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호 렌즈세상] '장돌뱅이의 설움'
장돌뱅이가 장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뭘 먹고 살까? 장돌뱅이 정영신 동지의 장터 길을 따라 나선 지도 어느 듯 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든 땅 그리운 장터’ 전라남도 편에 이은 경상북도 편 제작을 위해 장터 길을 찾아 나서는 정 동지 마부 역활을 자처한 것이다.
한 동안 애마를 잃어 마부 노릇도 잃었는데, 한 달 전 늙은 말이 생겨 다시 따라 나선 것이다. 지난 8일 군위장을 비롯한 변두리 장 몇 곳을 돌아 본 것에 이은 두 번째 나들이였다.
1박 2일 일정으로 짜 놓았으나 동자동에 일이 생겨 당일치기로 바뀌었는데, 문경 농암장을 시작으로 현풍장까지 도합 다섯 장을 잡아 놓았더라. 면 단위 장은 대부분 오래 전 찍어 둔 사진이나 취재 자료를 사용할 작정이라, 문 닫기 직전의 안위를 살펴보는 정도에 그쳐, 바삐 움직이면 가능한 일정이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보슬비가 간간히 내리는 문경세재에 접어드니, 오전 여덟시가 조금 지났다. 문경 농암장은 운해에 뒤 덮혀 마치 폭격 맞은 전쟁터 같았다. 장터를 찾아온 장돌뱅이도 정동지 뿐이고, 물건 파는 매대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박근혜 정부 때 문화장터 광풍에 만들어진 텅빈 장옥과 공연장의 이질감이 얄밉도록 눈에 거슬렸다.
십여 년 전에 보았던 정겨운 장터 풍경은 오간 데 없고, '여로식당'만 눈에 익었다. 예천 용문장으로 고삐를 돌렸는데, 그 곳 또한 농암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사람이 없어 기름 집에 모인 할머니와 식당에서 만난 분들에게 장터 근황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라질 준비에 한창인 시골 오일장이 장돌뱅이들의 생명줄을 위협하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다. 농산물을 챙겨나온 아낙 한 분만 정류소 앞에 전을 펴, 버스에서 내릴 손님을 기다린다.
장터에서 조금 내려오니, 한 때 행세 께나 했을 듯한 대갓 집마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라지는 이치를 어쩌겠는가? 안동 길안장은 별도의 장터 없이 큰 길 주변으로 장이 섰는데, 여기도 사람 없기는 마찬가지다.
간간이 나타나는 노인마저 장터보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갔다. 의성 단촌장 역시, 파장이 아니라 폐장 된 것 같았다. 단촌 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어 지척에 있는 고운사에 들렸다.
지난 3월 최악의 산불이 휩쓸고 간, 천년사찰의 상흔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구름 위의 누각이라는 ‘가운루'와 연수전은 기와 조각만 딩굴었고, 범종루의 깨어진 범종은 그 날의 아픔을 증언했다.
불난 절이야 다시 짓겠지만, 문 닫은 단촌장은 다시 열지 못해 더 슬프다. 마지막으로 달성 현풍장에 갔는데, “현풍백년도깨비시장”이란 낯선 간판이 낯설었다. 큰 장이라 파장 무렵도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고향과 가까운 장이라 그런지 말씨들이 귀에 익었다.
아낙네 여럿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목소리가 커 싸우는 것 같았다. 목소리만 귀에 익은 게 아니라 먹거리도 옛날 고향 장에서 먹던 음식이었다. 오랜만에 우묵가사리와 묵채 맛을 보며 아련한 고향 생각도 했다.
장꾼들 만나 인터뷰하고 사진 찍느라 바쁜 정동지는 그 와중에 과일까지 잔뜩 사 놓았다. 현풍장 사과가 너무 싸서 샀다는데, 쌀은 떨어져도 사과는 떨어지면 안 되는 여자다.
지척에 있는 고향도 들려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청승 맞게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전방이 불투명해, 불빛 따라 가야 할 위험에 처했다.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비 때문에 더 심한 것 같았다.
온 신경을 전방에 집중하느라 졸음 올 겨를도 없었는데, 눈살을 찌푸려 운전해 그런지 눈물까지 고였다. 서울이 가까워오니 가로등 불빛에 도로가 한결 밝아졌다. 집에 도착하니 긴장이 풀려 정신없이 뻗어 버렸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장돌뱅이 보살 덕이다. 자고 일어나 정동지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초 가을 장기간 일정으로 한꺼번에 돌아보기로.. 다행히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에서 지원금까지 준다니, 숙박료도 해결되었다. 길이 있으면 열리기 마련이다. 장돌뱅이는 오직 길 따라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