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웃는 표정을 만나면 즐겁다.

1.

오늘 아침은 "실로 면목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화두이다. 여기서 "면목(面目)"은 얼굴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가끔 ‘면목 없다.’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면(面)’은 얼굴이고, ‘목(目)’은 눈이라는 뜻이다. ‘얼굴’과 ‘눈’이라는 글자가 만나 “얼굴의 생김새”, “남을 대할 만한 체면”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을 쳐다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마음속 생각이 그 사람의 눈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굴’은 그 사람 전체를 대표하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준다.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정면으로 얼굴을 찍은 증명사진은 우리의 전체 모습을 대표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알리려고 노력한다. ‘얼굴 도장을 찍는다’는 말 처럼, 직접 대면(對面)해서 얼굴을 마주 봐야만 할 때가 많다. 이렇듯 얼굴은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낸다.

반면에 사람은 부끄러운 행동을 하거나 죄를 지으면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인다. ‘얼굴에 먹칠을 했다’, ‘얼굴을 들 수가 없다’라며 얼굴을 가린다. '체면(體面)'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텔레비전 뉴스에 비칠 때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한다. 부끄러워 자기 얼굴을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목이 서지 않는' 짓을 하고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최근에 언론에 너무 많이 등장한다. 이런 사람을 일러 ‘후안무치(厚顔無恥)’라 하고 ‘철면피(鐵面皮)’라며 흉을 본다. ‘후안무치’는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고, ‘철면피’는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후안무치'에서 '후'를 두터울 '후(厚)'로 보지 않고, 뒤 '후(後)'로 쓰고, '얼굴이 뒤에 있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로 읽는 이도 있다. 이렇게 ‘얼굴’과 ‘눈’, 둘을 합친 글자 ‘면목(面目)’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뜻한다. 잘못을 했거나 다른 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면목 없습니다’ 라며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춘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을 때 얼굴을 들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으며,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신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창세 4,7),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 3,6),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시편 51,11)

1.

지금 우리 사회는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후안무치한 뻔뻔함으로 억지와 궤변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언론에 너무 많이 등장한다. 억지는 무식하게 '똥 고집'을 부리는 것이고, 궤변은 제법 유식하게 말의 뜻을 바꾸거나, 사실의 의미를 바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며, 진실을 오도하거나 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속이 뻔히 다 보이는데도 거짓말을 하며, 잡아떼는 뻔뻔함으로 억지와 궤변을 늘어 놓는다. 그리고 뻔뻔한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고 그래서 늘 당당한 척 한다. 창피함을 모른다. 이것도 뻔뻔함의 또 다른 특징이다.

우리는 누가 그런지 다 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로 작정 한 사람들이다. 이건 수치심, 아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뻔뻔함이다. 거짓의 탈을 쓴 후안무치들이 판을 친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듯'한 '기레기'들의 거짓 뉴스가, 그리고 자극적인 뉴스로 장사치처럼 자신의 기사를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거지 같은 기사와 한 자리 혹시 얻을까 흑심을 품은 일부 어용 지식인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칼럼 등 역겹다.

그냥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는 "극즉반(極即反)"만 믿는다. 정점에 도달하면 내려올 일 밖에 남지 않고, 반대로 최저점으로 추락하면 올라갈 일만 남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도 있다.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차이로, 다름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차이로 보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지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나는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한다고 믿고 기다릴 뿐이다.

3.

인간(人間)은 '사이'의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지(天地),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사건들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앞발이 손으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땅에서 벗어난 손은 뭔가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손은 뇌로 연결된다. 손이 하는 모든 행동과 창조는 뇌신경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얼굴'이 탄생한다. 동물은 얼굴이 없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다. 미안하지만, 그냥 우리는 '대가리'라고도 한다. 머리와 얼굴이 구분되는 건 인간 뿐이다. 이게 호모 사피엔스이다.

4.

"타자 윤리학"을 말하는 레비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타자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얼굴로 나타내는 현현(epiphany)에 의해 나에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의무에 따라 타자로 향한 정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 간의 유대와 연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정의는 타자로부터 시작 된다"고 말했다. 오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후안무치로 "얼굴로 나타나는 현현"을 느끼지 못해 그런지 점점 더 세상이 삭막하다. 문제는 허영(虛榮)이다. 일반적으로 허영은 자신의 삶을 긍정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과 지위, 돈 그리고 학위 따위에 목을 맨다.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깨달음을 수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허영을 버리는 ‘마음 근육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은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 얼굴'을 찾는 거다. 그러니까 페르소나(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사용하던 가면)를 벗고 '맨 얼굴'을 직시하는 것이다.

5.

불교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며,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佛性)’이란 어떤 페르소나(가면)도 착용하지 않은 마음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본래 면목(맨 얼굴)이란 자신의 불성, 아니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중요한 것이 위의 가르침에서 직지(直指)나 견(見)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나 자신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 맨 얼굴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그 역할을 바꾸는 법은 알면서도 그것을 되돌아볼 줄 모른다. 가면을 쓰지 않고 맨얼굴로 살겠다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려는 필요조건이다. 가면을 쓰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맨얼굴을 가진 사람은 어떤 자리도 없는 참다운 사람(무위진인, 無位眞人)이다. 나는 나다. 일체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진짜’다운 사람이다. 나는 '무위진인'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그 반대가 아마 미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어에 'Non-lieu(농-리외)'라는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자리 없는 자리'라는 개념이다. 그 반대말이 우리가 흔히 쓰는 '미친 존재'이다. 그러니까 '농-리외'는 '무위진인', 즉 없는 듯 자리하고 있는 '진짜 나'이다.

6.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모두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건강하고, 완전하며, 가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란 무엇을 하는 가가 아닌,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아무도 내가 겪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가 겪은 특별한 역사와 사건들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진정한 나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이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진실해 지려면, 또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면 일상적인 일에서 그것을 경험해야만 한다. 즉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야 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사적(私的)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정성스럽게 하고 싶어서 무슨 일을 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고 싶은 자신을 만들 때, 그런 헌신은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간결하다.

7.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커왔다. 부모와 학교로부터 '해야 하는 재미가 없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신나는 일'을 교육을 통해 세뇌를 받으며 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완수해야 할 한 가지 고유한 임무가 있다.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는 고독을 통해, 그 임무를 터득하고, 아니면 스승을 통해 지도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동료 들과의 경쟁 속에서, 자발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일보다는, 부모와 친구들이 좋아하고, 대중이 흠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직업을 선택하여 인생을 보낸다.

만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의도적인 일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신명(神命)도 창의성도 없다. 신명을 깊은 몰입을 통해 들리는 신의 목소리이고, 창의성은 온전한 집중을 통해 등장하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것만이 내 관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씩은 억누르고 있던 충동에 몸을 맡기고, 이상하거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는 거다.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 지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누구인지, 또는 적어도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8.

아름다운 얼굴은 웃는 표정이다. 웃는 얼굴을 결정하는 포인트가 입매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진 찍을 때 ‘치즈’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다. 즉, ‘치’할 때 입모습이 웃는 얼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할 때 사진기가 ‘찰칵’하면 좋지만 간혹 ‘즈’할 때 사진이 찍히면 입술이 쑥 나와 버려 실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의 입매를 갖기 위해서는 ‘위스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 그 이유는 ‘위’ 할 때 뺨의 근육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근사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위’라고 발음하고 그 상태에서 ‘스’라고 발음하면 입이 크게 벌어진다. 다시 그 상태에서 ‘키’하면 크게 웃는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스마일 마크를 그려보면 잘 알 수 있다. 입 꼬리 모양이 인상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위] 입을 가운데로,

​▪ [스] 입을 옆으로 당긴다.

​▪ [키] 입의 근육의 반동을 이용하여 입 꼬리를 위로 치켜 올린다.

웃는 얼굴에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눈동자이다. 눈동자와 관심 사이에는 관련이 있다. 관심이 커질수록 눈동자가 커진다. 그렇지만 크게 뜬 눈동자에 또한 미소를 머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밝게 웃고 있는 ‘위스키’의 입 모양과 함께 눈동자에 미소가 없으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인 미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입과 눈이 함께 웃을 때 비로소 멋진 표정이 완성된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며 진실의 창이다. 눈동자에 미소를 띠우면 상대방은 호감으로 보답한다.

그리고 웃는 얼굴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만일 찾아 온 손님을 보고 ‘아 인상이 험악하군!’ 또는 ‘성가신 할머니’, ‘매너 없는 아줌마’같은 마이너스 이미지를 갖는다면 친절하게 서비스할 마음이 사라진다. 즉 웃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상대에게서 매력 포인트를 찾아내려고 노력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근사한 안경, 멋진 수염, 다정한 잉꼬부부’ 같은 식으로 손님의 매력을 찾아내 플러스 이미지를 갖게 되면 보다 더 양질의 친절한 서비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중국 속담에 “웃는 얼굴이 아니면 가게 문을 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먼저 웃으면 웃음은 상대방에게 전이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상대도 바로 쉽게 웃게 된다. 웃음은 호수 가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이 만들어 낸 물결처럼 아주 멀리 퍼져 나가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간다. 주변에 곱게 나이가 드신 분들을 보고 부러워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공통적으로 밝은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9.

웃는 표정을 만나면 즐겁다. 지속적인 얼굴근육 에어로빅을 통한 얼굴표정 훈련에다가 밝고 좋은 생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웃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좋은 얼굴표정을 더 잘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좋은 표정을 갖기 위해서는 웃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 표정 중에서 웃는 모습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퍼지는 것이고,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즐거워진다고 웃음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웃음은 좋은 매너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주변에 곱게 나이가 드신 분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밝은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늘 웃으며 얼굴에 미소를 담고 살면 얼굴이 바뀐다. 젊었을 때 얼굴 표정은 선천적인 것이라면, 40대 이후의 얼굴 표정은 후천적인 것으로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건 "아름답게 사는 일"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구절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얼굴/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