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작가, 크리에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분열된 자아, 인정의 굶주림, 그리고 본질의 상실: 영화 《서브스턴스》를 철학으로 읽다
50세의 쇠퇴한 스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분)는 노화와 나이로 인해 TV 쇼에서 해고당한 후, 신비한 약물 ‘서브스턴스(substance)’를 통해 자신의 젊은 분신 ‘수(마거릿 퀄리 분)’를 생성한다. 7일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 신체를 교체해야 하고, 영화적 절대자 또는 미상의 존재로부터 둘은 하나임을 잊지 말라는 칸트의 도덕적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 주어진다. 늙어가는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자아인 젊은 ‘수(Sue)’는 곧 TV 쇼에서 스타 자리에 오르지만, 엘리자베스는 점차 노화와 소외를 겪는다. 한편, 대중의 인기와 욕망에 사로잡힌 수가 7일의 신체 교체 규칙을 어기며 독립하려 하자, 엘리자베스의 노화는 급격히 진행되고 하나이자 둘로 분리된 자아는 서로 갈등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중지하려 했지만, 자신의 젊은 분신을 차마 버릴 수 없어 실행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중간에 깨어난 수는 엘리자베스를 오해하고 무자비한 공격으로 결국 엘리자베스는 최후를 맞이한다. 둘이 하나임을 잊지 말라는 대전제를 잊은 수(Sue)는 결국 ‘괴물 수(monster Sue)’로 변신하며 파국을 맞이한다. 2024년 공개된 영화 《서브스턴스》는 데미 무어의 파격적인 연기와 함께, 유럽 영화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프랑스 영화감독 코랄리 파르자(Coralie Fargeat)의 수위 높은 고어와 극한의 심리 묘사가 압권인 영화이다.
그림 La Décalcomanie, 1966, René Magritte
영화 《서브스턴스》와 헤겔의 인정투쟁: 젊음과 권력의 변증법
1. 주인-노예 변증법과 정체성 갈등
엘리자베스(주인) vs 수(노예):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통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만, 노예는 노동을 통해 세상을 변형시키며 자의식을 깨닫는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는 수를 창조해 젊음과 명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수는 독립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주체로 부상한다. 이는 노예가 노동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며 자의식을 깨우치는 헤겔적 전환의 과정이다. 주인(엘리자베스)은 노예(수)에 대한 의존성으로 인해 몰락하고, 노예 역시 본질적 정체성 상실로 괴물이 되는 과정은, 이는 상호 인정 없이 진행된 투쟁의 비극적 결말을 상징한다. 헤겔은 진정한 자아실현이 “상호 인정”을 통해 이뤄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적대시하며, 끝내 주체성의 분열과 파국으로 이어간다.
영화에서 주어진 대전제 ‘둘은 하나’라는 명제는 처음부터 해체되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뤄두고.
2. 실체(Substance)와 주체(Subject)의 변증법
물질적 실체에서 주체적 실존으로: 헤겔은 “실체가 주체가 된다”는 개념을 통해, 정적 존재가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며 역동적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젊음의 물질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의 신체를 젊은 수로 변형시키지만, 이 과정에서 수는 독립적 의지를 갖추고 주체로 발현된다. 엘리자베스가 만든 수는 결국 그의 적이 된다. 이는 헤겔이 지적한 ‘자기 소외(Self-alienation)’가 극단화된 사례로, 외부적 대상화가 내부적 분열을 초래함을 보여준다.
3. 절대정신의 부재와 비극적 결말
종합(Synthesis)의 실패: 헤겔의 변증법은 정(Thesis)-반(Antithesis)-합(Synthesis)의 과정을 거쳐 고차원적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은 종합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이중적 부정’으로 끝난다. 이는 상호 인정 없이 진행된 투쟁의 결과를 은유한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만든 수는 욕망의 허상이고, 수가 얻은 대중의 사랑은 표피적 찬사에 불과하다. 헤겔은 진정한 자유가 ‘타인과의 화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지만, 영화는 내면의 화해 없이 외부적 인정에 집착한 개인의 소멸을 통해 사회적 인정의 허상을 비판하고 있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분열된 자아의 현대적 알레고리(allegory)와 욕망의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젊음과 명성을 향한 엘리자베스와 수의 인정투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소외된 주체로 전락하는 과정을 은유하며,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오히려 자아를 소멸시킨다는 경고와 함께 “진정한 인정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화해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적 사유를 고어(Gore) 장치로 재해석한다.
덧붙여, ‘서브스턴스’의 사용은 사회가 강요하는 젊음의 규범을 내면화한 결과다. 이를 푸코(Michel Foucault)가 비판한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의 논점에서 보면, 엘리자베스와 수는 ‘완벽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하며, 자기 감시의 사회화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엘리자베스와 수 사이에 형성된 미시 권력인 ‘자기 감시(죄수와 간수)’가 거시 권력으로 편입된 ‘TV 쇼(제러미 벤담의 Panopticon)’라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다시 한번 개인을 강제하는 ‘규율 권력’은 비판받는다.
그림 Not to Be Reproduced(Portrait of Edward James),1937, René Magritte
한편, 엘리자베스의 초기 좌절은 사회적 인정 상실에 기인한다. ‘인정을 둘러싼 투쟁’을 이야기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에 따르면, 이는 존엄성 훼손으로, 개인이 극단적 수단(서브스턴스)으로 인정을 쟁취하려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수가 얻은 인정은 표피적 찬사에 머문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 종속된 인정이 진정한 자아실현으로 이어지지 못함을 보여주며, 호네트가 강조한 상호주관적 인정의 부재를 지적한다. 헤겔과 호네트는 인간의 정체성은 타인에 의한 도움과 확인을 핵심으로 하는 상호주관적 관계가 이끄는 “자기 스스로 자신과 맺는 관계(relation-to-self)”에 의존한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타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호네트는 타자가 나를 멸시할 때, 그 멸시로 인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게 되는 점을 지적한다. 단순히 타자에 의한 인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호주관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자기 관계(relation-to-self)’를 인정의 중심에 두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인정투쟁의 수단으로 ‘서브스턴스’를 통해 젊은 수를 생성시킨 것은, 헤겔과 호네트가 지적한 이러한 인정의 반대 개념인 ‘모욕’으로부터 극복하려는 도덕 충동에 기인한다.
영화 《서브스턴스》와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
1. 현존재의 분열과 비본래성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Dasein)’로 정의하며, 진정한 자기 존재를 직면하는 것을 강조한다. 엘리자베스는 노화와 사회적 배제를 피하려고 ‘서브스턴스’로 수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비본래성(inauthenticity)’을 선택한다. 이는 현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죽음-을-향한-존재)”을 외면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젊음'이라는 규범에 도피하는 행위이다. 엘리자베스는 노쇠한 자신을 거부하며, 수를 통해 '타인(the They)'의 시선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이는 하이데거가 경계한 '세속적 일상성'에 머무는 비본래적 존재의 전형이다.
2. 분신(수)의 등장과 자기 소외
수는 엘리자베스의 ‘투사된 가능성’이지만, 점차 독립적 의지를 갖추며 주체로 부상한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이는 현존재가 자신의 ‘잠재성’을 외부로 분리해 소외되는 과정이다. 영화에서 두 인물의 갈등은 단일 의식이 자기 “자신과의 투쟁”으로 확장되며, 이는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분열시키는 비극을 상징한다. 이런 ‘던져짐(Throwness)’의 왜곡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임을 거부하고, 인위적 ‘수단(서브스턴스)’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투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의 경험을 일시적으로 공유하지만(단일 의식), 외부적 갈등으로 인해 소통은 단절되고 실존으로서 ‘공동 세계(Mitwelt)’에서의 상호 이해가 붕괴한다.
3. 기술적 개입과 존재의 위기
‘서브스턴스’는 하이데거가 경계한 ‘기술의 본질’을 반영한다. 기술이 인간의 존재를 도구화하고, 본질적 자기 이해를 왜곡시키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와 수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기술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환상을 비판하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체를 초래함을 보여준다.
4. 비본래성의 종말과 자기 파괴
영화의 결말은 하이데거에 따른 ‘불안(Angst)’의 극단화를 드러낸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파국은 현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존재의 상실’을 상징한다. 진정한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세계와 화해해야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 화해를 거부함으로써 자기 분열과 소멸을 초래한다.
《서브스턴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가 어떻게 존재의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은 현대인이 기술과 사회적 규범에 종속되어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는 과정과 분열된 현존재의 알레고리를 영화로 재현한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와 신체 변형의 자극을 넘어,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의 분열, 인정의 욕망, 그리고 본질 상실의 문제를 헤겔과 하이데거의 철학, 그리고 현대적 권력과 자기 감시의 문제의식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은 유한성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하이데거의 통찰이 영화를 관통하는 숨은 메시지이다.
정리하자면,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은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를 읽는 데 핵심적인 틀을 제공한다. 엘리자베스는 젊고 아름다운 ‘수’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 하지만, 점차 수가 대중의 사랑과 주체성을 획득하면서 관계는 역전된다. 주인(엘리자베스)은 노예(수) 없이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고, 노예(수)는 자신의 능동적 실천을 통해 주체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 인정투쟁은 상호 화해로 나아가지 못한다. 서로를 파괴하는 투쟁만이 남고, 결국 두 존재 모두 본질을 상실한 채 소멸한다. 이는 타인의 시선과 외적 인정에만 의존할 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잃고 만다는 헤겔의 경고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셈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존재의 본질을 직면해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노화와 쇠퇴라는 본질적 조건을 외면하고, ‘서브스턴스’라는 기술적 수단으로 ‘더 나은 나’를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오히려 자기 분열과 소외를 심화시킨다. 젊은 수는 엘리자베스의 투사된 가능성이지만, 점차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며 본체와 분리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비본래성(inauthenticity)’의 길을 택한 셈이다. 사회의 규범(젊음, 아름다움)에 순응하며 자신의 유한성을 회피할 때, 인간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고, 결국 자기 파괴로 귀결된다.
푸코의 ‘규율 권력’과 현대적 자기 감시의 논의는 《서브스턴스》의 배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더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규율한다. 그러나 이 자기 규율은 자유가 아니라, 신체와 정체성의 분열, 자기 소외로 이어진다. 영화는 ‘더 나은 나’를 향한 집착이 어떻게 자기 감시와 자기 처벌의 악순환으로 변질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끝없는 내적 투쟁에 내몰린다.
그림 The False Mirror, 1928, René Magritte,
영화의 제목 ‘서브스턴스(Substance)’는 물리적 물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 본질, 실체라는 확장된 의미이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갈등은 ‘본질을 잃은 존재’의 비극을 상징한다. 젊음과 외적 아름다움, 타인의 인정만을 좇다 보면, 결국 나의 본질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껍데기뿐이다. 영화는 “더 나은 나”란 본질을 망각한 채 외양만 추구할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소외와 파멸로 빠질 수 있는지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중첩으로 경고한다.
《서브스턴스》는 현대 사회의 외모·젊음의 집착,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 기술과 자기 감시의 함정이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는지 영화적 언어로 해부한다. 헤겔은 진정한 인정은 상호 화해에서, 하이데거는 진정한 존재는 유한성의 수용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영화는 이 두 철학자의 경고를 따라, “더 나은 나”란 본질을 잊지 말고, 외부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자기실현을 찾아야 함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결국, ‘나’의 본질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분열된 현대인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임을 《서브스턴스》는 말하고 있다.
글·그림 이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