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이명희의 1인극 <불의 여자>
이만주
연극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연극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는 여자.
오로지 무대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온 연극배우 이명희!
제목 <불의 여자>는 딱 그녀의 이미지다.
20대부터 연기를 시작해 50년 넘게 연극에 대한 불같은 열정으로 무대 위를 달려온 그녀가 긴 연극 여정 끝에 드디어 모노드라마와 만났다.
이명희를 생각하면 평생 연극에만 매달리며 늙어서도 활발히 무대에 서고 명성을 이어간 영국의 연극배우 페기 애쉬크로프트 (Peggy Ashcroft, 1907–1991)가 떠오른다. 그녀를 위해 영국의 평단이 사용했던 문구, “그녀는 명성이 아니라, 연극 그 자체를 위해 살았다(She lived not for fame, but for the theatre itself). 화려한 스타 배우라기보다는 깊이 있는 무대 위 배우.” 나는 그 문구들을 그대로 이명희에게 사용하고 싶다.
애쉬크로프트는 명성, 작위, 어느 정도의 돈 등, 그녀의 연기 인생에 걸맞는 모든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명희는 그녀가 연극을 사랑한 만큼의 보상을 연극으로부터 받지 못한 것 같다.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사랑한 만큼 되돌려 받지 못한 경우와도 같다고 할까? 그러면 어쩌랴.
인생도 예술가의 삶도 마라톤이다.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명희는 아직 왕성한 체력과 집중력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식지 않았다. 하여, 인간 수명이 길어진 요즘, 우리는 그녀의 앞날을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최송림 작, 정재호 연출의 <불의 여자>는 갱년기(연극에서는 사추기思秋期라 표현됨) 여인이 남편과 아들의 외박으로 혼자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황량하게 느껴지는 텅 빈 집, 거실에서 홀로 아침을 맞으며 그 짧은 시간 동안 현재까지의 생(生)을 반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이명희가 연기한 주인공 박정림은 젊은 시절, 시인인 황태수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결혼하지 못하고 지금의 의사 남편과 결혼한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의 아들은 황태수의 아들이다. 그녀는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온 것이다. 더욱 놀랄 일은 박정림의 아들과 서로 혼담이 오가는 박정림의 친구 딸도 황태수와 그 친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자칫하면 배다른 형제끼리 근친혼이 벌어질 판이다.
모든 사정을 훤히 아는 사람은 박정림뿐이다. 그녀는 혼자서 심히 고민한다. 이 줄기가 되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박정림 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소환되고 현재의 고민이 노정된다. 이야기의 구성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세상에 없는 일도 아니다.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명희는 오롯이 혼자서 70분 동안, 여인이 느낄 수 있는 복잡한 감정과 그에 따른 상황을 연기하며 모노드라마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폭풍 같은 큰 목소리로 무대와 객석을 채웠다. 양주 한 잔을 마시는가 하면, 까만색 브라(brassiere)를 차보았다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이 옷, 저 옷을 입어본다. 또 유럽 명화 속의 여인처럼 둥그런 챙 달린 모자에 빨간 양산을 써보기도 한다.
춤, 노래, 술, 담배, 무대 위에서 여인이 해볼 수 있는 것, 모든 것을 다해보며 고독한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표출한다. 또한 오래 전에 자살한 황태수가 죽기 전 보내온 속죄의 편지를 읽기도 하며 무대와 극의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1인극의 무대로서는 화려했고 우선 재미있었다. 이러한 성공은 우리 공연예술계 일류의 스태프들과 그녀의 극단 ‘아트맥’ 단원들이 더운 여름날, 합심하여 땀방울을 쏟은 결과이리라.
하지만 이 모노드라마의 성공은 전적으로 이명희 본인의 연기력에 힘입었다. 그녀의 연극을 향한 강렬한 예술혼과 반세기 넘게 쌓아온 대사의 다양한 구사 능력, 변화무쌍한 연기 능력이 있어 가능했다. 한 사람의 연기 속에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인물을 담아 그 역할들을 소화해 보여준 이번 무대는 이명희라는 연기 인생의 깊은 내공을 여실히 증명했다.
함께 관람했던 최유진 연극연출가와 김구 화백, 노현덕 박사도 그녀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모노드라마가 무대 위에서 꽃을 활짝 피우려면 오랜 연륜과 숙성된 연기력이 받쳐주어야 하는데 이번 <불의 여자>는 이미 중견을 지난 배우 이명희에게 딱 어울리는 역이었다.
극은 처음, 무속 굿의 장단과 무구인 방울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상을 속이고, 남편을 속이고, 자식을 속여도, 네 자신은 속일 수 없어! 요, 가증스러운 것! 박정림!”이라는 무당의 계시적인 공수가 울려퍼지며 시작된다. 그래서 극 중에 무속적인 요소가 나오는가 생각했는데 극은 무속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현대심리극이었다. 처음에 그와 같은 공수가 울려퍼져 여주인공이 안 좋은 사람이겠구나 지레 짐작했는데 박정림은 의외로 착한 여인이었다.
연극의 구성과 연출, 이명희의 연기력에 의해 <불의 여자>는 모노드라마로서 롱런할 조짐도 보인다. 그런데 롱런 하려면 좀더 재미를 더하든가 감동 요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제목이 <불의 여자>인데 주인공이 뻘건 불이 일어나는 도자기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워내는 도예가라는 것일 뿐, ‘불의 여자’로서는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에 불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어떤 감정의 표현 또는 행위가 좀 더 보강되었으면 한다.
이명희는 1974년, 연극 '수염이 난 여인'으로 데뷔한 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편 수의 연극에 출연하며 열정적으로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근간에도 ‘개똥이다(진윤영 작, 김성노 연출)’, ‘장미의 성(차범석 작, 김경익 연출)’ 등에 출연했다. 이외에도 영화 ‘겨울 이야기(신상옥 감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감독)’을 비롯해 TV 지상파 3사 드라마와 교양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했다. 현재, 2019년 창단된 ‘극단 아트맥’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이명희에게는 많은 팬들이 있다. 어떤 사진을 보니 공연히 끝난 후, 열 명도 더 넘는 젊은 수녀, 나이 드신 수녀님들과 찍은 사진이 있다. 그렇게 팬의 스펙트럼이 넓다. 물론 나도 그녀의 팬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연극을 향한 어리석으리만치의 외곬 열정을 좋아한다.
제일 앞자리에서 관람하던 나는 극이 끝난 후, 고개를 뒤로 돌려 객석을 둘러보았다. 다양다층한 팬들이었다. 그날따라 동료 연극배우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온 탓인지, 객석에서 피어나는 아우라(aura)가 만만치 않았다. 순간 나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가장 감동적인 무대 연출이었다던 2002년 제임스 레바인 지휘의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합창단 공연의 장면이 상기되어 전율했다.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9월 6일 관람했던 나는 극이 끝난 후, 수 명의 그녀 팬들과 함께, 뒤늦게 합류한 그녀와 함께 술잔을 부딪혔다.
물어보았다. “내가 아마 30대 때부터 이명희를 알게 된 것이지?” 그랬더니 “아니, 20대 때부터”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시절부터 그녀 연극의 반은 보았을 것이다. 끈질기고도 끔찍한 인연이다.
가라! 그리움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이제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
우리들의 지나간 시간을 노래하거라
우리에게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가사 중에서
* (2025.9.3.~7.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열린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