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영 시인,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문혜영 기억수첩] 시골살이

동부이촌동을 시작으로 반포, 잠실, 봉천동, 서울살이만 사십 년이다. 그것도 벌집 같은 아파트 공간에서만 탈서울은 삶 자체를 동작 그만! 시킬 것 같아 꿈조차 꾸지 않았던 일이다. 그동안 난부지런히 벌집을 드나드는 일벌이었다. 벌은 꿀을 모으러 밖으로 드나들지만, 나에게 꿀은 사람 사이의 정情이다. 모든 관계망에서 정이 쌓여갔다. 켜켜이 애착의 방도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벌집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하여 이대로 간다면 허공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이제라도 벗어나야 함을 본능처럼 알아챘다. 영역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생명 유지를 위해선 연습이라도 해야 했다. 귓등으로만 흘렸었는데, 오래전부터 시골살이를 노래 부르던 남편의 말을 진지하게 검토해보기로 했다.

탈서울이 가져올 아쉬움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강의를 놓아야 하고, 모임도 만남도 다 여의치 않아지리라. 또 안데스 인디언들의 라이브 공연도 포기해야 한다. 안데스 골짜기의 바람을 닮은 악기, 삼포냐와 케나의 울림을 좋아한다. 솔직히 그들이 읊조리는 케추아 노랫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 특유의 한 서린 음색은 묘하게도 내 우울감과 통증을 달래주었다. 안데스 폴 크롤레를 내 벌집에서 온종일 틀어놓고 들었다.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고 기분이 밝아지곤 했으니까.

땅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골살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나서곤 했다. 처음엔 지인이 사는 청평 수목원, 양평 전원주택단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 예산에 맞는 땅을 찾아 경기도권과 충청도권을 두루 다녀보았다. 그렇게 나들이한날은 시골살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감이 뚝 떨어져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도시와 다르게 시골은 해가 지면 어둠의 속도가 무섭도록 빨라 금세 칠흑의 장막을 드리운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였겠지만 부동산에선 외진 땅이나 집을 주로 보여줬다. 적막한 저수지를 끼고 산길로 한참 가야 나타나는 터, 드문드문 무덤이 보였다. 거기 사는 망자도 심심했을 외진 산속. 모처럼 지나는 객이 반가워 대낮이지만 혼령이 따라올 것 같아 자꾸 앞뒤를 두리번거리게 되는 그런 산길 속으로 안내했다.

풍치 좋고 집도 근사하지만 조금만 살피면 어디가 왜 불편한지 한눈에 보이는 산 중턱 외딴집도 여러 채 소개받았다. 십중팔구 남자 홀로 버티다가 다시 내놓은 물건이었다. 자연 바라기 남자들이 은퇴 후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마련한 터, 그러나 해만 지면 마당에도 내려설 수 없을 만큼 캄캄절벽이 되니 도시 불빛을 먹고 산 그 아내들이 마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 늙어 적막강산에서 새삼스레 할 놀이가 뭐 있다고. 그 심중을 모르지는 않는다. 나도 그러하니까.

그렇게 반년 가까이 헛걸음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아직 자연보다 사람들 곁을 더 좋아하고 있음이다. 때론 부담스럽고 번다한 애증을 낳아도 아직 사람과의 관계망 속에 있고 싶은 거였다. 다 벗어남이 아니라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빛바라기였다. 암 투병하면서 암흑에 대한 두려움이 깊숙이 각인되어 불면증이 심했다. 나의 뇌는 어둠과 죽음을 같은 코드로 인식하여 어떤 경우든 불빛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잠드는 일은 매번 어둠과 겨루기였다. 전등 하나는 켜 놓아야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언젠가는 맞닥뜨리겠지만, 아직 어둠의 공부가 되어있지 않으니 너무 캄캄한 시골은 아니어야 했다.

강원도 원주로 첫나들이 했을 때도 부동산에선 역시 외진 땅을 소개했다. 몇 군데 더 그런 곳만 보여주려기에, “제가 기운에 밀리는 산신령 땅 말고요, 차라리 폐교가 있는, 사람의 발길로 오래다져진 마을이 좋겠어요.” 그렇게 주문하여 소개받은 곳이, 지금 내가 사는 집이다.

2010년 가을, 이 집을 운명처럼 만났다. 내 주문대로 마을 초입에 폐교가 있는 이름마저도 편안한 동네 대안리大里. 첫 느낌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삼백여 평의 반듯한 대지에 붉은 벽돌 단층집과 텃밭, 황토방, 창고를 갖춘 아담한 집이었다. 현관 초입 화단에서 한련화가 반겨 고향 집에라도 온 듯했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커피를 대접하는 주인 내외의 인상이 좋아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결정했다. 왠지 모르지만, 여기서라면 한밤중이 되어도 마당에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웃집들과도 그 앉음새가 서로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도록 지어져 있었다. 일부러 차 한 잔 나누자고 청하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이건 얼굴 마주칠 일도 드물 것 같으니, 이웃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가 되어있는 집.구매는 단숨에 이뤄졌다.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게 아니었다. 회의장으로 써도 될 만큼 너른 거실은 퍽 마음에 들지만, 방이 두 개밖에 없었다. 햇살 잘 드는 방은 시어머니 거처, 남은 방은 침실, 서재는 2층을 올려 쓸 예정이었다. 구매 때부터 증축을 염두에 두었으나 건축 전문가를 부르니 경사 슬라브로 지어진 집이라서 2층 증축은 불가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마당 안쪽 텃밭 자리에 별채를 지었다.

나 혼자 쓰기에 넘치도록 큰 서재가 마련되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애착을 떼어내듯 책을 추려냈건만 지금도 서재 두 개의 벽면이 다 책장이다. 생전에 저 활자들을 과연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이 공간의 주인인 양 나를 압도하는 저 책들은 마치 시나브로 쌓이는 애착과 굴레의 또 다른 모습 같기도 하다. 사는 동안은 완벽한 벗어남이란 없다. 얼마만큼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서울에서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고 평화로워졌다.

온종일 틀어놓고 듣던 안데스 폴크롤레 대신 여기선 다른 음악을 듣는다. 봄밤엔 무논에서 밤새 개구리 합창이 들려왔는데, 5,6월은 내내 뻐꾸기 노래를 듣고 있다. 뻐꾹, 뻐꾹, 사방이 그들 놀이터다. 앞산에서 부르면 뒷산에서 응답하는 그들의 두 음절 노래 사이사이로 검은등뻐꾸기가 네 음절로 화음을 보태며 끼어든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러면 나도 네 음절로 '어쩌라고~ 응답하며 실소한다. 이제 저들의 짝짓기가 끝나고 나면 마당 벚나무 보리수나무에서 매미가 목청 높여 여름을 달굴 것이다.

따로 청하지 않아도 내 뜨락은 4계절, 생명의 소리로 이어진다. 덕분에 안데스 바람 소리를 따로 불러오지 않아도 된다. 짙게 드리웠던 가슴의 먹구름이 많이 걷히었다. 그토록 밀어내던 어둠에도 아늑함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요즈음이다. 시골살이 십 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