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철학박사, 화이트헤드 학회장 [사진=더코리아저널]


[김영진 뒤죽박죽] 옜다 선물이다! 이 단풍잎

과정철학은 현대인이 안고 있는 절대적인 의미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과 접속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서 언제나 다른 나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술과 접속하는 나, 연인과 접속하는 나, 책과 접속하는 나 등에 따라서 다른 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근대의 주체 철학이 ‘나’를 중심으로 사유한다면, 과정철학은 ‘나’가 아니라, 내가 무엇과 ‘사이’에 있는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가령,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은 나라는 주체가 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사이에 내가 놓임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다. 현대인은 다양한 감정들, 특히 아픈 감정에 노출되어 있다. 이 감정은 내가 무엇과 관계를 맺고 있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은 만남의 그 만남의 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물론 종교적 구원이나 자본의 구원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구원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보편적으로 남녀노소에게 선물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이 안심하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의미와 가치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사실 가치와 의미라고 함은 일정하게 존속하면서도 다시금 찾고 싶고 보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는 그것을 ‘강도’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딱딱하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인내심 정도로 표현하면 좋을 듯 하다.

우선 과정 철학에서는 미리 알 수 있는 내용이나 환원적으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완성된 자가 아니라 완성의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아이가 걸음을 배우고, 글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삶에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나와 마주치는 대상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방출하는 어떤 기호나 상징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음식의 기호에 예민해지면 요리사가 되고, 컴퓨터의 기호에 예민해지면 공학자가 되며, 아름다움에 예민해지면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호에 예민해짐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 사물의 기호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을 한다. 가령, 질투심이 많은 애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의 기호가 비극적인 것은 그 심층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얼굴, 피부와 그 색깔을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낼 수 없다.

기호를 통해 그 대상을 온전히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순간을 겪는다. 과정 철학은 이런 만남을 통한, 관계를 통한 진리, 윤리, 아름다움을 파악하지만 온전할 수 없음을 알고서 어느 시점에서 만족에 도달해야 하며, 이것이 삶이 비극이며, 평화라는 것이다. 평화란 긍정적 느낌으로 수용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질투심많은 애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스스로 고통으로 파괴된다. 과정 철학에서 예술이란 질투심을 느끼는 애인과 같은 심정이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의 감상은 그 어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그 독자적인 사건과 형상을 통해서만 알아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응축된, 분리할 수 없는 지속의 중첩을 의미한다. 가령,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왕자의 시선과 같은 습관은 그 어떤 장미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을 쪼개고 환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질투심이 모든 사랑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기호에 예민해지는 그 사람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수직상승의 춤, 혹은 무한의 황홀감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대상의 기호에 예민해진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한편 우리는 자유와 자발성을 향유하지만, 과학기술(AI) 및 자본주의는 그 자발적 활동을 타자의 욕망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진정 모든 개체가 자유와 결단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심미적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결단의 활동의 가능성에 있다. 우리는 수 많은 관계, 특히 인터넷의 네트워크 속에 살아간다. 그 관계 안에서 나의 자유로운 결단보다는 비자발적인 결정으로 내몰린다.

유튜브와 SNS의 내용은 수동적으로 행동하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본다는 것은 나의 자유로운 결단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물론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움은 있지만 그 안에서 무한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예술은 나의 삶 속에서 무한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창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인의 삶이 과학과 자본주의 덕분에 평균의 삶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평균의 함정에 의해서 나만의 독창적인 개체성을 상실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한다.

이것이 나의 삶이 미적 경험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소통의 창구로서 예술 작품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은 언제나 심미적 경험의 사실이다. 경험은 단지 감각적 인상이나 관념들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심미적이다. 삶이 양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양태가 다수의 이질적인 것들의 합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삶이 미적인 것의 향유하는 사실을 거부할 수 있는가?

즉 하나는 복합체이고, 그 하나의 복합체와 복합체의 만남은 심미적 창발성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사태가 되는 것이다. 즉, 이 단풍잎은 다수의 요소들이 연결된 결합체이고, 우리의 몸 역시 결합체이다. 이것들이 상호 적응과 조화 속에서 빨간 단풍잎이 창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휴대폰, 돌멩이, 집, 길, 인간의 숨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중첩되고 포함되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가끔 자연의 선물을 받는 계절이 돌아온다. 일본의 위대한 하이쿠 시인이자 승려인 료칸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봄에는 꽃, 여름에는 소쩍새, 가을에는 단풍잎’. 이것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표현한 유명한 구절이다. 지구에서 양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이 시절에 자본주의에서 탈영토화해서 심미적 경험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

“옜다! 이 빨간 단풍잎, 선물이다. 근데 아주 짧다. 함께 하면 좋은데, 사진이라도 보내마.”

[사진=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