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창희 도시공학 박사, 한세대 교수 [사진=더코리아저널]
[권창희 도시탐구] 도시는 코드로 쓰여진다 / 권창희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소프트웨어 플랫폼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교통 앱을 열 때, 집 앞 가로등이 스스로 밝기를 조절할 때, 재난 경보가 시민에게 즉시 전파될 때, 보이지 않는 디지털 객체(Object)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도시의 ‘로직’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복잡한 디지털 생명체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설계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바로 객체지향 설계(Object-Oriented Design, OOD)**와 국제표준 ISO 37120·37122·37123의 만남에 있다.
도시 지표를 ‘객체’로 본다는 것
ISO 37120은 도시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주민 삶의 질을 정량화하는 24개 지표를 제시한다. 교통량, 대기질, 의료 접근성 같은 KPI(핵심성과지표)는 각기 독립된 모듈이자 객체로 볼 수 있다. 객체지향 설계의 ‘캡슐화’ 원칙처럼, 각 지표는 자체 데이터와 보고 방식을 갖추고 외부와 명확한 인터페이스(보고서·API)를 통해 소통한다.
ISO 37122는 이 중 ‘스마트’ 영역, 즉 준비–대응–복구–완화(Prepare–Respond–Recover–Mitigate) 단계별 운영 성숙도를 측정한다. 마치 부모 클래스로서 기본 지표를 상속(Inheritance)받아, 자식 클래스인 스마트 지표가 특화된 기능을 추가하는 구조다. 재난 대비 센서 네트워크, AI 기반 교통 예측 모델, 공공보건 비상대응(PHEM) 시스템 등은 모두 이 확장된 지표라는 이름의 객체로 살아 있다.
그리고, ISO 37123은 도시의 회복력(Resilience)을 다룬다. 위기 대응과 복구 과정을 수치화한 지표들은 ‘다형성(Polymorphism)’의 전형이다. 동일한 ‘준비’ 인터페이스라도 자연재해·사회재난·보건 위기 등 다양한 객체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 복구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소프트웨어적 사고로 도시를 재설계하다
객체지향 설계가 주는 이점은 명확하다. 모듈화(Modularity)된 지표 객체는 시스템 전체를 중단 없이 확장·유지보수 가능하게 한다. 느슨한 결합(Loose Coupling)에 기반한 객체 간 통신은, 특정 지표(예: 교통 시스템)를 업그레이드하더라도 전체 도시 운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 스마트시티를 통한 도시 전체를 가상 모델로 구현할 때도, 객체지향 설계 원칙은 빛을 발한다. 현장의 가로등·배수관·버스 정류장 객체들은 가상 공간에서 동일한 인터페이스와 메서드를 지닌 인스턴스로 생성된다. 이를 통해 정책 변화가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사전에 테스트하고 조율할 수 있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도시 소프트웨어의 유지보수는 누가 담당하는가?” 현실 세계의 시의원이자 IT 책임자, 데이터 과학자, 시민까지 모두 ‘개발자’다. OOD와 ISO 지표는 공통의 언어와 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이질적 이해관계자들이 같은 오케스트라 악보 위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을 잊지 않는 설계의 힘
물론, 기술만으로 스마트시티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ISO 37120·22·23이 강조하는 ‘보고·벤치마킹 절차’와 ‘민첩성 있는 운영 성숙도’는 모두 시민을 위한 것이다. 객체지향 설계의 최종 목표도, 코드를 세련되게 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도시의 각 지표 객체가 전송한 데이터는, 결국 시민 한 사람의 출근길을 단축시키고, 친환경 교통 수단을 선택하도록 유도하며, 재난 시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인다. 인간 중심 설계(Human-Centered Design) 철학이 코드 뒤에 숨 쉬는 이유다.
다음 세대를 위한 약속의 손가락
우리는 지금 스마트시티 1.0 단계를 지나고 있다. 앞으로 OOD와 ISO 지표 프레임워크에 AI-자동화, 블록체인 기반 투명한 감사 로그, 사용자 감정 인식 인터페이스, 양자 보안 프로토콜 등이 결합될 것이다. 각 객체는 스스로 보안 위협을 감지하고,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며, 사회적 형평성을 평가하는 ‘셀프 프로텍팅 객체(Self-Protecting Object)’로 진화할 것이다.
도시를 움직이는 코드는 여전히 사람이 작성한다. 하지만 그 코드는 점점 더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민첩하게 적응하며, 지속가능한 가치를 내장하게 될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시의 디지털 객체들과 교감하며, 더 나은 내일로 버전 업(Version-up)해 나간다.
필자: 권창희 도시과학박사 .
사단법인국제스마트시티연구원 원장,
한세대학교 교수.
mobpa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