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작가, 크리에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인간은 왜 죽도록 설계되었는가?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죽음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삶의 주어진 한계를 초월하여 존엄한 개인으로서 ‘실존’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다.
‘인간이 만일 죽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생명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단정하여 말한다면 살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 곧 생명이다. 생명이 동전이라면 삶과 죽음은 각각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명제다. 과학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노화’라 부르고, 철학은 ‘존재의 유한성’이라 말한다. 예술은 죽음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삶을 심화시키는 미학적 사건’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죽도록 설계되었을까? 먼저 생물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죽음은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밖에 없다. 한 개체가 무한히 살아간다면 새로운 세대가 설 자리는 사라지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기회도 잃게 된다. 끊임없는 나의 복제가 아닌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 낸 생물학적 진화, 이것은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이 그토록 사랑하던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바로 지구에서 벌어진 가장 신비로운 사건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진시황이 세계 곳곳을 뒤지며 찾던 불로초 또는 그런 불멸이-절대 권력자의 욕망을 상징하였으나 사실 대다수 인류의 욕망을 그에게 투영한-초기의 지구에서 생물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무성생식(asexual reproduction)이 바로 그것인데, 그러나 무성생식을 통해 ‘죽지 않는 나(The Immortal Me)’를 유지할 수 있었던 지구의 환경과 거기에 맞물려 있던 생물학적 초기 조건은 영원할 수 없었고 결국 진화해야 했다. 화산, 지진, 혜성 충돌, 지각 변동, 바다와 대기에 녹아있던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의 변화, 급격한 기후변화 등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의 변화는 생물학적 불멸의 ‘변하지 않는 나’를 자연에서 그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유전적 다양성의 결핍을 필연적으로 내포한 불멸은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곧 개체와 종의 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를테면 ‘히드라 불가리스(Hydra vulgaris)’와 같은 생물학적 불멸(논란의 여지가 있으나)을 누리던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은 유성생식(sexual reproduction)과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바로 그것이다. 물론 예시로 언급한 히드라 불가리스가 유성생식, 싹트기, 그리고 재생을 통한 간접적인 번식과 같은 세 가지나 되는 복합적인 번식 방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유성생식은 끊임없는 재생과 복제로 불멸을 누렸던 ‘죽지 않는 나’를 포기하고 다른 유전자와 섞이며 또 다른 나로 태어나 변화하는 지구환경에 적응하고자 진화한 새로운 생명·생존 시스템이다. 일종의 유전자 칵테일을 만든 셈이다. 하나의 종 안에서 각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쓸모 있는 유전자들을 섞으며 유전적 다양성을 통해 새로운 환경과 자원의 증감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생존 확률을 높인 것이다. 유성생식으로 만들어진 나의 후대가 새로운 생명 시스템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유전자를 전달한 생물학적 나는 시스템에서의 역할이 끝남과 동시에 죽어야 한다. 내가 더 이상 제한된 자원을 소모하지 않아야 유성생식이라는 생명 시스템의 유지가 가능하다. ‘유성생식과 죽음’은 처음부터 동전의 양면처럼 커플링을 이룬 생명 시스템이다.
‘죽지 않는 나’를 포기한 지구의 새로운 생명 시스템에서 인류가 등장한 것은 신생대 4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생 인류에 가장 가까운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은 45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구석기 시대인 불과 4만 년 전에 불과하다. 지구의 역사가 하루 24시간이라면, 현생 인류는 밤 11시 59분 59초쯤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문명이라는 그것을 가지게 된 시간은 아무리 초를 잘게 쪼개어도 나타낼 수 없는 섬광처럼 스친 찰나에 불과하다. 우린 아직도 죽음과 커플링 된 이 지구의 생명 시스템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그것을 숭고하게 받아들이기엔 부족한 존재일지 모른다.
거시적 생명의 순환에서 사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의 신선도(The Freshness of Life )’를 지키는 하나의 장치이자 지구적 함의이다. 신선한 유전자의 다양성과 거기서 확장된 유전자 풀(pool)이 지속적으로 인류를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게 만든다.
Magdalene with the Smoking Flame, Oil on Canvas, 1640, Georges de La Tour
철학·예술적 입장에서 고찰하면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적 가치이다.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나누고, 꿈을 꾸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쓴다. 만약 삶이 영원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절박하게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철학과 예술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거울,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창구, 그리고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는 상징으로 여겼다. 삶의 진실, 존재의 유한성 그리고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는 장치로 삼기도 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를 물은 것은, 죽음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는 극한의 질문으로써 작동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지. 흑사병(추정 사망자 7천5백만~2억 명) 과 ‘30년 전쟁(추정 사망자 800만 명)’이 휩쓸고 간 암흑의 중세, 비극을 통해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등장한 '바니타스(Vanitas)'와 같은 정물화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시든 꽃, 모래시계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영원의 문제를 탐구하였고, 모차르트의 『레퀴엠(Requiem)』은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두려움과 초월적 구원을 동시에 담아내고자 했던 인간적인 하나의 시도였을 것이다.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Vanitas, Life and Death, 2025, LEE Hongseok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보며, 삶은 본질적으로 이 분리를 준비하는 것이라 여겼다. 철학은 곧 죽음을 위한 연습으로 진정한 지혜와 자유를 얻는 과정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죽음을 인간 존재(현존재; Dasein, There-Being)의 본질적 가능성으로 규정하고,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인 인간(생물학주의적인 실체로서의 개념)은 자각을 통해 비본래적 삶(타인의 기대에 묶인)에서 벗어나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라 주장했다. 단순히 생물학적 시간이 흘러 죽음에 다가가는 존재가 아닌,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로서 죽음을 인지한다는 것은 삶의 가치를 안다는 것의 방증임을 설명한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존재와 무(Being and Nothingness)』에서, 죽음을 인간 존재의 ‘부재’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을 ‘타인의 사건’으로만 알 수 있으며, 죽음 이후 인간의 자유도 무의미해진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우리는 죽음을 미리 알지 못한다. 오직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의 사건’으로만 등장한다. 이것은 실존의 문제이다. 현생 인류의 등장 이후 존재는 죽음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지만 정작 죽음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존재’의 극단적인 사건으로 사르트르에 의해 이해된 죽음은, 비가역적 과정(irreversible process)을 거쳐 진행될 뿐이다.
여기서 비가역적이라 언급한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의 핵심인 엔트로피(Entropy)가 자연에 맡겨진 ‘고립된 시스템(외부와 에너지를 주고받지 않는)’에서 열역학적 평형을 향해 비가역적으로 진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코 감소하지 않으며 오로지 증가하는 현상과 방향만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모든 시스템이 시간이 지나면 더 무질서해지고 에너지를 덜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명체 역시 내부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며 엔트로피 증가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비가역적 엔트로피의 증가는 생체 내부의 복잡한 구조(세포, 기관 등)를 하나하나 손상시키고, 복구 능력을 감소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의 누적이 바로 노화(aging)의 발생이며, 나아가 생명체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즉, 죽음은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증가에 끝내 저항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세포가 유전자를 복제하고 단백질을 합성하며 매우 정교한 과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지만, 복제의 오류, 산화 스트레스(oxidative stress), 면역력 저하 등의 누적은 점차 무질서를 증가시킨다. 생명체는 엔트로피에 저항하며 살아가지만, 이 저항은 영원할 수 없으며, 죽음은 엔트로피 증가가 지배하는 자연스러운 영역인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은 “엔트로피 증가는 자연에서 질서 있는 구조가 탄생하여, 다시 해체되는 순환 과정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은 질서 있는 생명체로 태어나 스스로 무질서의 끝에서 소멸한다. 이는 과학적 증명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가 하이데거의 현존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련하여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The Vision of Saint John, Oil on Canvas(1608-1614), El Greco
사실 우주도 죽는다. ‘열적 죽음(thermal death)’ 또는 ‘빅 프리즈(Big Freeze)’로 불리는 절대 영도(-273.15°C)를 향해 지속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뱅 이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흩어져 균일하고 무한한 상태가 된다면, 더 이상 우주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열적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멈추게 된다는 일종의 ‘우주적 종말 시나리오’이다. 하지만 이런 우주적 사건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당장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을 향해 비가역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엔트로피 또는 유성생식과 죽음의 커플링을 선택한 자연 진화와 생명공학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게다가 인간에겐 생명체의 죽음이 아닌 또 다른 하나의 죽음, 바로 ‘사회적 죽음’이 남아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어떻게 관계하고 역할 하며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을 고민한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객체인 나’와 세계를 마주 대하고 있는 ‘주체인 나’로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이중적 현존재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계에 속한 객체이자 세계를 대상으로 삼는 주체이기도 한 유일한 지적 생명체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장례(funeral)’를 치르는 사회적 죽음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장례를 치르는 유일한 생명체로,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며,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는 행위를 숭고하게 여긴다. 생물학적 죽음보다 사회적 죽음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생명체라니. 최근,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증가한 것만 보아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키며 마지막까지 의미 있는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는, 그만큼 인간에겐 물리적 생명의 소멸뿐만 아니라 정신의 영역인 사회적 소멸 또한 중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일례로, 201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라이징 스타 동굴(Rising Star Cave) 안에서 발견되었고, 20~30만 년 전에 지구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화석 ‘호모 날레디(Homo naledi)’가 2023년 공개된 출판 전 논문에 따르면, 화석 발굴 과정에서 집단 매장의 형태와 벽화 등이 발견되어 인류의 죽음과 내세에 관한 추상적 생각이 시작된 시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네안데르탈인(20~5만 년 전)이 살았던 시기보다 더 빠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만큼 인류에게 죽음에 대한 인식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생명에 그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인류는 추론하는 존재, 주체이자 대상화된 객체이기에 나 역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인류에게 죽음이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첨단 과학기술과 의학이 발전해 인간의 죽음이 멈춘다면, 표면적으로는 당장의 삶이 희망적이고 기적 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죽음이 사라진 인간은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삶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목표가 흐려지고, 존재의 피로가 몰려올 수 있다. 오래 살수록 지루함, 무기력, 관계의 파탄 같은 개인과 사회적 문제가 깊어질 수도 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시간의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언젠가 끝난다”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사랑하고, 무언가를 창조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긴다. ‘삶의 서사’는 목표와 끝이 있기에 의미가 있지만, 영원한 삶은 이 서사를 무의미한 무한 루프에 가둬버릴 것이다.
죽음이 제거된 인간은 심리적 붕괴를 겪을 위험이 크다. 심리학자 에른스트 베커(E. Becker)는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시도는 결국 더 깊은 불안과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라고 경고했다. 죽음 없는 존재는 영원한 무기력, 정체성 혼란, 삶에 대한 혐오를 경험할 수 있다. 심리적 목표 상실로 인한 우울증, 인간관계의 무의미화, 세대 간 연대 상실 같은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는 개인 차원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심리 실험에서도, ‘영원히 산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많은 이들이 ‘목표를 잃고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전략’이다.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 Dobzhansky) 같은 생물학자는 “생물은 오직 변화를 통해 생존할 수 있으며, 죽음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라고 말했다. 변화 없는 존재는 결국 생명력을 잃고 자신을 스스로 부식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은 인간을 불행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에 빛을 더하는, 자연의 역동적인 시스템이다. 개체가 불멸이라면, 유전자 풀은 고정되어 새로운 돌연변이와 진화를 거부하게 된다. 그러한 상태는 외부 환경이 변할 때 종 전체가 도태될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고대 바다를 지배했던 삼엽충은 놀라울 정도로 긴 생존 기간을 유지했지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했다. 만약 모든 인간이 죽지 않고 존재한다면, 사회는 정체되고 창의성은 무뎌지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공간조차 잃게 될 것이다.
죽음은 결코 인간 존재에 대한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생명과 인간성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장치이다. 과학은 죽음을 극복하려 하지만, 철학과 예술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 권한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의 한계를 깨닫고, 그 속에서 사랑하고 성장한다. 죽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불멸을 향한 욕망은 결국 존재 그 자체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다. 물론 인간은 과학적 기술 발전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줄여나갈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는 존재’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유한한 삶 속에서 충만한 생을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전처럼 연결되어 있다. 삶을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그 당위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유한함 속에서 더욱 깊고 찬란하게 살아가야 한다. 삶은 죽음을 통해 빛나고, 죽음은 삶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다.
글·사진 이홍석
*** 그림 설명
그림1) 바로크 시대 ‘왕의 화가’로 칭호를 받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가 그린 연작 ‘불꽃을 든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릎에 해골을 얹고 책상 위에 밝은 촛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촛불을 바라보며 턱 밑에 손을 괴고 있으며, 책상 위에는 다른 연작에서의 책과 마찬가지로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다. 그중 하나는 성경이다. 책상 위에는 십자가와 밧줄이 있다. 밧줄은 막달라 마리아의 허리에 묶인 밧줄과 함께 삶과 죽음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막달레나가 턱에 손을 괴고 앉아 다른 손으로 두개골을 어루만지며 죽음을 관조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2)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란데런 지역에서 유행한 정물화의 한 장르. 중세 말 흑사병, 종교 전쟁 등 여러 비극적인 경험으로 인하여 탄생했다.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촛불, 시든 꽃, 썩은 과일 등의 오브제를 그리며 인생의 무상함을 암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Vanitas, Life and Death’는 작가 이홍석이 17세기 죽음을 상징하던 정물화를 오마주(homage)하여 생성형 인공지능(AI)과 디지털 페인팅 등의 기법으로 제작했다.
그림3)‘성 요한의 환상’은 엘 그레코의 생애 말년에 톨레도에 있는 성 요한 세례자 병원 교회를 위해 제작된 대형 제단화의 일부이다. 엘 그레코의 환상적인 팔레트와 다른 세상의 형태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주제인 요한계시록(6:9-11)을 바탕으로 종말의 묵시적인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