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나는 구루가 되고 싶다.
1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그 때마다 나는 소환하는 문장이 있다. "학위인사(學爲人師) 행위세범(行爲世範)"이다. '학문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야 하고, 행실은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 안회의 삶을 묘사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북경사범대학의 교훈이기도 하다. 내가 나온 사범대학의 '사범(師範)'의 어원이다. 좀 더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배워서 남의 선생이 되고, 배운 바를 실천하여 세상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도 실천하고 싶다. 교육자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행실에 있어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이라 생각한다. 인성(人間性)을 갖추지 못한 교사가 나가면 지식 전달자이지 선생이 아니다. 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직업은 선생님밖에 없다.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학생에게 신뢰를 얻어야 되고, 언행이 진실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 나는, 학습을 통해 인류의 성현들이 남긴 고전과 경전을 공부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인생이 행복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일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생의 사명을 모색하며, 매일 <인문 일지>를 쓴다. 이때 사회에 진출하여 의미가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선생'이라 부른다. 배철현 교수는 "'선생'은 축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후에 태어난 사람에겐 '선생'이다. '선생'은 또한 새로운 정보를 통해 타인을 무지와 무식으로부터 탈출하게 도와주는 자다.
2
선생은 그 기능에 따라 '강사'와 '스승'이 있다. 강사는 학생들이 입시, 졸업, 혹은 사회진출을 위한 취업을 위해 존재한다. 강사는 학생들이 소정의 시험을 높은 점수를 취득하여,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준다. 배 교수에 의하면, '강사'를 요가훈련과 연결시킨다면, '아차르야'(acharya)에 해당한다. 산스크리트어 '아차르야'는 요가 수련생들에게 신체적인 훈련을 위해 정해진 몸동작과 호흡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아차르야'와 요가 수련생의 관계는, 강사와 학생과의 관계처럼, 수련장 안에서 끝난다.
반면 스승은 강사와 다르다. 스승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배철현 교수에게서 배웠다.
▪ 종교적인 선생을 의미하는 한자 '사'(師)의 중국식 발음에서 유래했다는 설: 스승은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안내자다. 그는 마치 인도 대서사시 <바가바트기타>에서 영웅 아르주나를 전쟁터에서 인도하는 크리슈나이며, <<신곡>>에서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지도하고 인도할 수 있는 이유는, 지옥을 먼저 경험하여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스승은 자신의 경험에서 깨달은 바를 전달하는 자다.
▪ 인도전통에서 '구루'(guru)가 스승에 해당한다는 설: 구루는 말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 언행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구루는 언제나 자신이 흠모하는 자화상이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몸에 체득하기 위해 조용히 정진한다. 그의 언행은 어둠 속에 찾아온 빛과 같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악행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구루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인도자다. 그의 목표는 오랜 수련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을 언행으로 조용히 실천하는 자다. 그의 언행은 향기롭다. 사람들은 그 향기에 이끌려 그에게 모이기 마련이다.
'구루'에 대한 어원은 다음 두 가지다.
▪ 첫 번째 어원은 '무겁다'란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형용사 '구루'(guru)에서 찾을 수 있다. 구루의 언행은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한 훈습(薰習)의 상태다. 훈습이란 향이 그 냄새를 옷에 배게 한다는 뜻이다. 훈습은 어떤 사람이 지닌 그 사람만의 독특한 향기다. 구루는 교실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훈습으로 가르치는 자다. 반드시 어떤 인상이나 힘을 마음 속에 남긴다.
▪ 두 번째 어원은 인도경전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민간 어원설에 근거한다. 민간 어원설이란, 어떤 중요한 용어에 대한 어원이 불분명할 때, 사람들이 마음대로 그 어원을 설명하다 여러 사람에게 회자된 것이다. '구루'의 '구'는 '어둠'을 의미하고 '루'는 '없애다'라는 의미다. '구루'를 설명하자면,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어둠을 걷어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구루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매일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여, 그 안에 저절로 생기는 욕심, 분노, 거짓과 같은 어둠을 걷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구루가 되고 싶다. 말로 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 구루는 우리 안에 겹겹이 쌓인 어둠을 걷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자비를 발굴하도록 유도하는 자다.
3
지금은 은퇴하고, 나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죽는 날까지 세상과 딸 그리고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버팀목에 대하여/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움직여야 산다. “움직여라.” 운동을? 운동은 아무나 하나? 싫다. 다시 속삭이는 소리. “걷기라도 해라.” 걷기도 싫다. 숨도 쉬기 싫다. 다시 떠오르는 소리. “아무도 안 도와준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평범한 하루가 당연히 오는 것은 아니다. 쉼 없이 밀려드는 일상의 혼돈과 내 몸속의 복잡한 구조, 기능이 얽히고설키면서 내가 그 속에 끼어들 때 비로소 보통의 하루가, 하루의 기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과는 어김없이 이어진다.
▪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기: 나 만의 방식으로 아침에 비타민을 먹고, 식물성 프로틴(단백질)과 식물성 섬유와 장 균형을 위한 유산균으ㅗ 아침을 대신한다.
▪ 운동하기: 움직이지 않으면 긴 시간 누워서 불편한 간병인 손에 내 인생이 맡겨진다.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 나는 틈나는 대로 맨발 걷기를 한다.
▪ 치매 예방: 치매는 늪에 빠지는 일. 가족들까지 끌고 들어가는 늪이다. 그래 매일 <인문 일지>를 쓴다.
▪ “삶은 치사하고 비루하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더 이상 비루해지지 않기 위해 오늘도 버거운 하루의 기적을 시도한다. <인문 일지>를 쓰기 위해 매일 새로운 책을 읽고, 새로운 생각들을 만난다.
가끔 ‘마지막으로 주어진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출근은 당연히 안 할 테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의 여행? 사랑하는 사람들 과의 마지막 인사? 유언장 작성? 버킷리스트 작성이 유행일 때 써놓은 것은 있지만, 막상 선택하려고 보니 ‘이게 정말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쉽게 선택을 못 하고 있는데, 문득 ‘평생 해왔던 것이 사실 마지막까지 가장 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도 가족, 친구 등 사실은 평생을 봐온 사람들이니 말이다. 평생 해왔던 것을 계속하다가 죽는 거다.
4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를 보면, 불행 속을 걷는 어린 주인공이 쓰러진 나무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이 나무를 좋아하는지 알아? 나무는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산책 길에서 쓰러진 나무를 볼 때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쓰러질 때마다, 이 대사가 떠오른다. 거대한 부의 축적도, 어떤 사회적 영역도. 그래도 남은 의미가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연소했느냐 여부가 아닐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완전 연소하고 죽는 거다. 우리는 알아야 질문을 한다. 그런데 안다는 것과 익숙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일한 것, 많이 주워들은 것, 즉 익숙한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말하는 것은 전문성을 넘어 통찰력의 단계까지 진화한 것을 뜻한다. 그러려면 자기 분야만 잘 아는 것을 넘어 세상을 보는 관점, 역사적 지식,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춘 것을 뜻한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익숙한 걸 낯선 시각으로 볼 수 있고, 거기서 질문이 나온다. 질문이 중요한 건 다 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질문을 하려면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걱정만 할 뿐 제대로 된 질문도 고민도 할 수 없다.
5
<<고수의 질문법>>을 쓴 한근태 저자는 '최선(最善)'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히토 모토시계의 <<도쿄대 교수가 제자들에게 주는 쓴 소리>>라는 책을 소개하였다. 히토 모토시계에 의하면, "연구자의 인생은 3단 로켓이다." 이 말에 나도 동의한다. 연구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낡은 로켓을 몇 번은 떼어내고, 새로운 로켓을 점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안의 연료를 남김 없이 연소해야 한다. '완전 연소(燃燒)'라는 말을 하면, '최선'이란' 말이 잘 이해된다. 젊은 시절 목표한 바를 이루지 않고 그 로켓을 떼어내선 안 된다. '최선'은 독하게 그 일을 해보는 것이다. 해볼만큼 해보면 결과가 어찌됐건 미련 없이 그 일을 털 수 있다. 젊은 시절 있는 연료도 제대로 태우지 않으면서 떼어낼 생각은 안 했는가? 질문해 본다.
한근태 저자에 의하면,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할 수 없다. 반대로 질문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질문을 받는 순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질문은 날카로운 송곳과 같다. 잠자고 있던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자주 던진다고 한다.
▪ 지금 행복한가?
▪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가?
▪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 외, 다양한 질문들이 가능하다. 우리는 누구나 잘 살고 싶다. 실제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 보는 방법이 다음과 같이 "살날이 일 년 밖에 남지 않아도 지금처럼 살고 싶은가"란 질문에 "지금과 똑같이 살다가 죽고 싶다"는 대답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살다가 죽으면 억울할 것 같은가"란 질문에 "그렇다고"고 답하면, 뭔가 아쉬움이 있는 삶이다.
아쉬움이 남는 삶은 불완전 연소이고, 완벽한 삶은 완전 연소에 해당한다. 불완전 연소는 연기가 많이 나고, 그을음과 냄새도 많이 난다. 완전 연소는 그렇지 않다. 깨끗하다. 나옹 선사는 "태어남은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 하늘의 구름은 영원히 머물지 않아라. 나고 죽는 인생사가 그러하 네"라고 말했다. 살아서는 부끄럼 없이 철저하게 연소하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생전에 남겼던 이름과 기억마저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