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아시나요?

김탁(한뿌리사랑세계모임 대표)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조선왕조가 만든 국정교과서가 <동국통감>입니다. 고려가 만든 국정교과서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삼국사기>이지요. 한국인들이 서양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로도토스, 모세, 아브라함, 중국의 공자, 사마천을 거론하고 논어 맹자를 통달한 것처럼 유식을 자랑하지만 정작 자기나라에 <동국통감>이 뭔지도 모르는 얼치기 유식자들이 넘쳐납니다.

<동국통감>은 조선 세조 9년(1463)에 서거정(徐居正), 양성지, 신숙주, 권람 등이 세조의 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된 조선왕조의 관찬 역사서입니다. 찬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조선의 세조임금은 우리나라에 고대사를 일람할 수 있는 <통사>가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11세기 중국 북송때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견줄수 있는 우리나라 통사를 편찬하고자 했습니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인 사마광이 15년에 걸쳐서 기원전 403년 전국시대부터 북송이 건국되기전 오대 십국 시대에 후주(後周, 951~960년)의 세종 때인 959년에 이르기까지 중국 16개왕조 1362년의 역사를 편찬한 대작입니다. 모택동의 애독서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에는 이 책을 요약하여 서당에서 <통감>이라 하여 가르쳤습니다.

자주적인 민족사관이 투철했던 세조는 세조3년(1457년)에 사료수집 목적으로 고대문헌을 수거하라는 유시까지 내렸습니다. 민족사학계 일부에서 고문서 탄압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예종, 성종대에 강압적인 수거령으로 변질되어 세조의 뜻이 왜곡되었습니다. 세조는 <동국통감(東國通鑑)> 책이름까지 지어주는 열정을 보이고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설치하고 편찬에 착수했지만 완성을 못보고 승하하셨습니다. 결국 단명했던 예종을 거쳐 서거정의 건의를 받아 성종대에 다시 착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잘 되었으면 청나라 건륭제가 편찬한 <만주원류고>처럼 한민족의 뿌리를 밝혀주는 대작이 나올뻔 했는데 성리학에 미쳐버린 성종대의 신진유림들이 세조때의 훈구대신들이 만든 <동국통감>을 폐기처분하고 유교명분론에 맞춰 1년만에 <신편 동국통감>을 개찬해서 세조의 원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구찬은 멸실되었고 우리가 지금 보는 <동국통감>은 신찬입니다.

유교 명분론(名分論)은 쉽게 이야기하면 역사를 포함해서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유교이념, 즉 중화에 둔다는 뜻입니다. 주나라는 조선왕조의 모국, 어버이 나라이었으며, 한무제가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유교를 국교로 발전시켜 주나라 역사는 중화사상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지금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하는 부류들의 행태는 조선 성종조에 득세하기 시작한 신진유림과 다를바 없습니다. 우리 역사는 고려 인종의 왕명을 받고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때 인종의 뜻을 저버리고 삼국이전의 고조선 부여사 삼한사를 통째로 날려버렸고, 내용의 반은 중국사서를 베껴서 완성시켰습니다. <동국통감>은 주무왕이 책봉했다는 기자조선을 정통으로 삼고 단군조선과 삼한은 근거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외기'에 넣어 마치 외국역사 취급을 했습니다. 우리 국사를 난도질한 자들은 고려, 조선의 사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일제 총독부는 이것을 밑돌로 삼고 16년동안 연구하여 반도식민사관을 고착화시켰습니다.

<동국통감>은 그래도 단군기원을 지금 통용되고 있는 요임금과 동시대의 기원전 2333년으로 명시해 놓음으로써 이후 한국사의 공식적인 기원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이마져 무시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관변 학자들이 규정해 놓은 기원전 194년에 연나라 장수 위만이 번조선의 기자조선을 찬탈하여 건국한 위만조선 부터 한국사를 기술하고 단군조선을 역사가 없는 선사시대, 신화시대로 돌려 놓고자 광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망가진 고대역사를 다시 밝혀주는 역사책이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부여사, 삼한사, 고구려, 발해, 고려의 대륙사를 밝혀주는 <환단고기>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중국사서와 교차검증이 되느냐고 대단히 유식한 것처럼 의문을 제기하지만 <삼국사기>처럼 남의 나라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베낀 정도라면 애초에 <환단고기>의 가치성을 거론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사서라고 해서 우리 역사를 전부 기록하지는 않았으며, 말미에 동이열전이 붙어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중국 <서전>의 요전, 순전, 하상주 기록과 <사기> 조선열전, <후한서>동이열전,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은 <환단고기>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삼국사기>가 측소시킨 부여사는 <환단고기>의 해모수 북부여사와 <삼국지> 동이전의 구태(仇台) 부여사를 합본할 경우에 완벽한 복원이 가능합니다. 중국 사서에 백제의 시조는 구태(仇台)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치 종교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환단고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는 역사에 대한 무지와 학문적인 미숙함을 공개적으로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밝음을 '檀'이라 한다(故自天光明謂之桓也, 自地光明謂之檀也)고 하였습니다 환단을 깨달은 사람을 선(仙)이라고 합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선인(仙人)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긴 역사의 호흡속에서 <환단고기>의 역사적인 가치와 위상을 깨닫고 잃어버린 민족사의 복원에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뿌리사랑세계모임 대표 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