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환 시인, 자유기고가


[기고 김이환] 명동 이야기

오늘은 젊은 날 우리의 표상이었던 명동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 명동(明洞) : 명동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곳으로 명례방골 또는 종현(鍾峴)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은 주택지로 밀집을 이루었고, 일제강점기 때 충무로 일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면서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 변모하게 되었다. 1923년 이후부터 명동은 서울의 번화가가 되었고, 그후 광복과 6 · 25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여전히 서울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광복의 환희, 전후의 허무와 페이소스(pathos)가 흐르던 이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은 명동거리의 다방과 술집 등에 모여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불운하였던 시대의 한과 정을 풀었다고 한다.

당시에 국립극장과 명동성당 · 중국대사관 · 중앙우체국 등 근대건축물과 공공기관이 산재해 있었고 문인들의 집합소였던 여러 다방은 음악 · 미술 · 문학 · 사진 · 연극 등 문화와 예술의 무대였다. 그 후 이곳은 점차적으로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소비문화의 중심지, 유흥의 거리로 바뀌어 갔다.

1970년대까지는 서울의 대표적인 번화가였으나, 뒤이어 강남 개발과 함께 영동 · 반포 · 여의도 등 부도심의 성장으로 금융기관이 여의도로 이전해 가고, 대형 백화점과 상가 등이 새로이 조성됨에 따라, 명동의 상권과 중심성은 상당히 위축되어 갔다. 특히 강남 압구정동 일대가 새로운 패션 중심지로 등장함에 따라 최신 유행의 산실이라는 명동의 기능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탈근대 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오늘날, 문화관광부는 명동이 근대 이후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 국립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구 국립극장의 건물을 정부에서 매입 · 복원하여 상실된 명동 문화의 맥을 이어감은 물론, 이 건물의 가치를 보존하여 수준 높은 공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현대의 문화 인프라로 적극 활용하기로 하였다. 구 국립극장 건물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어 1934년에 처음 개관한 '명치좌(明治座)'로, 문화예술사적,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큰 이 건물은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급조된 것이 아닌 시간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의 누층이 이 지역의 문화적 자본으로 인식되면서, 명동은 다시금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문화와 쇼핑의 매력 명소로 부활하였다.

*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으로 일백여 년 전, 1892년에 착공해 1898년에 준공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으며 종현성당, 명동천주교당이라고도 한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곳은 원래 역관 김범우의 집이 있던 자리로 이승훈, 정약용의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모여 조선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곳이다. 우리나라 근대 시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건물로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고, 고딕 양식의 벽돌 건물이다. 설계와 감독은 프랑스인 신부가 담당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유해를 지하 묘지에 안장했으며, 1945년 이름을 종현 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었다. 교회창설 200주년이었던 1981년에 스테인드 글라스 등 대대적인 수리공사에 착수해 1984년 마무리했다.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며 구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수배자나 시위대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어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987년 6.10 항쟁 당시 시위대들이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 내부로 피신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라는 말로 경찰들의 성당 진입을 막았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할 당시에는 교황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부터, 조문 인파로 긴 행렬을 보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인들 다수는 명동을 떠났고, 이제 한국인의 차지가 되면서 명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주점과 다방이 모여 있는 곳은 문인들의 아지트로 자리를 잡았다.

박인환의 시에 이진섭이 작곡한 불후의 명곡,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시(詩)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도 명동이었다. 그 시절 ‘명동에는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 박인환, 오상순, 천상병, 김수영, 윤용하 등 소설가, 시인, 작곡가 등이 명동 골목 곳곳에 있던 주점과 다방을 누비면서, 이곳의 낭만을 더하게 했다.

당시 문인들이 자주 찾았던 곳은 ‘은성’으로, 현재의 국민배우 최불암의 어머님이 운영했다고 알려진다. 명동1가 옛 제일은행 본점이 있던 곳에 ‘은성주점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약 10m 앞에는 1960년대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와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였던 주점 터다. 특히 이봉구 선생은 명동을 좋아해 ‘명동시장, 명동백작(明洞伯爵)’이란 애칭으로 불렸다.”는 글에서 당시 이곳이 문인들의 아지트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은성주점 이외에도 봉선화, 쉘부르 등은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1970년대 이후 명동은 쇼핑의 메카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그 중심에는 현대인의 품격을 보여주는 한편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백화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 시기인 1930년대에 세워진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신세계백화점, 조지아(丁字屋)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도파백화점과 함께, 중앙우체국에서 명동 입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1970년에 개점해 1992년에 폐점한 코스모스백화점이 1970~1980년대 명동 백화점의 중심 역할을 했다. 코스모스백화점은 70~80년대 종로서적과 YMCA 앞과 함께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1979년 12월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개관하면서 명동을 상징하는 백화점이 됐다.

이외에도 명동에서 을지로3가 방향으로 가는 길에 쁘렝탕백화점(현 장교빌딩)이 있었다. 쁘렝탕 백화점 주변에는 골뱅이와 노가리를 주된 안주로 내놓은 맥주집들이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켰다. 명동의 백화점들은 1980년대 이후 도심의 중심이 강남, 신촌, 잠실, 목동 쪽으로 분산되고, 롯데, 현대, 신세계 등 대형 백화점들이 들어서면서,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이제 명동을 지키는 양대 백화점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영화관의 추억들 : 쇼핑과 여가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명동에는 영화관들도 다수 자리를 잡았다. 1958년에 개관한 대한극장은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마지막 황제’, ‘백 투 더 퓨처’ 등을 한국 최초로 개봉했다. 이 영화들을 70mm 원본 필름 그대로 상영한 대형영화 대표극장이었지만, 2024년 폐업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은 서로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해, 영화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명보극장은 1957년 개관해 2008년 폐관했다. 폐관한 뒤에는 명보아트홀로 이름을 바꾸어 뮤지컬과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올리고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소재한 오페라 대표 극장 ‘스카라’에서 이름을 딴 스카라극장의 역사는 일제 강점 시기부터 시작된다. 1935년 일본인이 충무로에 세웠고,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을 했으나, 2005년 폐관하고 건물도 철거됐다. 명동성당 옆 저동에는 중앙극장이 있었다. 중앙극장의 역사는 1922년 일본인이 '중앙관'을 세운 것에서 시작한다. 2010년 폐관했다.

* 명동을 노래한 가요들

1950년대 이후부터 명동이 서울의 상징 공간으로 인식된 만큼 서울을 노래한 가요들에서도 ‘명동’은 자주 언급됐다. 1950년 현인이 발표한 ‘서울야곡’은 탱고 음악을 활용해 서울 번화가의 풍경과 그 속의 감정을 담았는데, 3절에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에/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이라는 가사가 보인다. ‘서울야곡’은 1970년대에 가수 전영이 리메이크하면서, 명동의 밤거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1970년 배호의 ‘비 내리는 명동 거리’는 제목에서부터 명동이 연인과의 이별의 장소임을 보여준다. ‘비 내리는 명동 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비 내리는 명동 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이라는 가사에는 애잔함이 묻어난다.

1973년 패티김이 발표한 ‘서울의 모정’은 ‘희망의 새아침이 밝아오면은’으로 노래가 시작되는데, 3절에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는 저녁/네온의 바다에서 꿈을 꾸었네/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아아 행복한 명동의 거리’라는 가사가 나온다.

1977년 혜은이가 발표한 노래 ‘서울이여 언제까지나’에도 명동이 나온다. 이 노래는 계절별 서울의 명소와 함께 서울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데 ‘눈 내리는 명동에 밤이 깊어도 / 사랑하는 친구야 함께 거닐자/우리들의 우정을 키워가련다/서울이여 서울이여 언제까지나’ 라고 해, 겨울 부분에 명동이 나온다. 당신의 푸르렀던 그 젊음이 이 안에 녹아있군요!

* 청바지와 통기타, 장발과 미니스커트

명동은 19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 등으로 기억되는 청춘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1969년에 문을 연 비어홀 OB’s Cabin에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청춘 문화를 선도했다. 오비스 캐빈에 이어, 1970년 명동 입구에 금수강산이 생겼고, 1970년대 중반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명동 쉘부르는 이종환이 DJ, 허참이 MC로 활약했으며, 1970~1980년대 라이브 음악의 산실로 자리를 잡았다.

명동의 청춘 문화와 관련이 있는 공간 중의 하나는 현재도 명동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동파출소다. 이곳은 1970년대 가위와 자를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던 대표적인 파출소였다. 당시 명동은 장발족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들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니스커트의 시작은 가수 윤복희가 미국 라스베가스 무대 공연 후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이 계기가 돼, 명동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퇴폐적으로 봤고, 파출소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단속하게 했다. 가위는 머리를 자르는 도구였고, 대나무 자는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재느라 필요했다.

현재 명동파출소 바닥에는 “1973~1988. 미니스커트·장발 단속 등 국가의 통제와 청년들의 자유가 충돌하던 현장”이라는 글귀를 새긴 동판이 있다. 1975년에 개봉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감독 이장호)’에도, 장발 단속에 걸린 청년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과 함께 송창식의 ‘왜 불러’가 삽입곡으로 나온다.

찬란했던 청춘의 추억을 명동과 함께하신 귀하는 이제 백발을 날리는 황혼의 노신사가 되었습니다. 그려!

자, 이제 2025년이 저물었습니다.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서산을 물들이고 있는 저 빛나는 노을 속으로 회고와 사색의 걸음을 내디뎌 봅시다. (출처 : 블로그 글)

***(출처) 이글은 기고자가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에서 올긴 글임을 밝힙니다

명동 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