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영 문학박사, 중앙대예술대학원장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대영 감성일기] 내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예컨대 페벗이 내 포스팅에 댓글을 썼다면,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일일이 답글을 쓰는데, 그가 쓴 대사의 질량과 시간의 부피를 헤아려 그만큼의 정성으로 화답하는 버릇이 있다. "대사 보존의 법칙"과 "시간 등가성"의 원칙에 입각해서다.
심지어 날이 선 비판이나 공격에도 성의껏 대항하는 답글을 쓴다. 아이고 모지리 화상아, 멍청아, 찐따야, 그냥 확 지르고 차단해버려, 이렇게 늘 스스로를 꾸짖으면서도 알뜰하게 답글을 쓴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혹 낯선 사람의 댓글을 발견하면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 분 누구지? 하고 그의 타임라인으로 들어가서 어떤 사람인가 꼼꼼하게 살펴본 후에 적절한 호칭과 공감대를 찾아내 답글을 쓴다. 귀한 시간과 공을 들인 그의 댓글을 존중해서다.
직업에서 온 습관이다. 연극은 대개가 시간과 대사와 역할 관계와의 싸움이다. 이놈의 시간은 저축할 수도 대출할 수도 없고 멈춰 세울 수도 없다. 대사도 그렇다. 발화된 대사는 수거할 수가 없다. 관계는 갈등과 역학의 출발이자 종착점이다.
배우가 갑자기 대사를 건너 뛰면 상대 배우는 정말 돌아버린다. 뭐야 저늠 갑자가 왜 저래. 헤어진 연인이 3년만에 보러 온다더니 결국 객석의 연인과 눈이 마주쳤군, 가만, 이거 미치겠네, 하며 더듬더듬 상황에 맞는 대사를 찾아가는 그 1-2초의 순간이 연출과 배우에게는 한 시간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가끔씩은 조명을 기막히게 피해 다니며 대사를 읊조리는 배우도 있다. 올라가서 때려줄 수도 없고. 미친다.
어쨌든 같은 시공간에 배우와 관객이 마주하는 것. 관계를 쌓아가는 기쁨이다. 무대에 서서 객석을 보면 안다. 관객의 소중함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시간이 주는 황홀한 공포를. 대사와 침묵에 담긴 사랑과 증오와 죽음과 눈물의 가치를.
그리하여 대사 보존의 법칙과 시간 등가성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관객을 모시는 마음을 담아, 한 땀 한 땀 꾹꾹 눌러 답글을 쓰는 것이다.
때론 시처럼, 때론 그림처럼, 또 침묵처럼, 거울에 쓰듯. 투명한 하늘에 쓰듯. 내 얼굴에 쓰듯.
나이가 들자. 이상한 버릇이 하나 더 생겼다.
타인을 비판하는 일이 확 줄었다. 삶이 가져다 준 겸손의 숭고함을 느낀 것이다. 살아보니 그렇다. 안다고 해서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강호에는 천하의 고수가 많다. 따라서 남을 비판할 시간에 책 한 줄 더 읽거나 쪼그려뛰기 운동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가급적 긍정의 매혹에 취하려 한다
다만, 오래도록 불량한 허세와 궤사, 저만 옳다는 고집쟁이 헛똑똑이, 혹은 염치와 버르장머리가 없다거나, 거짓을 밥먹듯하는, 또한 편청생간하는 자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릴 때도 있으나, 요즘은 차라리 가급적 멀리하는 방법을 택한다. 화를 내는 것도 정신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적지 않다. 그대가 나와 거리감이 느껴진다면, 그리고 소식이 뜸해졌다면, 위 서너 가지 까닭에서다.
그대가 유성처럼 아스라히 멀어져가도 아직 페벗의 끈을 유지하려는 나의 노력은 우정의 세월에 담긴 추억과 사연의 두께 때문이다. 부디 인간 소실점이 되어 사라지지 말기를. 내 맘 속 아리아드네의 실이 무한대가 아니다. 아모르파티.
봄이다.
[사진=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