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대원 작가, 독서지도사 [사진=더코리아저널]
[변대원 독서일기] 자유롭기 위해 산다.
- 자유는 삶의 본질이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본질은 늘 자유라 생각해 왔다.
그런 결론을 얻기 위해 먼저 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오랜 독서와 사색 끝에 얻은 결론은 '5가지 유형의 자아'였다.
1. 물리적 자아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결국 나였다. 외적인 나다.
2. 정신적 자아
지금까지 무언가 경험하고 배우면서 만들어진 내 생각이 나였다. 생각하는 나다.
3. 시간적 자아
결국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낸 시간의 합이 나였다. 과거의 나이자, 오늘의 나다.
4. 공간적 자아
내가 머문 공간이 결국 나였다. 처음에는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로 내가 결정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가 머무는 곳을 어떤 공간으로 만드느냐로 내가 결정된다고 느낀다.
5. 관계적 자아
내가 만나는 사람이 결국은 나였다. 누구와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지, 어떤 사람과는 더 이상 관계가 발전하지 않는지, 관계 속에 내가 있다.
나를 여러 측면에서 이해하고 나자, 내가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보이는 듯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늘 자유롭고 싶다.”
건강할 때는 몸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병이 들고, 노화가 오고, 이전의 신체적 자유가 줄어들 때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건강한 몸이 주는 "자유"를.
생각과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알지도 못하는 걸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온전히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려면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그런 과정만이 나를 내적 자유로 이끈다.
시간의 자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워너비다. 매일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고 싶어 하지만, 회사를 가야 하고, 집안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을 챙겨야 하고, 행사에, 경조사에, 끊임없이 나의 시간을 구속하는 일들이 이어진다. 정작 나에게 주어진 자유는 자기 전 1-2시간, 주말 중 일부일 뿐이니까.
공간도 마찬가지다. 마음껏 전 세계를 여행해 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맘처럼 쉬운 일인가?
오늘은 회사 말고,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작 내가 머문 공간조차 정복하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는 게 우리 삶이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방, 집안일이 쌓여있는 집.
공간에 온전히 머물기 위해 또 시간을 써야 한다.
관계는 어떤가? 우리는 관계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 언뜻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혼자만 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다. 우리는 깊이 있고 존중받는 관계를 원한다. 하지만 그 관계의 밀도가 자유를 간섭하길 바라진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상호 존중하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내 생각과 믿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상대의 자유를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무적으로 잘하는 관계와 자발적으로 잘하는 관계의 차이는 결국 '자유'의 차이다. 해야 해서 하는 것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나 크다.
이처럼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이런 자유를 얻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단계, 혹은 내가 써야 하는 돈보다 내가 만들어 놓은 현금흐름이 더 커진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 경제적 자유다.
자, 여기에서 왜곡이 발생한다.
내가 경제적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시간적 자유, 공간적 자유, 신체적 자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마치 최종 목적지가 경제적 자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면서 나의 모든 자유를 갈아넣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선택에 좋고 나쁨은 없다.
일론 머스크가 워라밸이 없이 산다고 해서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도시를 떠나 월든 호수에서 인간 삶과 자연에 대하 말하는 삶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그 선택에도 "자유"가 중요하다.
능동적 삶과 수동적 삶의 극명한 차이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능동적으로 산다는 건 내가 선택한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수동적으로 산다는 건 남이 정해준 길을 의심 없이 걷는 것이다. 누구의 선택이 더 옳은지 가릴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원하는 자유는 능동성 위에 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힘, 그 힘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결국 '자유를 얻는다'는 건 '책임을 감당한다'는 말과 같다.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려면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감당해야 한다. 경제적 자유가 왜 어려운가?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벌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내 시간을 팔기 때문이다. 시간의 자유를 얻으려면 경제적 자유를 미끼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 자유는 늘 모순이다. 자유롭기 위해선 오히려 더 많은 통제와 절제가 필요하다.
삶의 본질이 자유라고 말하지만, 모든 자유는 결코 무제한이 아니다. 신체적 자유는 건강을 잃으면 무너진다. 정신적 자유는 배움과 성장 없이는 금세 한계에 부딪힌다. 시간의 자유는 내 의지가 없다면 구속당하기 쉽다. 공간의 자유는 늘 머무는 공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관계의 자유는 상호 존중과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안다. 내가 얻고 싶은 자유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자유는 누군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제도도, 회사도, 가족도 완벽하게는 보장해주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자유를 스스로 만든다는 건 매일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오늘의 사소한 선택들이 내일의 자유를 결정한다.
나는 다시 쓰기로 돌아온다. 쓰는 것은 내 마음의 자유를 지키는 연습이다.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내 생각을 남김없이 꺼내 적는다. 써보아야 비로소 나를 객관적으로 본다. 말로만 하면 떠다니는 생각들이 종이 위에 내려앉는 순간, 비로소 형태가 생긴다. 형태가 생기면 붙잡을 수 있고, 붙잡으면 바꿀 수 있다.
내 안의 두려움도, 욕망도, 게으름도 들여다본다. 그것들 또한 나의 일부다. 억지로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저 안다. 알아차리고, 조금씩 길들인다. 자유롭다는 건 그저 본능대로 사는 게 아니라 본능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은 책임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그 자유는 거창하지 않다.
누구를 증명하거나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누가 뭐라 해도 나로 살 수 있는 상태. 오늘 하루의 시간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 삶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유다.
그래서 건강을 지키고, 배움을 놓지 않고, 관계를 정리하고, 공간을 돌보고, 돈을 벌어둔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내 삶의 자유를 위한 선택이다. 그렇게 보면 자유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매일 지켜야 할 삶의 태도다. 오늘 하루,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다시 쓴다. 글이 내 마음의 쇠사슬을 하나씩 풀어주니까. 쓰고 나면 알 수 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얽혀 있는지, 어디가 무거운지.
하여 다짐한다. 자유를 위해 내 안의 두려움과 게으름을 넘어선다. 조금씩이라도 움직인다. 내가 머무는 공간을 깨끗이 하고, 내 시간을 조금 더 내 뜻대로 쓸 수 있도록 한다. 내 생각이 흐려지지 않도록 새로운 것들을 읽고 배운다. 사람들을 만나되,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떠나보내는 용기도 낸다.
자유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얻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만들어간다. 매 순간의 선택으로, 조금씩 더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다.
자유는 내 삶의 본질이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삶의 자유를 조금씩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