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기 이사장 [사진=더코리아저널]


[특별기고] 세종대왕의 정치 지도력(리더십)과 국가 경영 / 최용기(국어학자/문학박사)

세종대왕의 정치 지도력(리더십)과 국가 경영을 말하고 쓴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정치 지도력을 포함하여 통치 철학까지 언급해야 하는 일은 융합 학문의 최고 전문가가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군주, 해동의 요순, 또는 동방의 성주라고 불리기 때문에 더 그렇다. 따라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분석하고 재구성해서 언급할 수밖에 없다. 원래 세종실록의 명칭은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獻大王實錄)이고, 총 163권 154책으로 되어 있으며 제1~127권은 편년체로 된 본문 부분, 제128~163권은 오례 8권/악보 12권/지리지 8권/칠정산 8권으로 구성된 지(志, 부록)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의 맨 처음에 나오는 ‘총서’에 세종대왕의 휘는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라고 되어 있다. 태조 6년(1397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태종 8년(1408년) 무자 2월에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하였고, 우부대언(右副代言)인 심온(沈溫)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 후 4년 뒤에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한양의 ‘준수방’은 경복궁 서문 영추문(迎秋門) 근처임을 알 수 있고, 어려서 이름이 ‘원정’이며 12살에 ‘충녕군’으로 책봉되고 심온의 딸과 결혼하였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세종실록 중 세종대왕의 지도력과 국가 경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국가 경영을 ‘인재 중심’에 두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인재가 나라의 보배’임을 생각하고 양반과 서민, 문반과 무반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능력이 있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주요 인물이 황희, 맹사성, 허조, 변계량,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 성삼문, 윤희, 최윤덕, 이종무, 박연, 장영실, 이순지 등이며 이들과 함께 항상 국가 경영을 의논하였다.

둘째, 국가 경영을 ‘지식 중심’으로 하였다. 국가 조직을 정비하고 어전회의 방식을 전달식 방법에서 ‘토론식 방법’(긍정 화법)으로 바꾸었다. 학문의 중추 기관인 집현전을 만들어 젊은 학자들과 함께 국정 계획을 수립하고 토론하여 이를 실천하였다(37년간 100여 명 양성). 재위 기간 32년 동안에 1,898회의 경연을 시행하였다고 하니, 오늘날 주간 회의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국방과 외교 정책을 ‘사대교린’ 정책으로 추진하였다. 오늘날 우리 국경은 이 시기에 완성이 되었다. 명나라를 섬기되 당당한 외교 정책을 펼쳤고, 국경을 침략한 여진족과 왜구를 토벌하되, 우리 영토를 다시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15세기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 군사력은 강력하였는데, 최윤덕 장군에게 파저강(압록강 하류)을 토벌하여 4군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김종서 장군에게는 두만강 주변을 정벌하여 6진을 개척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종무 장군에게 대마도를 정벌하되 점령하지 않도록 하였고, 오히려 귀화자를 받도록 하였다.

넷째, 국가 경영을 ‘창조 중심’으로 하였다. 훈민정음을 만들어 백성이 서로 소통하도록 하였고, 정간보(악보)와 여민락을 만들어 백성이 즐거운 나라 만들고자 하였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말이 중국과 다르고(異乎中國, 이호중국), 백성이 문자를 몰라 가엾기(爲此憫然, 위차민연) 때문에 새롭게 만든 언문을 날마다 사용하여 편하게(便於日用, 편어일용) 사용하도록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특급 비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대부 반대도 심하였다. 또한, 악보를 이용하여 여민락(與民樂)과 향악(鄕樂)을 만들어 백성과 함께 즐기고자 하였고, 자격루와 앙부일귀, 천문대, 금속활자 등을 만들어 백성이 먼저인 위민 정치를 실천하였다.

다섯째, 국가 경영을 백성에게 ‘감동 정치’를 하였다. 대표적인 감동 경영 정책이 관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제도, 노인을 공경하는 경로잔치와 백성의 세금을 줄이려는 전 국민 여론 조사, 의녀(여의사)를 활용한 제생원 설치, 죄인을 배려하는 3심제도 등은 모두 백성을 위한 감동 정치이며,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생각하게 하는 정치들이다. 세종대왕은 스스로 백성이 없다면 군주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백성은 군주가 하늘이 아니고, 밥이 곧 하늘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와 ‘백성을 살리는 정치’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으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여섯째, 세종대왕의 국가 경영은 15세기에 ‘문예부흥’ 시기를 가져왔다. 이때의 국가 경영은 지금도 진행 중인데, 훈민정음해례본 56쪽에 나타난 ‘대동천고개몽룡’(大東千古開矇矓, 동방의 큰 나라 조선이 오랜 역사의 어둠을 깨고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인류 문명의 시작을 열어 간다)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자는 신의 솜씨를 빌려 만들었으니 인류 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 하였다. 또한 배우기 쉬운 문자이므로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문자는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는 물론이고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신숙주가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였다.

이에 세종대왕의 정치 지도력과 국가 경영을 중심으로, 정치 양극화 극복과 사회 통합의 정치를 펼치기 위한 우리의 자세와 우리가 배워야 일이 무엇인지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사회 통합의 정치를 배워야 한다. 통합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재 등용인데 당파를 떠나서 인재를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 세종대왕은 장인(심온)과 정적이던 박은과 훈민정음 창제의 반대자인 최만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노비 출신 장영실, 서얼 출신 황희, 천인의 집에서 자란 최윤덕 등도 등용하였다. 집현전 학자에게는 “국가의 인재가 모인 터전”이므로 다른 관청으로 옮기지 말고 종신토록 학술연구에 전업하라고 하였다. 또한, 사가독서(유능한 문신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도록 하며, 책을 읽도록 하였고 ‘인재가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지도자의 큰 수치라고 하였다.

둘째, 지도자는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무려 1,898회의 경연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보다 신하의 의견을 잘 경청하였다. 특히, 파저강 토벌 논쟁 시에는 최윤덕의 말을 듣고 그의 의견을 채택하였다. 또한, ‘간악한 소인’이라는 황희를 ‘청렴한 정승’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그의 허물을 극복하게 하여 진정한 ‘백성의 정치’를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임금이 어찌 양민과 천인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며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재논의하라고 하였다. 허조도 성상께서 내가 건의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정치는 백성의 눈높이에서 시작하고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종대왕의 화법은 ‘네 말이 옳다.’이거나 ‘그 뜻이 좋다.’라는 긍정 화법이었다.

셋째, 정치는 음악과도 같아서 ‘음악이란 하늘에서 생겨나서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므로, 음악을 들으면 그 나라 정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소리를 담은 조선 음악 정치를 꿈꾸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는 향악을 즐기고 죽어서는 아악을 들어서야 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조선의 황종음(黃鍾音)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정치는 여민락(與民樂)과 봉래의(鳳來儀)처럼 우리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편안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음악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조선 백성의 소리를 담은 당대 최고의 음악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국격(國格)과 자존심을 건 국가 간의 경쟁이었다. 이 황종음은 박연의 악률과 장영실의 기술이 결합해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넷째, 정치 양극화의 극복을 위해서는 감동의 정치를 해야 한다. 노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양로의 정치가 정착되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9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과 봉작을 제수하고 100세 이상의 경우에는 천인을 면해 주었다. 또한, 백성의 세금을 줄이려는 국민 여론 조사, 의녀(여의사)를 활용한 제생원 설치, 죄인을 배려하는 3심제도, 관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정책을 펼쳤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하였다. 임금은 백성이 없다면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백성은 군주가 하늘이 아니고 밥이 곧 하늘이라 하였다. 세종대왕의 정치는 종교도 초월하였는데 법가의 허조, 유가의 황희, 도가의 맹사성, 불가의 변계량도 함께하며, 좋은 감동의 정치를 실천하였다.

다섯째, 세종대왕 나신 곳을 빨리 복원해야 한다.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길거리에 표지석 하나만을 세워 놓고 정부나 서울시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곳에 세종대왕기념관을 세우고 세종대왕을 기리는 각종 사업을 펼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인물, ‘한국인의 큰 바위 얼굴’이라고 우리끼리 외치는 일은 ‘우물 안의 개구리’(井底之蛙)와 같다. 전 세계인에게 세종대왕의 업적을 알리고 세종대왕의 위업 선양 사업을 많이 발굴해야 한다. 이 일은 여당과 여당, 정부, 대통령실이 함께 힘을 모아 추진해야 한다.

여섯째,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집현전(集賢殿)을 복원하는 일도 우선 시급하다. 경복궁 안에 있는 수정전(修政殿)이 집현전 터전이다. 집현전은 세종 때 많은 도서를 비치하고 학자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국책 연구기관이다(1420). 그런데 세조 때에 예문관으로 바뀌었고(1456),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고종 때 중건(1867)되었으며 수정전이라는 명칭은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이며 도승지 조석원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집현전 당시로 복원하여 국내외 학자들이 모여 학술대회도 하고 토론의 명소로 바꾸어야 한다. 현재는 보물로 지정(제1760호)되어 개방도 하지 않고 있으며, 대여도 하지 않고 있다.

일곱째, 한글날 경축 기념식과 세종날(탄생일) 행사를 중앙 정부와 서울특별시가 함께 추진해야 한다. 한글날을 단순 공휴일과 기념일에서 벗어나 국경일에 맞게 ‘국민 잔치의 날’로 운영하고 기념식에 대통령이 나와서 경축사를 하고 일주일간 한글 주간으로 대통령령으로 선포해야 한다. 지난해 세종특별시가 추진했는데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고, 올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을 추진하였다. 또한, 세종날 행사는 국가유산청이 추진하였는데 숭모제전 행사만 하고 탄생일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므로, 서울시가 성격에 맞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다행히 올해에는 ‘세종날’(5월15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여덟째, 이주민에 대한 포용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세종실록을 보면 하루도 위기가 아닌 때가 없었고, 한 가지 일도 순탄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없었다.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야인(여진족)들은 “국경과 해안을 제멋대로 침략하여 마음대로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거듭되었고, 명나라 사신들의 끝없는 뇌물 요구와 파병 요청 등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홍수로 인해 흉작이 아닌 해가 없었으며, 창고가 거의 비어 백성을 구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세종대왕은 포용의 정치를 하면서 왜인과 여진족이 귀화하면 내국인과 같게 하고 관직에도 진출하게 하였다. 귀화자는 조선이 정말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왜인들은 집단으로 귀화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세종대왕의 어록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대들의 자질이 너무나 아름답다.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종실록 22, 7/21). 이것이 곧 요즘 젊은이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일은 꺾이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

***필자소개/ 최용기 이사장

문학박사, 국립국어원 국어진흥부장(고위공무원) 역임, 이중언어학회 부회장, 몽골민족대학교 부총장, 선문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코리안드림문학회 부회장, (사)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 이사장, (사)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공동대표, 짚신문학회 부회장. 세종대왕 생가 복원을 꿈꾸는 사람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