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작가, 크리에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파문과 침묵: 연못의 존재론과 미학
미셸 세르(Michel Serres, 1930~2019)는 연못을 바라보며 단지 자연의 한 장면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연못을 하나의 철학적 거울, 곧 존재와 시간, 소통과 침묵이 교차하는 장소로 삼는다. 그의 저서 『기식자』에서 연못은 언어와 침묵, 질서와 교란, 소음과 음악 사이의 관계를 은유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연못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한다. 표면은 고요한 듯 보이지만,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고, 한 마리 물잠자리의 착지로도 작은 소용돌이를 만든다. 이때 파문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개입, 기생적 요소다. 세르는 이러한 ‘기식자(Le Parasite)’가 질서를 어지럽히면서도, 그 질서 자체를 성립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연못에 떨어진 이파리 하나, 그것이 만들어낸 파문은 그때까지의 정적을 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고요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세르에게 연못은 침묵 속의 언어이자, 질서 속의 어긋남이며, 존재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매끄러운 표면의 거울이다. 연못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자신도 이 연못처럼, 자신이라는 표면에 세계의 흔들림을 반영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연못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철학적·미학적 사건의 공간이다. 그것은 자신을 투영하는 동시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수면으로, 파문 속에서 과거를 흔들며, 그 흔들림 안에서 현재의 순간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미셸 세르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의 가능성을 고요한 연못의 침묵과 파문 속에서 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한편,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연못은 감각의 무게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속적인 관찰과 반복을 통해 동일한 연못, 동일한 수련을 끊임없이 다시 그린다. 왜일까?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그리기 위해서다. 모네의 연못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이며, 수면 위에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는 물질이 아닌 순간의 흔적이다.
미셸 세르의 연못처럼, 모네의 연못 또한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보는 이에게 자기 감각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물의 파문은 단순한 흔들림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의 감각적 현현이다.
Claude Monet, Japanese Footbridge Over The Lily Pond, Oil on Canvas, 1899
반면, 호크니(David Hockney, 1937~)의 연못—그의 유명한 수영장 시리즈에서 등장하는—은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다. 그의 수영장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 욕망, 시선이 교차하는 감각의 건축물이다. 파란 수면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과 기억, 그리고 시선의 굴절이 반사된 심리적 무대이다.
호크니의 평평한 시점, 날카로운 그림자, 반복적인 구성은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관찰자의 개입을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세르가 말하는 ‘기식자’처럼, 정적의 구조 속에 소란의 흔적을 남긴다.
David Hockney, 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 Acrylic on Canvas, 1972
모네는 시간의 연못을, 호크니는 자아의 연못을, 세르는 존재론적 연못을 그린다. 세르의 연못은 파문을 통해 세계의 관계망을 드러내는 장이며, 이는 모네의 빛·인상의 흔적, 호크니의 정체성의 파장과 통한다.
이들에게 연못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물어보는 철학적 도구다. 모네는 시지프스(Sisyphus)처럼 계속해서 같은 연못을 바라보며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묻고, 호크니는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나는 누구인가?” 되묻는다. 그리고 세르는 이 둘을 관통하며 조용히 말한다: “연못에 찾아든 기식자는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세계를 이해하게 만든다.”
물은 형체가 없다. 그러나 그 연못의 표면은 시간을 반영한다. 파문은 과거를 흔들고, 고요함은 현재를 비춘다.
그들은 ‘연못’이라는 자연의 한 단면을 단지 풍경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시간·자아·감각·존재의 구조를 탐구한다. 프랑스 철학자 세르의 개념을 축으로 삼아, 모네의 인상주의적 시간성과 호크니의 자기 정체를 포섭한 공간성이 하나의 ‘연못’ 안에서 어떻게 조응하며 파문을 일으키는 것인가를 비교해 보는 것은 현재의 우리 또는 철학과 예술이 이 세계에 반영하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세르는 그의 에세이에서 ‘연못’과 ‘기식자(parasite)’의 비유를 통해 정적 속의 변화, 침묵 속의 파열을 이야기한다. 연못은 표면적으로는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진동, 보이지 않는 생명, 예측 불가능한 감각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닮았다. 모네의 연못은 빛과 시간의 미세한 변화에 대한 탐구였다면, 호크니의 수영장은 정체성과 욕망, 기억의 층위가 교차하는 감각적 구조다.
5월이 되면 연못에 볼거리와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시기이다. 모네가 즐겨 그렸던 수련이나 붓꽃 같은 것들 역시 가득 필 것이다. 버드나무 잎은 청초하게 늘어지고 맑은 날이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연못에 드리울 것이다. 바람이 일고 온갖 곤충과 새들이 연못에서 함께 고요함을 즐기거나 정적을 깨뜨리며 예의 어떤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연못을 통해 나는 위험천만한 탁류에 휘말린 현재의 세계, 전쟁과 폭압, 권력의 타락과 이성의 몰락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질문하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연못의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는가? 모네와 호크니 그리고 세르의 은유는 우리의 삶에 무엇을 반사하는가? 파문을 일으키는 기식자의 참여가 가져온 변화는 오직 정적의 파괴인가, 혹은 성찰의 기회인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회와 위기를 몰락으로 이끄는 사회, 그 어느 쪽도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 시대의 궤적이 그저 연못의 표면을, 삶의 표면을, 예술의 표면만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그 침묵과 파문 사이의 이성적 세계를 사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글·사진 이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