이어진다. 지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질적 연속성이다. 여기에서 연속성은 물리학의 ‘연속체’처럼 균일하게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라, 매 순간이 서로를 관통하고 변형시키는 비연속적 연속성에 가깝다. 과거는 지나가 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흡수되어 ‘결’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 특정한 장소의 냄새, 오래된 사진을 보는 순간, 단순한 과거의 정보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 긴장, 설렘이 한꺼번에 현재로 밀려오는 경험과 같은 것, 바로 사는 시간이자 체험되는 시간으로 이해되는 ‘지속(durée)’이다.

베르그송은 이 지속을 개념과 수식, 분석적 지성으로는 온전히 붙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 지성은 대상을 고정하고 쪼개어 정의하며, 다시 배열하는 능력에는 탁월하지만, 살아 있는 흐름을 흐름으로써 붙잡는 데에는 서툴다. 그래서 그는 ‘지속’을 이해하는 길로 직관(intuition)을 제안한다. 여기에서 직관은 즉흥적 감정이나 막연한 영감이 아니라, 내 삶의 흐름 안으로 깊이 잠겨 들어가는 체험적 이해에 가깝다. 자신이 어떻게 변해왔고,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고통을 겪어왔는지를 하나의 살아 있는 흐름으로 느껴보는 것, 그때 우리는 ‘1초, 1분, 1시간’이 아니라, “내가 살아낸 시간의 고유한 색과 밀도”를 마주하게 된다. 지속은 종이에 그려진 시간이라는 축 위의 점들이 아니라, 내가 되어 온 과정 자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시간론은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유용하다.

우리가 일과 약속, 시스템을 위해 사용할 때의 시간은 대개 ‘일반 시간’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 상실을 겪을 때, 예술 작업에 깊이 몰입할 때, 우리는 어느새 지속의 시간 안에 들어가 있다. 그 시간 안에서 “얼마나 오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흘렀는가, 무엇이 생성되었는가(How has it flowed, What has been created)”일 것이다.

그림 2. 크로노그래프, Generated AI, 2026, 이홍석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예기치 않게 되돌아온다고 썼다.

프루스트의 문학적 세계에서 이러한 철학적 구조는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장면으로 형상화된다. 마들렌 조각을 차에 적셔 먹는 순간, 어릴 적 콩브레의 일요일 아침이 감각·정서·공기까지 통째로 현재로 솟구쳐 올라오는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한 “정보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그때의 촉감과 냄새, 두근거림과 분위기가 모두 포함된 살아 있는 시간이자 살아낸 시간이다.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현재를 관통하며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그송의 ‘지속’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그 함의를 같이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과거 전체는 한 겹 한 겹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 속에서 보존되어 있으며, 특정 계기에서 현재 의식으로 현행화된다. 프루스트에게 비자발적 기억은 바로 이 “현행화”의 드라마다. 과거가 현재로 돌아올 때, 우리는 단순히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지금의 나, 지금의 상황과 함께 다시 살아 보게 된다. 시간은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포개져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겠다. 프루스트가 말하는 회복은, 박물관에서 보존된 원본을 그대로 꺼내 오는 복원이 아니다. 베르그송의 언어로 옮기면, 그것은 지속 속에 잠겨 있던 과거가 현재의 계기 속에서 새롭게 실현되는 사건이다. 과거는 그대로 복사되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서와 의식 상태와 뒤섞여 다른 빛, 다른 서사, 다른 통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문장을 베르그송의 개념으로 다시 말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 속에서 보존되었다가,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형태로 현재를 새롭게 창조하는 힘으로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말은, 과거로 회귀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 겹겹이 쌓여 있던 시간의 층이 어느 순간 현재를 뚫고 올라와 새로운 나, 새로운 세계 인식, 새로운 창작을 낳는 순간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프루스트의 문학과 베르그송의 철학은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간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만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 3.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Generated AI, 2026, 이홍석

다시, 인간이 시간을 가두기 위해 발명한 시계, 그 기계적 장치에 대해 인간적 서사를 이야기하자. 기계식 시계, 특히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는 그 첫 번째 질문(인간은 시계를 통해 자신이 시간 속에 어떻게 존재하는가)이 가장 집요하게 응축된 형식이다. 크로노그래프는 시간을 본다는 행위를 넘어, 흐르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멈췄다 다시 흘려보내는’ 장치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시간은 일상의 배경에서 전면으로 튀어나온다. 오토매틱이라는 구조는 더욱더 인간적이다. 손목의 움직임, 즉 살아 있음의 미세한 리듬이 로터(rotor)를 회전시키고 동력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유지한다. 손목 위에 흐르는 시간 크로노스와 결정적 순간 카이로스가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의 몸과 기계가 하나의 순환을 이루는 이 구조는, 기술이라기보다 철학에 가깝다.

베르그송의 망설임과 후회가 뒤섞인 채 흐르는 시간인 ‘지속(durée)’과도 닮았다. 기계식 시계는 초 단위의 정확성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내부는 언제나 약간의 오차를 품고 있다. 그 오차야말로 인간적이다. 완벽하게 정확한 디지털 시간보다, 하루에 몇 초씩 틀어지는 기계식 시계가 오히려 우리의 삶과 가깝다. 또한 프루스트의 예기치 않게 되돌아오는 시간처럼, 기계식 시계는 바로 그 예기치 않은 회귀의 매개체다. 오래된 크로노그래프를 손목에 올리는 순간, 우리는 그 시계가 거쳐온 시간-누군가의 손목,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숨-을 함께 착용한다. 스마트폰의 시간은 항상 ‘지금’이지만, 기계식 시계의 시간은 언제나 ‘지금까지’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시간 속으로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유한하다는 뜻이며, 시간에 대한 자각 없이 인간은 현존재(Dasein)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계식 시계는 그 자각을 손목 위에서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째깍째깍 초침의 물리적 움직임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물론 최근의 기계식 시계들은 과거의 것들보다 정숙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질문한다. 시간의 추상을 물리로 담은 영리한 인간들에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는 지금까지 어떠하였느냐 묻는다.

그림 4.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2026, 이홍석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시계는 그래서 사치품이라기보다는 때로 사유의 도구다. 그것은 시간을 측정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을 의식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과 시간의 관계는 지배나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이자 공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의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미네르바(Minerva)의 오래된 무브먼트가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안에서 호흡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시간이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 깊어지는 것임을. 아마도 우리가 기계식 시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시계처럼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대신 시간이라는 추상성을 느끼게 하며 사유할 수 있는 정신의 여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간은 이미 어디에나 있다. 휴대전화 화면, 노트북 모서리, 자동차 계기판, 심지어 냉장고 문에도 표시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식 시계에 대해 우호적이다. 이는 오래된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오히려 저항에 가깝다.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소모적인 시대에, 일부러 감아야 하고, 무겁고, 관리해야 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물건을 선택하는 행위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나는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것은 베르그송의‘지속(durée)’이며 프루스트의 내 안에 겹겹이 쌓여 있던 시간의 층이 어느 순간 현재를 뚫고 올라와 새로운 나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