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주 문예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만주 문예만보] 제주도학의 효시 / The Precursor of Jejudology
토박이 제주민속학자 진성기 선생께서 1936년생이시니 올해가 구순이다. 수년 전, 제주로 찾아뵈오니 선생은 뇌졸중을 겪으셨다. 그래도 정신이 또렷하셨고 지팡이를 짚고 식당에 점심을 드시러 갈 정도로 거동도 하셨다. 여전히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제주도학(Jejudology)은 진성기 선생에 의해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수년 전, 뵈었을 때 책을 세 권 주셨다. 평생에 다른 이들이 진 선생에 대해 쓴 글이나 선생께 보내온 편지들을 정리한 책이었다. 그중에 내가 오래 전에 쓴 글도 들어 있어 반가웠다. 왜냐하면 잃어버렸던 글을 새삼 찾았기 때문이다. 책 목차가 글쓴이 이름들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내 글만은 순서를 무시하고 제1권 제일 앞에 게재해 놓으셔 송구스러웠다.
1999년에 썼으니 무려 26년 전의 글이다. 잃었던 글을 살린다는 생각에 이곳에 싣는다. 긴 것 같아 앞의 두 문단을 뺐다.
90년대 말, 당시는 선생이 관장으로 운영하셨던 민간 제주민속박물관을 아직 삼양3동에 유지하고 계셨는데 수년 전 방문했을 때는 무명유실해졌다. 남아 있던 중요 유물은 거의 제주대학교에 기증하셨다고 했다. 선생의 제주민속박물관과 현재의 도립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는 전혀 다른 박물관임을 감안하시라.
<살아있는 돌하르방, 진성기 박사님>
이만주 (1999년 글)
너른 바다와 영봉(靈峯) 한라산을 벗하며 제주 바람과 함께 사셨음일까. 아니면 유라시아 대초원을 말 달리던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음일까. 제주민속박물관의 진성기(秦聖麒) 관장은 체구는 자그맣지만 호호탕탕하시다. 지난 제주도 여행 시, 나는 그를 처음 만나, 좀 외람되이 표현하자면, 나이를 잊고 의기투합했었다.
“진(秦) 선생 낳기 전에 이 섬에 사람이 살아온 지 누만(累萬) 년이지만, 제주민속학의 체계화라는 역사적인 대업은 선생이 탄생 성장할 때까지 누만 년 간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 유구한 시점에 선생이 안 나왔더라면 앞으로도 몇 해를 기약 없이 제주민속학은 임자 찾아 방황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일본서기대본(日本書紀臺本)인 백제삼서(百濟三書)가 거짓투성이임을 논증, 발표하여 한때 일본 역사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인호 박사(제주도 출신의 동북아 민족, 언어, 역사학자)가 생전에 진 관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위와 같은 표현이 다소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진 관장을 아는 사람들은 노학자의 그와 같은 표현에 숙연해진다.
대학 시절부터, 더 일찍이는 소년 시절부터 풍찬노숙, 생명까지 걸어가며 제주도의 문화유산을 수집, 정리하기 반세기.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을 가릴 것 없이 제주도의 자연부락 499개 동네를, 산간벽지에서 해변어촌에 이르기까지 줄곧 돌아다니며 보물 캐듯이 발굴, 수집하여 정리한 유형, 무형 민속문화재가 1만여 점. 진 관장은 그간 제주도를 무려 200여 회 이상 누빈 셈이다. 수집된 민속생활유물은 ‘제주민속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하고 민요, 전설, 속담, 무가(巫歌) 등 구비전승 자료들은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 연구하여 그때그때 논문으로, 저서로 간행했다. 스물두 살부터 시작된 저술은 마침내 ‘제주민속총서’ 전 30권이란 보배가 되어 남았다.
신(神)은 적시(適時)에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기 마련인가. 서구종교의 유입과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사라질 뻔했던 제주도의 문화유산은 사명감을 갖고 수집, 보존한 그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수용령과 함께 그를 무자비하게 쫓아낸 도립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설립도, 그 후 제주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각종 박물관, 미술관도 그의 선구자적인 행동에 영향받은 바 크다. 충실한 자료가 있어야 학문도 발흥하는 법. 제주민속학을 위시하여 제주와 관련된 국어국문학, 문화인류학의 발전은 그가 피땀 흘려 수집, 정리한 자료에 힘입었다.
그는 제주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제주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다. 그는 어머니가 해녀(海女는 일본말이며 잠녀潛女가 더 정확한 표현임)였고 아내도 해녀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해녀인 어머니에 의해 자라나는 얘기며, 역시 해녀인 부인이 그 추운 겨울 바다에서 물질로 모은 변변치 않은 돈으로 민간박물관을 이끌어온 지난날의 얘기를 읽노라면 눈물겹다.
지금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3공화국 시절, 수용령 발동에 의해 쥐꼬리만한 보상을 받고 애써 가꾼 박물관 자리를 도립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내주고 쫓겨나는 황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이야기, 좁쌀친구(몹시 소견이 좁거나 괜 상관없는 일, 부정한 일에 골몰하는 못된 이들을 가리키는 제주도말)들의 끊임없는 질시와 모략을 거뜬히 이겨내고 민속박물관을 오늘에까지 이끈 이야기는 자못 감동적이다.
그는 제주도의 풍물과 민속유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 읊는 감성적인 시조시인이기도 하다. “검붉은 몸매에 볼록한 배 풍만코나 / 수줍은 듯 어여쁜 듯 입만 어이 작다더냐 / 위쪽을 향한 입에서 옛이야기 나옵니다. -----” ‘물허벅’을 읊은 시조의 일부분이다.
그는 이와같이 ‘한라산, 비바리, 갈옷, 태왁박새기, 정낭’ 등 제주의 풍물과 유물을 주옥같은 시어를 사용하여 오백 수 이상의 시조로 알알이 엮어 놓았다.
입구에 “왕방강고릅서(오시어 보시고 가시어서 말씀하십시오)”란 간판이 서 있는 진 관장의 제주민속박물관(제주시 삼양3동 2505번지)는 요즘의 화려한 관광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비록 외관은 작은 박물관이지만 그곳에는 그가 반세기 동안 피땀 흘려 수집한 제주의 민속유물과 노작인 저서가 진열되어 있다.
앞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제주무신궁(巫神宮)’은 제주도 자연마을 499개 동네의 무신상 가운데에서 특징 있는 석상(石像) 143위(位)를 선정하여 모신 것이다. 반대편에 있는 ‘판관 김구(金坵) 선생 공적비’는 고려 고종 19년(1234년), 제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섬 전체에 넘쳐나는 돌을 밭의 경계와 집의 울타리로 쌓게 함으로써 최초로 삼다도의 돌문화를 일깨워 준 김구 선생을 기리는 비이다.
그러나 제주민속박물관의 제일 명품은 ‘살아있는 돌하르방’이다. 독보적인 제주민속학자, 발로 뛴 문화인류학자, 제주민속의 백과사전, 제주도 온 땅덩어리를 자기의 문헌이자 자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진성기 관장은 제주도의 살아있는 돌하르방이다. 선조가 제주 섬으로 들어온 지 600년, 그의 얼굴 모습이며 체구는 점점 돌하르방을 닮아간다.
제주도의 위락시설을 위해서는 수백억 원을 물 쏟듯 쏟아붓고 벤처기업들에는 수조 원이 몰린다는 시대에 그의 민간박물관 사업은 예나 이제나 힘겹기 그지없다. 소년은 어느덧 장년을 넘어 인생의 황혼 녘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고 그는 마음이 아플 때나 몹시 외로움을 느낄 때면 어김없이 버렁 바닷가를 거닐며 물새와 벗하며 지나간 생을 추억한다고 한다.
그가 있기에 뚝 떨어져 있는 화산도(火山島)는 더욱 풍요로운 섬이다. 한라산의 높이는 그의 자그마한 키만큼을 더하여 말해야 한다. 제주도의 한 선구자인 그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내 머릿속에는 어느덧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며 당장이라도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픈 제주앓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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