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긍휼은 인성이다.

1.

'벌써'로 시작한 2월이 '벌써" 떠나간다. 오늘이 2월의 마지막이고, 내일부터 3월이다. 나는 매년 2월 말 이면, 오늘 공유하는 시를 불러낸다. 그냥 2월에게 편지 한 통 보내고, 우린 3월을 봄과 함께 '힘차게' 마중 가야 한다.

오랜만에 정철의 <사람사전>을 펼쳤다. 봄을 다음과 정의한다. "겨울이 갔다는 신호, 여름이 온다는 신호. 추위가 더위로 바뀐다는 신호,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빨간 불로 바뀔 때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노란 불 같은 것. 봄날은 짧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짧다. 2월이 그렇게 간 것처럼. 빨리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2월 편지/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2.

어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6 가지의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좋은 기회이고, 하나의 거울이다. 어제 1)를 이야기했고, 오늘은 2), 3) 그리고 4)에 대해 사유를 해본다.

1) 분노 조절을 못해 툭하면 화를 내고,

2) 공감 능력이 없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3) 자기중심적이라 공사 구별을 못하고,

4) 이기적이라 자화자찬 하는 일이 버릇이고,

5) 책임은 남에게 미루고,

6) 도덕 의식이 희박하여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3.

공감은 상대가 가진 아픔이나 기쁨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상대의 고통을 인지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지적을 들어왔다. 설사 공감이 행동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공감이 이끄는 행동은 아픈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위로(sympathy) 정도이다. 그러니까 공감이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해석이 동반되는 과정이다.

전자를 '정서적 공감능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지적 공감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있다고 해서 위로를 넘어 고통의 문제를 원인의 수준에서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혁신적인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감은 이기적이거나 상업적 목적으로 쉽게 전용된다. 물론 상대방의 정서적 상태를 이해하는 공감이 원활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기본이다.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개진 시켜서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리더들도 과거에는 그냥 직책으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그런 리더십을 행사한다면 갑질이 된다.

따라서 최소한 공감을 통해 정서적 상태를 파악한 후 상대의 정서에 맞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아랫사람이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광고 회사가 이용하는 것도 고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공감이라는 "설탕 코팅"(윤정구)을 통해서이다.

고객이 광고회사의 스토리로 설탕 코팅된 제품을 샀다고 해서 이 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에 지불된 과대 광고비용은 가격을 낮추거나 품질을 개선하는데 들어 갔어야 할 비용이다. 고객은 설탕 코팅된 제품을 비싸게 사는 꼴이 된다.

4.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점을 윤정구 교수는 잘 설명하고 있다. "경기가 좋을 때는 공감능력만 있어도 최소한 소통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설정한 목표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가 꺾이고 여기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쌓여 구더기가 생겼고 이 구더기가 무서워 누군가가 거적을 덮어논 상태다.

고통의 상처에 구더기가 파고들기 시작해서 고통의 문제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고통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원인의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공감을 대신하는 개념인 환대(hospitality)가 절실하다. 그 환대가 아기 주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메시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공감을 넘어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여, 긍휼(compassion)로 치유에 나서는 행동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당시 절대왕권이 있던 세상에서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시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부활했다.

이는 예수의 몸의 부활보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던 예수의 정신이 부활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에게 기꺼이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5.

긍휼이란 단어를 나의 앱 <모든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간단한 단어가 아니었다.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돕는 것'이다. 나는 방점을 '돕는 것'에 찍고, 나의 '긍휼 정신'을 반성해 보았다. 불쌍히만 여기고, 돕기를 하지 않은 마음이 찬바람처럼 불어왔다. 긍휼을 한문으로 써보아도, 언뜻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긍휼의 영어 표현이 compassion, mercy였다. Compassion을 우리는 '연민'이라 하고, mercy는 '자비'라 한다. 이 mercy의 동의어가 humanity(인간성, 인성)이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성이다.

인성을 키우려면 긍휼하는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 mercy이다. 여기서 나오는 인(仁), 어진 마음이다.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고, 철학에서는 에로스라 한다. 나는 이 에로스를 '생명력'으로 풀이한다. 공감과 달리 상처와 고통에 대한 근원적 치유 행동이 전제되지 못하면 긍휼은 아니다.

공감이 단순히 의사 소통을 증진시키는 데는 도움을 주고, 상대의 아픔에 반창고를 붙여주거나 진통제를 처방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지 모르나 상대방을 주인으로 온전하게 세움을 위한 치유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자신의 아픔을 긍휼로 환대해가며 치유해 궁극적으로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정신이다.

6.

기원후 2세기 벤조마는 <<탈무드>>를 해석한 <선조들의 어록> 4.1에서 우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원칙 때문에 유지된다고 했다.

▪ 토라(torah): '율법 경전'이면서 '길'이란 의미이다. '경전'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경전'을 읽어야 한다. 여기서 '길'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도(道)'와 같은 것 같다. 배철현 교수는 '길'에 대해 두가지를 덛붙인다.

(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기에게 유일하고, 자신만의, 즉 자기 삶을 자신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매 순간 발걸음이 닿는 길이 바로 자신의 '목적지'라고 인식하며,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2) 종교적인 '죄'는 자신이 가야할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안다 할지라도 그 길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라고 한다.

▪ 아보다(avodah): '노동'이면서 '예배'란 의미이다. 이 단어도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노동', 아니 자신이 하는 일이 신에 대한 경배로써 '예배'란다. 그래서 히브리어 '아보다'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서비스(service)란다. '아보다'는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이웃이나 낯선 자를 위해 하는 일이나 노동(서비스)은 바로 신에게 하는 것과 같다. (2) 자신이 하는 일을 신을 위해 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삶의 원칙이 되기도 한다. (3) 서비스라는 말은 낯선 자를 신처럼 섬기라는 윤리적 명령이기도 하다. 일이 신에게 드리는 예배일 수 있으며, 이웃에게 봉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 헤세드(chesed): '변하지 않는 어머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의미이다. 어머니처럼,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의 둘레를 확장하여 타인을 자신처럼 아끼는 마음을 지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비슷한 말 같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