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무엇이 나를 나 답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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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회복하고, 느끼는 능력이 이젠 자본이 되고,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한다. 나머지 부수적인 것들은 AI에게 답을 찾으면 된다.
▪ 무엇을 느끼며 살 것인가? 무엇을 알 것인 가는 외우지 말고, 문제 의식만 키우고, AI에게 구체적인 것은 물으면 된다.
▪ 무엇이 나를 나 답게 하는가 질문한다. '나는 나다.' 방심하면 AI 알고리즘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SNS에 중독되어 있고, 그것이 내 하루의 화두를 결정한다
▪ 어떤 감각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가 질문한다. 나이가 들면, 감각이 자동 퇴화된다. 짜고 신 맛을 잘 못 느낀다. 감각의 퇴화를 막고, 계속 확장 시키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하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 도전해 보아야 한다. 경험 자본이 감각을 확장 시킨다.
▪ 어떤 경험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가? 늘 먹고, 마시는 대로 살면 경험 자본이 줄어든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야 한다.
종합하면 (1) 무엇을 느끼며 살까? (2) 무엇이 나를 나 답게 하는가? (3) 어떤 감각이 나를 더 살아있게 만드는가? (4) 어떤 경험이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 가는 모든 과정이 곧 '나'를 나 답게 만들어 가는 길이다. 그때 쌓이는 것이 '감각 자본'이고, 이런 사람이 부자이다. 돈, 명예, 권력은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감각 자본'으로 쌓인 존재 소유는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감각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나를 만드는 거다. 그래 "내가 느끼는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김지수, <<감각자본>>) 그리고 감각은 언제나 기억을 깨우는 열쇠이다. 보이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보인다. 그건 '감각 자본'에서 나온다. 길을 걷다 스친 낯선 향기가 우리들의 기억을 통해 어떤 과거의 시절로 데려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저 그렇게 걷는다. 첫사랑과 마셨던 칵테일의 맛과 향, 여름밤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 어릴 적 집안 가득 퍼지던 된장국 끓는 냄새 그 모든 순간이 감각으로 저장된다.
이렇게 모인 감각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나만의 안목이 된다. 그걸 프랑스에서는 '봉구(bon gout)'라고 한다. 그 '봉구'가 그 사람이다. 각자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 프랑스에서는 나만의 자유로운 '봉구'를 갖지 못하고 다른 이의 '봉구'를 부러워하고, 흉내를 낸다면,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존재적 가치로 다룬다. 자신의 자유를 다른 곳에 헌납하는 꼴이라는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다.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그걸 알면 돈 많이 든다"는 말이다. 어떤 브랜드를 고를지,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쫓을지,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을 '안 하기' 할지 등등 선택하는 거다. 내 삶의 태도는 '선택-몰입-책임'이라는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쉽지 않다. 감각은 시대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유행과 싸우고, 때로는 사회적 기준에 저항하면서 길러진다. 무엇을 하기도 중요하지만, 그래 '안 하기'도 고민해야 한다.
그 모든 선택이 결국 우리의 감각을 만들고, 그 감각은 다시 우리의 선택을 이끌어 간다. 선택과 감각은 서로를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지금의 나를 완성한다. 그래서 감각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게 해 주는 생존의 기술이다. 소유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적 가치라는 말이다.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실패,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다듬어진다.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흔들리면서 더 섬세하고 깊은 감각으로 성장한다.
2
나만의 중심과 취향을 만들려면 감각부터 점검해야 한다. 감각은 육체적 느낌이고, 감정은 마음의 느낌이다. 마음 공부를 해야 한다. 그건 '마음 먹기' 훈련을 하는 거다. 풍요롭고, 물질적으로 안락하면 우리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계속 그저 편안하고 싶을 뿐이다. 불편을 자초해야 한다. 불편을 스스로 초대해야 한다. 그래 <<편안함의 습격>>(마이클 이스터, 김원진 역)이란 책을 구입했다.
이 책은 우리가 도달한 현대 문명의 정점, 그 안락한 공간에서 잃어버린 감각과 생존의 본능을 되짚어 보는 여정이다. '충분함'이란 '평온함'과 '어려움'의 결합이다. 적절한 의식주와 양질의 의료를 확보해 삶의 불안과 부담을 덜어내는 마음이 충분함의 필수조건이라면, 욕망이란 모두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삶의 결핍과 실패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좋음, 자신만의 의미, 자신만의 온전성을 스스로 찾아내려 애쓰는 일이 충분조건이다.
'충분함'의 핵심이 실패에도 감사할 줄 아는 단단한 마음을 얻고, 피할 수 없는 번뇌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며, 자기 삶을 의미와 가치와 한계의 연결 고리로 인식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필요한 것이 술은 반취(半醉), 꽃은 반개(半開), 복(福)은 반복(半福)이다. 술을 마시되 만취(滿醉)하면 '꼴' 사납고, 꽃도 만개(滿開) 상태보다 반 쯤 피었을 때가 '더' 아름답다.
사람 사는 이치(理致)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충분한 만족(滿足)이란 있기도 어렵거나 와 혹 그렇다면 인생이 위태로워 진다. 결핍은 부실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핍은 견디기 어려우나, 오히려 풍요가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게 나의 철학이다.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지만 안락한 환경에 처하면 쉽게 죽음에 이른다. 맹자는 이를 "生于憂患 死于安樂(생우우환 사우안락)"이라 했다. 이를 말 그대로 하면, '우환이 나를 살리게 할 것이고, 안락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이다. 결핍으로 불편 해져야 삶이 자란다는 거다.
<<편안함의 습격>>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불편함 속에 야말로 진짜 삶이 숨 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편안함"에 중독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내며, 그로 인해 잃어버린 정신적 회복력과 삶의 생동감을 되는 법을 제시한다. <인문 일지>에서 틈나는 대로 그 방법들을 공유할 생각 이다.
우리가 흔히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낯선 환경, 신체적 도전, 불확실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함에서 인간 본영의 강인함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게 내 지론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일부러 불편함을 초대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무디어진 정신을 날카롭게 세우고 육체의 한계를 넓혀 생존 능력을 더 키우는 거다. 불편함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있게 한다.
3
오늘은 추분(秋分)이다. 추분은 24절기의 16번째로 태양 황경이 180도가 되는 때를 말한다. 백로와 한로의 사이에 있다. '춘분'과 '추분'은 1년중 두 번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며, '계절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춘분'이 지나면 낮의 길이가 밤을 넘어서며 봄이 짙어 지고, '추분'이 지나면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 지기에 가을이 깊어 간다.
여기에 낮이 가장 긴 '하지'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더해 4계절의 기초가 된다. '춘분-하지-추분-동지'는 태양의 운행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의 사계절'이고, 이로부터 한 달 반 뒤 해의 영향이 땅에 이르러 계절이 시작되는 '입춘-입하-입추-입동'은 '땅의 사 계절'이다. 이름에 '춘하추동'이 들어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절기이다. 이 8 절기 사이사이에 그 무렵의 기상 현상이나 자연 변화를 담은 이름의 절기가 두 개 씩 더 들어가 24 절기를 이룬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다면 계절마다 '아는 행복'을 다시 느끼는 거다. 올 춘분부터 나는, 김신지 작가의 <<제철 행복>>을 읽고, 그 시기에 어울리는 제철을 즐기고 있다. 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좋은 일들이 많다. 제철은 '알맞은 시절'이란 말이다. 추분에는 가을 날씨를 즐기는 거다. 뒷산 능선을 넘어가는 부지런한 양 떼 같은 구름, 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팔랑 손 흔들듯이 반짝이는 나뭇잎들, 아직 여름을 보내지 못한 매미 울음 소리를 즐긴다. 가을 날씨를 즐기는 거다.
이 무렵 기온은 춘분 무렵보다 10도 가량 높다. 여름의 햇볕이 달궈 놓은 열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이다. 여름 내 변화무쌍했던 날씨가 차분해지고, 열 오른 이마를 짚어주는 시원한 손바닥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추분이 지나면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 '덥고 추운 것도 추분과 춘분 까지다' 같은 속담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봄의 꽃이 '벚꽃'이라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가을의 벚꽃"이다. 봄에는 아기 송사리가 많아 태어난다면, 가을은 숲 속의 꼬마 버섯들이 많이 태어난다. 그리고 가을은 풀벌레 소리부터 시작한다. 이 풀벌레 소리는 평화로운 자장가이다.
김신지 작가에 의하면, 추분에 계수나무 향기가 제철이라 한다. 계수나무 낙엽은 설탕물을 끓인 것처럼 진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긴다. 실제로 바닥에 떨어져 말라가는 갈색 잎 하나를 들어 올려 코끝에 대보면 기분 좋을 만큼 달콤한 향이 난다. 이 냄새의 원인은 계수나무 낙엽이 부서지면서 방출되는 '말톨(maltol)'이라는 분자 때문이라 한다. '말톨'은 설탕을 태워서 캐러멀을 만들 때 방출되는 분자이기도 하니까 '달고나'가 소환된다. 계수나무가 영어권에서는 '캐러멀 트리'로 불린다. 이파리도 동글동글한 하트 모양이다.
김신지 작가가 제안하는 추분 무렵의 제철 행복
▪ 밤 산책이 제철이다. 고궁의 달빛 기행이나 별빛 야행을 해 본다.
▪ 일몰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나만의 '노을 명당' 찾아보기
▪ 바닥에 떨어진 갈색 잎에서 '달고나' 향기가 나는 계수나무 발견하기
추분 날에/오태수
백로와 한로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 않고
오로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중심 꼭 잡고 있으니
갈 것은 떠나가고 올 것은 돌아오고 숨을 것은 숨으니
소슬바람 불어오고 가을이 영글어 가는 오늘이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똑같은 날이라 하니
너와 나의 사랑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늘 오늘 같은 날만 되고 쉬 식지 않는 열망 불타고
늘 그리움 쉬 저버리지 않는 애틋한 마음 맺히길
하얀 이슬이 빛나는 아침이면 밤새도록 서성이며
남기고 간 너를 가만가만 되집듯이 떠올려 본다
하얀 서리가 맺히는 날이
오기전에 그대 가슴 그리움만 맺히고
갈 햇살에 그리움만 빛나는
애틋한 사랑이 영글어 갔으면
제비는 떠난다고 저렇게
인정사정없이 먹이 사냥 여념 없고
찬 서리 내린다고 저 알곡들 여물어 가는 소리 들리온데
임은 어디에서 저 소리를 듣고 있을지
가을이 익어가는 추분 날
삭풍 부는 겨울이 저기 오기 전에
울 사랑 저울질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