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호 사잔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조문호 렌즈세상] 또 다시 신명난 한 해를 만들어보자.

세상은 시끄러워도 설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성묘객 많은 설날을 피해 용인 공원 묘지에 찾아가서 정영신, 정주영 자매와 모친께 신세타령 좀 했다. 정동지는 준비하는 전라남도 장터 책이 잘 팔리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산 자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죽은 자가 어찌 할 수 있겠냐?며 중얼거렸다. 그런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다행스러운데, 귀신을 위한 음식도 결국 우리가 먹지 않는가.

설 날 연휴 동안 정동지 사는 녹번동에서 딩굴기로 작정했는데, 마침 도와 줄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준비한 전라남도 장터 사진과 글을 정리해 빨리 전라남도에 보내야 한다는 금보성씨 연락에 혼자 바쁜 걸음 치고 있었다. 장터에 관한 글을 마무리할 동안 나더러 사진을 골라 달라는데, 자신이 찍은 사진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사진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처럼, 어느 면이던 좋아서 남겨 둔 사진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찍어 둔 사진을 살펴보니 분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 장터에 고작 열 장 이내로 사용할 텐데, 엄청 많이 추려내야 할 것 같았다. 주관적인 사진보다 객관적인 편집자 입장에서 골라봤다.

그런데 컴퓨터 있는 방은 난방도 안 되는 냉골이라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몇 장터 찾아보다 말고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몸 녹여 일해야 하지만, 일거리만 생기면 힘이 생긴다. 허구한 날 쪽방에 누워 골골거리지만 광장만 나가면 힘이 나듯이, 좋아서 몰두할 수 있는 일이란 아픈 것도 잊게 하는 묘약이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섣달 그믐 날은 전활철씨는 영천시장에서 홍어를 비롯한 장을 봐 왔고, 김상현씨는 아내가 직접 만든 식혜를 가져왔다. 집이 비좁아 손님까지 냉골에 모실 수밖에 없었는데, 썰렁한 방이지만, 네 사람이 부대끼니 춥지는 않았다.

정동지가 홍어전을 부쳐 대마불사주로 술상을 차렸는데, 술상에 놓인 모니터도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유튜브에 검색하여 듣고 싶은 음악을 골고루 찾아 봤는데, 결정적인 것은 김상현씨가 최근에 불렀다는 ‘하얀 목련’이었다.“아픈 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는 대목에서는 노래가 아니라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아픈 마음이 고스란히 노래에 전이된 것이다.

다들 좋아하는 술을 두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전활철씨는 당뇨가 심해 죽을 지경이고, 김상현씨는 무서운 병마와 싸우는 중이다. 가수가 목에 칼을 대는 큰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지만, 그는 오뚜기 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동안 목소리를 살려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노래를 들어보니 득음에 가까웠다. 수술하기 이전 음색보다 훨씬 호소력도 강하고 개성적이었다. 노래의 기교가 어찌 진정성 있는 호소력를 당할 수 있겠나? 역시 노병은 죽지 않았다. 다들 힘내어 또 다시 신명난 한 해를 만들어보자.

[사진=조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