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올 춘분은 봄 같지 않다
1.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다면 계절마다 '아는 행복'을 다시 느끼는 거다. 봄에는 봄에 해야 좋은 일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이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다. 제철을 즐기는 거다. 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좋은 일들이 많다. 제철은 '알맞은 시절'이란 말이다. 장마가 지나면 수박은 싱거워진다. 때를 지나 너무 익은 과일은 무르기 시작한다.
다 제철이 있다.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이다. 비 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거다. 올해는 김신지 작가가 보여준 연례 행사를 따라가 볼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내년에는 나 만의 "제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면 나 만의 일상에 나만의 '기다려지는 일들'이 쌓일 것이다.
작가의 아이디어처럼, 나도 '제철'의 단위를 사계절이 아닌, 24 '절기(節氣)'로 여긴다. 한 달에 두 번씩 이다. '절기'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한 해를 24로 나눈, 계절의 표준이 되는 것', 더 나아가 '한 해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기에 좋은 시기나 '때'이다. 참고로, 24절기의 이름은 중국 주(周)나라 때 화북 지방의 기상 상태에 맞춰 붙인 이름이다.
그러므로 천문학적으로는 태양의 황경이 0°인 날을 춘분으로 하여 15° 이동했을 때를 청명 등으로 구분해 15° 간격으로 24절기를 나눈 것이다. 따라서 90°인 날이 하지, 180°인 날이 추분, 270°인 날이 동지이다. 그리고 입춘(立春)에서 곡우(穀雨) 사이를 봄, 입하(立夏)에서 대서(大暑) 사이를 여름, 입추(立秋)에서 상강(霜降) 사이를 가을, 입동(立冬)에서 대한(大寒) 사이를 겨울이라 하여 4계절의 기본으로 삼았다.
'춘분'과 '추분'은 1년중 두 번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며, '계절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춘분'이 지나면 낮의 길이가 밤을 넘어서며 봄이 짙어 지고, '추분'이 지나면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 지기에 가을이 깊어 간다. 여기에 낮이 가장 긴 '하지'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더해 4계절의 기초가 된다. '춘분-하지-추분-동지'는 태양의 운행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의 사계절'이고, 이로부터 한 달 반 뒤 해의 영향이 땅에 이르러 게절이 시작되는 '입춘-입하-입추-입동'은 '땅의 사계절'이다. 이름에 '춘하추동'이 들어 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절기이다. 이 8 절기 사이사이에 그 무렵의 기상 현상이나 자연 변화를 담은 이름의 절기가 두 개씩 더 들어가 24 절기를 이룬다.
2.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이다. 말 그대로 하면, '봄을 둘로 나눈 중심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춘분'은 '한봄', 봄의 한가운데란 뜻으로 읽히고, 영상과 영하로 나누어 기온이 더 이상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준이 되는 날로도 읽힌다. 물론 둘로 나눈(분) 듯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라는 뜻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제 '하지'까지 낮이 계속 길어지고, '추분'이 오기까지는 낮이 밤보다 조금이라도 더 긴 '빛의 계절'을 살게 된다.
'춘분'이 되면, '경칩'에 깨어나 기지개를 켠 자연의 모든 것들이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덤불 속에, 가지 끝에 숨겨둔 '봄의 쪽지'를 찾아 산책하는 계절이다. 원래 산책(散策)이란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니는 것'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산보(散步)'도 있다. '바람을 쐬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멀지 않은 곳을 이리저리 천천히 거니는 것으로 산책과 거의 같은 뜻이다. 둘 다 불필요한 것을 털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산책의 한자어인 '散策'은 '흩을 산'과 '꾀 책'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한가로이 걷는 것'과는 다르게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꾀 돌이 생각을 흩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책이란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롭게 거닐며 잔머리 굴릴 생각들을 날려버리는 행위'가 된다. 예를 들어 '인문 산책'이란 말에서 '산책'은 부담 없이 둘러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산책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깊이 사유해 볼 생각이다.
그러나 '춘분'에 하는 산책은 다르다. '봄 찾기', 아니 '봄의 신호', '봄의 쪽지'를 찾는 행위이다. 보려 하는 사람만이 보게 되는 자그마한 봄의 단서들, 겹겹이 오므린 꽃송이나 새싹은 실제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닮아 있어 더 반갑다. 어렸을 때 소풍을 가면 선생님들이 미리 바위틈이나 덤불 속에, 소나무 가지 위에 숨겨둔 쪽지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춘분 무렵은 연중 산책 생활이 가장 바빠지는 시기이다. 나뭇가지도, 덤불도, 땅 위의 새싹도, 꽃망울도 하루 지나면 하루 만큼씩 달라져 있어서 도무지 산책을 거를 수 없기 때문이다.
3.
3월 중순, '춘분' 무렵이면 익숙한 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지그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되니, 왔던 만큼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게 산책이란 걸 알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꽃이 피어날 조짐을 향해 까치발을 드느라, 푹신해서 땅 위로 솟아난 새싹을 쪼그리고 않아 보고, 사진을 찍느라, 윤기를 띠기 시작한 나뭇가지를 들여다보느라 봄의 산책은 자꾸만 느려진다. 매년 봄이 갑작스럽게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봄을 지켜보지 않아서 일지 모른다. 산책하는 사람은 어떤 봄도 갑자기 오지 않는다 걸 알게 된다.
아직은 꽃과 잎이 무성해지기 전, 느릿느릿 걸으며 눈 여겨 보아야 하는 이맘때의 산책은 또 나름 즐겁다. 자연의 작디작은 것들이 각각 써 내려가는 오늘 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무거운 흙들을 밀어 올리려 애쓰는 새싹과 찬바람에 파르르 떠는 산수유 노란 꽃, 물가에 시린 발을 담근 채 연두 빛 꽃을 띄우고 있는 버드나무, 그 사이에서 나도 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힘을 얻고 있다.
4.
그런데 올 춘분은 봄 같지 않다. 감정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나는 '감정적 혼수상태'이다. 그래도 어제 오후부터는 "스르륵, 봄"은 왔다. 이 번주부터는 주말 농장에 나갈 생각이다. 채소밭을 갖고 흙을 가까이 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가꾼다는 것은 좋은 삶의 경험이다. 자기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고, 떡잎이 나와 펼쳐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 진다.
그리고 낡고 닳아가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말에 나가 흙을 만나는 것은 잃어버린 신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 싶은 것이다. "현대적 가난"(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한계점을 지니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주말농장 일을 배우면서 소비를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그리고 신체성을 회복해 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다리의 힘을 기르고, '위험에 스스로 대처하는 능력'을 키운다.
<여우숲 생명학교> 김용규 교장은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더 나아가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능력만 갖추면 족하다고 했다. 나도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 생존 능력
▪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 갈 힘" → 사랑 능력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란 '생존 능력'이다. 혼자 스스로 감당하는 거다. 남의 도움을 최소화 하는 일이 그 힘에서 나온다. 거기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 시키는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인간은 무엇인 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욕망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 시킬 수 없다.
이를 위해, 소유를 최소화 하고, 자신을 자발적 가난 상태에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간절해야 우리는 마음을 먹고, 그 마음에서 욕망과 생각이 나온다. 욕망과 생각은 같이 가야 한다. 생각을 통해 나의 욕망을 의미가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쓸모 없음 마저도 쓸모가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를 우리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 한다. 생각이 중요하다. 생각이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힘이기 때문이다. 끊어야 할 것은 생각이 아니라,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의 습관이다. 이 멋대로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과 방향에 맞춰 질서 잇게 통제할 수 있으면, 인간은 비로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하는 거 쉽지 않다. 우리는 습관에 지배 받기 때문이다.
5.
'춘분',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 샛길로 나갔다. 한 해를 잘 보낸다는 것은 계절을 더 잘게 나누어 둔 절기가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네 번이 아니라 스물 네 번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는 일이다. "이래서 지금이 좋아", 할 때의 지금이 계속 갱신되는 일, 제철 풍경을 누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고 틈틈이 행복해지는 일을 할 생각이다. 나는 이 봄을 좋아한다. 그 봄의 풍경과 꽃 이야기를 <인문 일지>에서 계속 공유할 생각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이문재 시인의 <봄>이다.
봄날/이문재
봄이
새끼발가락 근처까지 왔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어린 날이
가만히 고개를 내민다
까치발을 하고 멀리 내다본다
봄날이 환하다
내 안에 들어 있던
오랜 죽음도 기지개를 켠다
내 안팎이
나의 태어남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 낯설지 않다
봄날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흙냄새가 바람에
바람이 흙냄새에 얹혀진다
햇살이 봄날의 모든 곳으로
난반사한다 봄날의 모든 것이
햇볕을 반가워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우리 우리들이다
새끼발가락이 간지러운 이른 봄날
나는 이렇게 우리다
우리들이 이렇게 커질 때가 있다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