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자, 떠나자! 철과 크리스탈의 왕국 '가야'로

<시간의 공존, 김해 대성동 고분군 특별전> / 이만주

가야의 왕들과 유물들이 21세기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오늘도 우리는 1,500~2,000년 전, 가야인과 대화한다. 그래서 이번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주년을 기념하여 국립김해박물관(관장: 윤형원)에서 2025년 9월 23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5개월 동안 열리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특별전>의 캐치프레이즈를 ‘시간의 공존’으로 정한 것 같다.

때맞추어 지난 여름, 넷플릭스로 공개되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즈(K-POP Demon Hunters)>. 한류 케이팝과 한국 문화를 소재로 만든 그 ‘케데헌’에서, 주인공들인 세 명으로 이루어진 걸그룹 ‘헌트릭스’의 메인 댄서 미라(Mira)는 악을 쫓기 위해 곡도(曲刀)를 휘두른다. 창끝에 달았을, 낫 같이 휘어진 곡도는 대성동 고분군, 23호분과 70호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런데 날이 안에 있는 낫과는 달리, 날이 밖에 서 있다. 이 신기한 무기가 긴 세월을 뛰어넘어 세계인 앞에 불려 나온 것이다.

2023년 9월 24일, 가야고분군 7개소가 국내 1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남원 두락리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 7개소의 연속유산을 “동아시아 고대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인 점에서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로 인정한 것이다.

옛 무덤인 고분과 쓰레기 더미인 패총(貝塚, 조개더미)은 둘 다 자연적 타임캡슐*이다. 하지만 패총이 선사시대와 고대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준다면 지배층의 고분군은 당시 고급 문화의 정수를 구체적으로 확연하게 보여준다.

왕과 같은 지배층 무덤의 축조는 막대한 비용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야 하므로 권력을 과시하는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 지배층의 고분에는 당시의 문화를 가늠케 하는 최상의 유물들이 껴묻거리로 부장되어 있다. 고분은 단순히 시신을 매장하는 장소를 넘어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 규모, 토목건축 기술, 무기며 공예품을 만들던 능력을 알게 해 당시의 사회를 설명한다. 따라서 고분은 한 사회의 정체성과 역사 기억을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대성동 고분군은 1990년 6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2020년까지 총 10여 차례 이루어졌다. 300여 기가 넘는 고분 중에서 200여 기를 발굴했으며 100여 기 이상의 무덤에서 발굴 성과를 거두었다.

각기 다른 양식의 널무덤, 덧널무덤, 딸린덧널이 있는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인 토기, 덩이쇠, 철제 무기와 마구류, 금귀걸이, 금은 팔찌 등 정교한 공예품, 특히 구슬과 수정 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무엇보다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땅 이름 ‘철의 바다’ 김해(金海)가 암시하듯,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김해를 중심으로한 초기 가야의 명칭. 이밖에도 가락국, 가라, 구야 등 여러 명칭이 있음)는 철의 주요 생산지이자 철기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를 입증하듯 칼, 창 등의 정교한 철제 무기가 나왔다. 또한 철로 만든 말갖춤새(마구馬具)가 출토되었다. 이는 북방 기마민족의 한반도 이동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수많은 덩이쇠(철정鐵鋌)가 부장되어 있었던 점이다. 오늘날 박물관 진열창 안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벌겋게 녹슨 쇳덩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덩이쇠는 아마도 오늘날의 금괴에 해당했으리라. 오늘날 금괴가 부를 상징하듯 당시는 덩이쇠가 철의 왕국 가야의 부와 국력을 상징했던 것 같다. 가야는 중국 동북지역과 왜(倭)와 철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왕국의 경제력을 다졌으리라.

대성동 고분군의 발견과 발굴은 잊혔던 왕국, 가야의 실체를 확인하므로서 한국고대사의 빈틈을 메우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가야에 대한 역사 기록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빈약했었다. 대성동 고분군 발굴을 통해 가야가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고 해상으로 주변 세력, 심지어 서아시아, 동남아시아와 폭넓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집트 고분, 특히 파라오 투탕카멘의 묘를 발굴함에는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가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성동 고분군 발굴에는 가야 왕릉 발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신경철(부산대 고고학과 명예교수)이 있었다.

가야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의하면 가락국이라고도 불리웠던 가야는 1세기경 건국하여 500년 가까이 존속하다 56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유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유구나 유물이 없어, 가야는 잊혀진 왕국이었다.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 고민하는 수사관처럼 그는 가야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물증이 없어 안타까웠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금관가야 본거지인 김해에서 왕릉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신경철은 부산대 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내 손으로 금관가야 왕릉을 꼭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실패를 거듭하며 헤매기를 근 20년, 1989년 7월 어느 날, 대성동 동네 토박이 영감으로부터 온통 밭과 쓰레기더미로 되어 있던 김해시 대성동 야트막한 구릉의 옛날 이름이 ‘애꾸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애꾸지’가 ‘애기 구지봉’의 준말 ‘애구지’의 사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탄강지가 구지봉. 그렇다면 애구지 언덕은 그의 후손인 역대 금관가야 왕들의 묘역이 아닐까?”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애구지 언덕의 지표 조사부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토기 파편들을 손에 쥐게 되면서 그의 믿음은 굳어졌다. 1990년 6월, 애구지 구릉에서 가장 높고 입지가 좋은 동남쪽 능선 정상부에서 첫 발굴이 시작되었다. 긴 세월 각고의 노력에 보답한다는 듯, 고분들은 유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3세기 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29호분, 대형 덧널무덤을 발굴하자, 저장용 토기와 200개 이상의 덩이쇠가 나왔고 무엇보다 날개 달린 금동관이 나왔다. 또한 순장이 확인되었다. 영락없는 왕의 무덤이었다. 대성동 고분군은 금관가야 왕들의 묘역이었던 것이다. 순간, 불완전했던 한국사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잊혔던 왕국, 가야는 실체가 되었다. 우리 고대사의 빈틈이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대성동 고분군과 관련해서는 또 한 사람, 운명의 사람이 있다. 애구지 언덕 바로 옆에는 2003년 개관한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있다. 지금의 송원영 관장. 그는 초등학교 다닐 때, 애구지 언덕을 넘어 등교했으며 어린 시절 늘 그곳에서 놀았다. 그리고는 대학 고고학과를 가게 되었고, 그 후 오랜 기간 대성동 고분군 발굴에 참여했다. 결국 그는 대성동고분박물관의 관장이 되었다. 대성동 고분군이 그의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였으며 어릴 적 뛰놀던 애구지가 숙명의 언덕이 된 것이다.

이번 특별전 개막행사는 9월 22일, 국립김해박물관 강당에서 오후 2시부터 인제대학교 대학원 차문화학과 김영미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연, ‘김해 장군차 시연회’로 시작되었다. 찻잎이 크고 두꺼운 장군차는 김해시 동상동과 대성동 일대에서 자생한다. AD 48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올 때 가져와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차가 되었다는 주장이 회자된다. ‘장군차’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이 김해에 왔을 때 이름을 내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맛과 냄새가 향긋하다. 발효차이므로 부드러워 편안하게 마실 수 있다.

오후 2시 30분부터 유서 깊은 대구남성합창단의 축하공연이 참석자들을 즐겁게 했다(이홍률 단장, 한국현 지휘, 정취정 피아노 반주).

3시 개막식에는 김해시의 귀빈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해 전국의 국공립박물관장들과 고고학자들이 참석해 자리가 빛났다. 4시부터 이춘선 학예연구사의 인도와 설명으로 박물관 가야누리 기획전시실에서 다 함께 특별전을 관람했다. 5시에는 박물관 카페에서 ‘대송동 고분군 종사자 홈커밍 타임’을 갖고, 과거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들과 관계자들이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필자는 오래전,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를 관광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그때는 피라밋 안, 현실(玄室)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관광객 중 막상 들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자는 호기심에 혼자 피라미드 안으로 난 좁은 갱도를 따라 허리를 구부리고 한참을 걸어가 현실까지 들어갔었다. 현실은 의외로 좁았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웬걸! 기자를 끝으로 이집트 여행을 끝내고 튀르키에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몹시도 심한 고열과 콧물에 시달리며 꼼작 못하고 사나흘을 페라팰리스 호텔에 누워있어야 했다. 소위 말하는 ‘파라오의 저주’**였을까?

또 수십 년 전, 지구의 배꼽이라는 호주의 유네스코 복합유산인 울루루(Uluru, 별칭 Ayers Rock)에 오른 적이 있다. 이 사실을 호주인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너는 운이 좋았다. 지금은 등반이 금지되어 있다” 말하며 필자를 부러워한다.

애구지 언덕은 이집트 룩소르(Luxor) 서쪽, 60기가 넘는 왕과 귀족의 묘가 있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이다. 나는 이번 김해에 3박4일 머무르는 동안, 애구지 언덕의 아늑함과 평화스러움이 좋아 매일같이 올랐다. 인근 주민들도 공원처럼 친근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반려동물과 아침 산책을 하고, 남녀 데이트도 하고, 아이들은 연을 날렸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후로 김해시에서는 주민들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방법을 강구할까를 고려한다고 한다. 그런데 애구지 언덕은 ‘파라오의 저주’와는 달리 가야의 왕들로부터 주민들이 기(氣)를 받는 곳처럼 느껴진다. 지금처럼 김해 시민들이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계속 놔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리라.

- 주(註), 설명은 댓글에 있습니다.

[사진=이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