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성 산중서재] 트리슐리의 물소리
'비 듣는 기세가 좀 누그러진 틈을 타서 다시 걷는다. 이제 길은 수직에 가까운 천길 벼랑으로 이어진다. 여우비라고 했던가. 오랑이 시집가는 날이라고 했던가. 햇빛 속으로 비가 내린다. 창공에 뿌려지는 수백억 수천억의 빗방울들이 샹들리에처럼 햇빛을 되쏘아 온 세상이 다 휘황찬란하다.'
'히말라야의 석청은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가네 무아(먹는 꿀)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나가네 무아(못 먹는 꿀)이다. 가네 무아는 사람이 먹는 꿀이다. 나가네 무아는 사람이 못 먹는 꿀이지만 야크나 버팔로 혹은 염소 등이 병이 났을 때 먹인다. 네팔 사람들은 절대로 나가네 무아를 먹지 않는다. 사람이 나가네 무아를 큰 수저로 한 수저만 떠먹어도 잠시 후 몸을 못 가누고 쓰러진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정도를 넘기면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죽지는 않는다.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가서는 차츰 살아난다.'
'소변을 보려고 밖으로 나왔을 때 헛간 쪽으로 가보니 벽이 없는 지붕 밑에서 사람과 짐승이 한데 어울려 자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닭들이 앉아 있고, 마이타의 어린 조카들은 책상보만 한 누더기 속에서 새끼 염소를 껴안고 있다. 사람 기척에 놀라 일어나 앉은 마이타 동생 부부는 거의 알몸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거듭 말한다. 그러나 그들 곁의 버팔로 송아지는 뭐가 그리 미안하냐는 듯 태연자약하게 여물을 씹고 있다. 하늘의 별은 여전히 총총하다. 달은 더욱 둥두렷하다.'
- 김홍성 著, 트리슐리의 물소리 中 -
평소에 그토록이나 흠모하고 존경하는 형님의 책이 나왔다. 이야기의 골개는 네팔의 석청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나까네 무아를 복용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기실 그들이 찾아다닌 풍광은 아무런 번잡도 없이 오로지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들만 놓인 소박한 풍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홍성 형님은 이로부터 히말라야에 매료되어 이듬해 인도 라다크, 그 이듬해 티벳 등을 다니다가 급기야 네팔 카투만두에서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열고 9년간을 지내게 된다. 형님은 ‘오지탐험 여행가’라는 타이틀도 있다. 젊은 시절 강원도 홍천의 내면 땅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네팔의 풍경만큼이나 조미료기가 없는 담박한 문장은 한 줄씩 읽을때마다 그대로 피가되고 살이되는 느낌이다. 지금은 경기도 포천 땅 명성산 기슭에서 칩거하고 있다. 세월을 어쩌랴 조실이라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허공한 헤어스탈에 등도 조금 굽었지만 형님은 여전히 소년이다.
술 한잔 걸치면 걸직하게 나오는 그 소탈한 웃음과 호탕한 목소리를 기억하자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에 드리운 우울의 커튼이 걷어지는 느낌이다. 머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한 소년들이 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시를 쓰고 글을 쓰며 지낸다. 몇 년 춘천에 계실 때 막걸리를 더 마셨어야 했다는 후회야 나의 몫이겠지만도 가끔 찾아가 보는 걸로 땜빵을 해야제. 형님의 안녕과 건필을 기원한다.~^^,(출처 최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