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기쁘고 평온한 삶을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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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미사의 복음 말씀 중에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가 나온다. <요한 복음> 제13장 27장이다. 마침 김병기 서예가의 글에서 만난 "知我者 其天乎(지아자 기천호), 나를 아는 이는 하늘이리라" 라는 글이 소환되었다. "공자는 자신에 대해 “때를 못 만났다 해서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내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워 위로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평하면서 “나를 아는 이는 하늘이리라”라고 했다.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노력했음에도 때를 못 만나고 사람의 뜻을 얻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력하면 한만큼 이루는 게 대부분이지만 실컷 노력한 일이 하루아침에 자연재해 혹은 다른 사람과의 불화로 인해 수포(水泡·물거품)로 돌아감으로써 하늘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할 일이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대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래로 착하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위로 하늘의 뜻을 깨달으려 노력하면 하늘은 언젠가 그런 노력을 알아준다. 일단운개부견천(一旦雲開復見天)! 구름만 걷히면 다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인욕(人慾·사람의 욕심)에 빠져 잠시 하늘을 잊었다 가도 문득 ‘이러다 가는 내가 벌 받지'라는 생각을 한다면 막돼먹은 사람은 면할 수 있다. ‘나를 아는 이는 하늘이리라'라는 믿음이 야말로 막돼먹은 사람, 막된 세상을 막는 힘이다. 김병기 서예가이고 전북대 명예교수의 글을 공유한다.

'나를 아는 자는 하늘이라'는 말은 하늘이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였으니 나는 평화라는 것을 아는 자이다. 예수도 산상수훈에서 말했다. 제 7복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지(智), 지혜의 이야기이다. 이 지혜는 깨달어야 한다. 무엇을 내가 평화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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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고,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Eirene)"로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생활에 골칫거리가 없을 때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는 다르다. 박해를 받을 때도 평화롭고, 냉장고가 비었을 때도 평화롭고, 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도 평화롭다."(차동엽 신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은 다음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①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은 지우지 않겠다.

②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겠다

③ 우리에게 결코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겠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짐과, 고통과 희생을 피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섭거나 두려울 리 없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평화이다. 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때 쓰인 '안식'이 그리스어로 '에이레네(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전쟁터에서, 역경의 반복판에서도 누리는 평화"라고 차동엽 신부는 설명하신 적이 있다. 그럼 이런 평화를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나? 차 신부는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허물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사랑해!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면 화해가 이뤄진다. 그 다음에는 사람과, 또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거다"고 했다. 평화에 대한 좋은 설명이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다. 심한 경우엔 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상처 난 자리를 얼른 닫아 버리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뜨끔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것도 아니고, 아찔했던 기억이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시에 찔렸던 자리에 자꾸 마음이 가고 눈길이 머물러 비록 한동안일지라도 상처가 있는 곳이 가장 아픈 곳이 되며 그래서 마침내 내가 사랑하는 곳이 된다. 가슴에 찔린 상처도 그렇다.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아니 사랑하면,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산상수훈 제 7복이 마음에 와 닿는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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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한 적이 있다. 정의를 실현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 중동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아랍인들은 ‘살람 알레이쿰(salām aleykum)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샬롬(šalôm)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두 단어는 셈족인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비밀을 품고 있다. 아랍어 살람(salām)과 히브리어 샬롬(šalôm)의 원래 의미는 바빌로니아 경제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0세기에 바빌로니아 경제문서에 이 ‘샬람’šalām이라는 아카드어 단어가 등장한다. ‘샬람’은 어떤 개인이 부채를 상환하여 자유로운 상태를 지칭한다. ‘샬롬’ 혹은 ‘살람’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완수하려고 집중할 때, 나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그것은 ‘침착(沈着)’과 ‘평안(平安)’이다." 배철현 교수에게서 배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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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삶 속에서 기쁘고 평온한 삶을 살려면,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대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극단을 멀리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지 말고, 중용을 추구하는 거다. 소박하게 지낸다. 드높은 소나무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장 높은 탑은 더욱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며, 산꼭대기는 번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순풍이 불어 돛이 부풀어 오를 때 돛을 다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평온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니다. 본능적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평온과 평안은 다르다. 평안은 일시적인 상태라면, 평온은 지속적인 상태 같다. 평온의 사전적 해석이 "조용하고 평안함"이다. 평온, 냉정, 침착은 동요, 흥분, 소란이 없는 마음의 평화를 뜻하는 정신 상태이다. 이는 평온함, 고요함,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평온함은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를 잘 설명한 전우용 교수의 글을 공유한다. "‘평화(平和)’를 글자 뜻 그대로 풀면 ‘수평적 조화’입니다. 위 아래 격차가 없는 것이 ‘평(平)’이니 그와 반대되는 글자는 ‘차(差)’입니다. 서로 어울리는 것이 ‘화(和)’이니, 그와 반대되는 글자는 ‘별(別)’입니다. 문자의 뜻으로 보자면,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라 '차별'입니다. 평화는 '압도적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인도'로 이루어집니다. 하마스에 비해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가진 이스라엘이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정의와 인도를 버리고 '압도적 힘의 우위'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다른 이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대접하는 마음이 평화의 정신이 아닐까?

열정적인 에너지로 살아갈 때도, 힘든 상황을 극복할 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다. 통제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활력을 높이고 성과를 높이지만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모든 것을 무기력하고 피폐하게 만든다. 고음의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바이올린도 연주가 끝났을 때 현을 풀어놓지 않으면 다음 연주에서 더 쪼아야 하고 결국 터지게 되어 있다. 힘든 역경의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극복하는 첫 번 째가 평온함을 유지하는 일이다. 부정적 자극과 생각을 멈추고 긍정적으로 달려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마음의 평온함이다. 행복한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경우이든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 '커렌시아(Querencia)'는 평온한 곳, 안식처, 휴식처 등을 뜻한다. 한때 소비 트렌드로 선정된 바 있는 이 단어는 투우장의 탈진한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숨을 고르기 위해 찾아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도시화, 산업화 속에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기만의 힐링 공간을 두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잠시 온전한 쉼의 여유를 얻는 곳이다. 현대인의 그러한 공간이 바로 '커렌시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커렌시아', 마음의 평온함을 일상에서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은 다음과 같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 고요, 자유, 행복 다 이어진다. "평화롭다, 자유롭다, 행복하다"는 같은 말이 아닐까? 마침 그 세 단어가 시 제목인 시가 있어 공유한다.

평화롭다. 자유롭다. 행복하다/김인식

안개비, 보슬비, 가랑비,

장대비를 골고루 맞아 보니 그가 말한

감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빗속을 걷는데 걸리적대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자유로웠다. 숲속 나뭇잎들이 장난을

걸어왔다. 숲에서 바닷가의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났다. 멀리 떨어진 마을의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게 숲을 찾아 스며들었다.

평화롭다. 자유롭다. 행복하다.

오감이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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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 <<도덕경>>에 '부쟁(不爭) 철학'을 매우 강조한다. '싸우지 마라'는 거다. 노자 <도덕경> 의 첫 단어는 도(道)이고 마지막 단어는 부쟁(不爭)이다. <<도덕경>>을 딱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도위부쟁(道爲不爭), 도란 싸우지 않는 것이다. 노자에게 '도'란 평화다. 각 장의 핵심 메시지를 추려서 요약해도 평화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많음을 알 수 있다.

▪ 무위하기에 다투지 않고,

▪ 자연을 닮아 너그럽기에 다투지 않고,

▪ 비우기에 다투지 않고,

▪ 소유를 주장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몸을 앞세우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자랑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화목하기에 다투지 않고,

▪ 검소하기에 다투지 않고,

▪ 편가르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강해지려 하지 않기에 다투지 않고,

▪ 만족할 줄 알기에 다투지 않고,

▪ 어린아이를 닮기에 다투지 않고,

▪ 겸손하기에 다투지 않고,

▪ 일을 꾸미지 않기에 다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