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역사학자, 탐험가 [사진=더코리아저널]


[기고 윤명철] 아. 고구려미. 너는 무엇이며, 지금 어데 있는가?

안녕하십니까?

한 주일 동안 편안하게 지내셨는지요? 감기와 독감이 아주 심하다고 합니다.

눈이 펑펑 내릴 듯 하더니 그렇게 많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차가운 날씨가 찬 바람과 하께 한 주일을 채운 듯 합니자. 쨍째 차가움은 정신을 차리게 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여미게하는 효험도 있지만, 마음을 더 얇게 만들고, 그나마 남아있는 푸근함을 덜어내기도 합니다. 최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눈이라도 펑펑 내려 모두를 하얗게 만들기도 하고, 푸근한 마음을 갖게도 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펑 펑 내리는 하양눈 속에서 다 함께 똑같은 아름다움(美)을 느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집니다.

저는 방금 전에도 한밤이지만 임진강 가에 갔습니다. 강물들이 꽁꽁 얼었지만, 그래도 한 귀텡이는 녹아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 병사들이 마주 바라보고, 훗날에는 고구려 유민들과 신라 병사들이 당나라 병사들과 목숨을 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벌어지던 곳이었습니다. 아시지요? 임진강과 한탄강에는 고구려인들이 쌓아놓은 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어디서나, 어떤 것이거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를 느끼는 저이지만, 그래도 고구려 미는 특별하고, 그 미는 임진강가의 독특한 구조와 둘레의 경치에서도 느낍니다.

임진강 파주 적성의 건너편인 연천 쪽에는 호로고루성이 있습니다. 민통선 구역과 맞붙어서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기도 했지만, 접근할 수 없는 유적이었습니다. 저는 30년 전부터 수시로 다녔으니 얼마나 옛 모습을 잘 기억하겠습니까? 그 위치와 형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도록 아름답지요. 몇 해 전부터 본격적인 역사 관광지로 변경돼서 예뻐지긴 했지만, 제가 아는 고구려미학은 많이 훼손된 상태이지요.

저는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지를 진짜로 많이 다녔답니다. 만주만 하더라도 거의 50여 번 방문하면서 전 지역을 조사했습니다. 남한의 곳 곳에 있는 유적들도, 주로 산성들이지만 발품을 팔아가면서 많이 조사했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고대사 전공자들도 고구려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고구려 유적이라고 주장했었고, 많은 학자들은 아니라고 했었지요. 그 후에 고구려 유적이라고 밝혀진 것들도 있습니다. 또 일본열도에도 나라의 법륭사와 금당벽화, 아스까의 고송총과 키토라 고분의 벽화 등 고구려미가 반영된 예술품들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사는 사마르칸드시에도 있는 걸요. 아프로시압 궁전의 벽화는 7세기 또는 8세기에 활동했던 화가의 작품이지만, 벽화 속의 고구려인들의 옷이나 모자, 칼, 얼굴은 고구려미의 반영물인 것이 분명하니까요? 참 다양한 종류의 현장에서 다양한 체험들을 하면서 고구려미를 느껴왔습니다. 이런 조사들을 당연히 논문이나 몇권의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역사학계나 지식인들에 대해 서운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까봐 그치렵니다.

‘관찰자(Observer)’나 ‘국외자(Outsider)’ 또는 ‘타자(the Other)’로서 느끼는 미의식과 ‘창작자(Creater)’처럼 직접은 아니더라도 인연을 맺었다는 ‘참여자(Participant, 평가자’의 인식을 갖고 느끼는 미의식은 다릅니다. 심지어는 동일한 평가자(Evaluater)라해도 미의 현장에서 맺어지는 상황의 종류에 따라서도 농(濃)과 담(淡)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미가 아닌 적어도 미의식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따라서 문학에서만 ‘실존’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고구려 미의 실존성을 느꼈을 때 저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것도 고구려인들이 그들의 생존과 존재가치, 자유의지(free will)를 지켰던 실존의 현장에서, 그것도 다수 군중이나 관객 중의 하나가 아니라 홀로 온몸으로 마주하면서 말이지요. 그 상황들을 떠올리면 이 순간에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아, 가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아, 느끼고 싶다.’

‘아, 고구려인이 되고 싶다.’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구려미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물론 공감대도 충분하게 생성된 것은 아니고, 저의, 저만의 미의식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제가 말하는 ‘고구려미’를 몇 가지 단어로 간단하게 정의하고 논의하려 합니다. ‘자의식과 자유의지‘ ’다양성과 고유성‘ ’動中靜(mo-stability)‘ ’至美와 소박’ ‘상생과 조화’ ‘합리와 서정’ 등입니다.

‘고구려 미’가 생성된 배경과 성격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번에 말씀드렸지만 당연히 ‘터(field)’에 해당하는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환경을 살펴봐야지요. 자연환경은, 저는 ‘생태환경’이라고 말합니다만, 모든 존재의 근간이 되는 정체성을 규명하고, 발전 방향, 세계관 등을 확립하는데 기본되는 것입니다. 특히 역사를 통해서 문화·예술과 미를 이해할 때는 창작되고 생성된 자연환경이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자연은 인간과 집단이 세계와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즉 가치관 등이 생성되는 터 즉 공간이므로 신앙과 예술의 성격과 형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때문에 이 것의 성격을 왜곡시키면 문화의 성격과 형태는 물론이고 예술의 본질과 미의식까지도 왜곡시킵니다.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오히려 악용한 것이 근대화 과정에 우리에게 적용된 ‘풍토론’입니다. 소위 ‘조선 미학’이 정립되는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세끼노 타다시(闗野貞)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주도한 이론이지요. ‘미’는 느낌과 평가의 문제이므로 주관적인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다른 것( 인간 포함)과의 관계 도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요소들의 비율이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미학의 단계로 변하면 논리의 정립과 해석에 근거가 되는 사실은 가능한한 정확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조선’이라는 관형어를 앞에 붙였습니다. 정치적인 함의가 들어간 겁니다. 그 시대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는 이데올르기를 만들어내는 지식인의 한 부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사실을 근거로 평가해야 합니다. 유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러질 못했거든요. 본의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확한 사실 또는 왜곡된 사실을 근거로 자기 이론을 전개한 것은 분명합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그런 이론을 수용하고 맹신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을 떠올리면 안쓰럽게 짝이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독립한 이후에 수 십 동안 그 이론‘류(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그 그늘들이 곳곳에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유섭 선생등 몇 분들은 반론을 폈고, 지금도 몇 분은 일본식의 미학을 비판합니다. 그래도 역사학자인 제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찹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실(fact)에 해당하는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저는 일본인인 그들보다 더 많은 고구려의 각종 문화들, 벽화들을 보았습니다. 역사학자이니까 당연히 문화가 생성되는 배경을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이도 그때의 그들보다 더 많습니다. 계량적으로 보더라도 美나 사유의 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고, 때로는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미를 창조한 분들의 피를 공유하고, 넣어둔 뜻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한마디 하렵니다. 역사학자들이, 특히 문화사학자들이 예술과 미학을 모르는 것은 문제지만, 미학자들이나 에술가들이 역사를 모르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서로 끌어주고 밀면서 함께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고구려 역사와 문화, 즉 예술과 미학은 사실에 근거해서 찾아야 합니다. 고구려는 원(proto)조선을 계승한, 우리 문화의 ‘원형(archetype)’을 수용해서 발전시킨 거의 뿌리같은 문화이거든요. 그런데도 현재 우리가 남기고 있는 소위 전통적인 문화와 미에는 반영안된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와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하려는 독특하고, 바람직한 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복원하고 살릴 필요가 아주 큰 것이지요.

다음으로 고구려 미가 생성되는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궁금하시지요?

‘미’는 시대상황과도 직결됩니다. 사회와 문화가 다르면 시각(視覺)도, 심각(心覺)도 달라지지요. 생활양식과 종족, 언어, 신앙 등 인문환경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특히 구성원인 주민의 성격과 경험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이르면 고구려인들이 다수로서 중핵역할을 하지만 넓어진 영토로 인하여 동아시아의 다양한 종족들이 포함된 다종족적인 국가로 변해갑니다. 자연스럽게 하나의 국가영토 안에 색다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면서 복합적인 역사공간으로 바꿈했습니다. 물론 중국처럼 하나가 잘게 쪼개져 흩어진 이질성의 다양성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 다름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모이는 다양성을 지닌 다문화 국가였습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이르러 생활 공동체 역사공동체로서 문화가 매우 뒤섞인 일종의 혼합문화(hybtid culture, melting pot culture)’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적은 편이지만 어쨌든 고구려체제 내에서는 종족 간의 계급적인 갈등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문화충격(culture shock)’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비주류 종족들의 실질적인 소외감, 신(神)이나 국가정체를 해석하는 차이에서 나타나는 혼란함과 불안감 등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감을 극복하는 일이 필요했겠지요. 더구나 현실적으로도 내부의 공동체 의식은 강화돼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과 극복하려는 노력은 고구려 이전의 조상들이 지향하고 지켜온 가치관이고, 세계관이었습니다. ‘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이도흥치(以道興治)’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생태환경과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고구려인들은 ‘다양성과 자아’ ‘보편성과 정체성’이라는 선택의 딜레마에 빠졌고, 공존과 상생이 절실해졌습니다.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고구려는 ‘시대정신’을 설정하고 몇 가지 문화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추구하고 만드는 미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고려인들이 발견하고 발명한 미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번에는 ‘미학’이 아닌 ‘미’ 자체를 살펴보려 합니다. 미학은 미에 사상과 논리가 배합된 것 유기체이지만, 지난 번에 ‘고구리즘(Kourism)’을 소개하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 에는 가능한한 미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고구려미는 신화·설화 등의 논리, 음악·건물·고분벽화·사찰·탑·불상·공예(사치품·관) 등의 예술, 복식, 운동, 음식 등 생활문화, 심지어는 무기· 산성 등에도 표현됐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저는 장군총, 광개토태왕릉비, 고분벽화, 그리고 산성을 택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문화와 예술 가운데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대표적인 상징물로서 지표유물입니다. 저는 2008년도에 「壇君神話 해석을 통한 장군총의 성격 이해」라는 비교적 긴 문장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고구려의 지식인들은 ‘신논리’와 ‘신문화’를 창조해야 하는 시대정신과 정치적인 요구를 반영하여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장군총을 건축했거든요. 대형의 화강암을 정사각형으로 쌓아 7층으로 올린 거대한 방형 계단석실묘의 전형입니다. 정삼각형의 피라미드(금자탑)이지요. 맨 위에 해당하는 텅 빈 공간에는 제의기능을 하는 목조건물이 있었으니 일종의 ‘신전(altar)’이지요. 천제인 해모수와 유화부인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는 시조와 부인 즉 추모와 예씨부인의 시신을 모신 무덤 공간입니다. 당연히 외면은 비록 단순하며 정제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외모와 색 분위기 글꼴과 내용 등은 조상숭배와 건국신화(단군신화 및 주몽신화), 그리고 몇몇 신앙을 일치시키는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종교건물을 비롯하여 공공적인 성격, 지배자 및 국가체제와 관련이 깊은 건축물 및 기념물은 시대정신뿐 만 아니라 신화, 설화, 의장 등 다양한 상징 및 은유 등의 ‘기호(code)’를 통해서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 기호 가운데 ‘터(공간, place)’는 ‘집터’ ‘무덤터’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고, 몇 가지 의미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궁궐에서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과 일직선으로 연관된 산 기슭 아래, 압록강물이 가깝게 흐르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해인 해모수와 물인 유화부인을 고려한 배치이겠지요. 그렇다면 장군총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구려의 미학이 가장 순도높게, 체계적으로 반영됐을 겁니다. 신령성, 논리성, 맑고 정갈한 미입니다.

광개토태왕비를 두 번째 예를 들겠습니다. 2014년도에 「광개토태왕비, 美(beauty) 論(logic) 意(meaning) -광개토태왕비에 표방한 미학과 논리-」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 존재물을 평가하고, 본질을 간파하고자 할 때에는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야 한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이 있고, 미각도 활용합니다. 저는 그 외에 마음(정신), 즉 심각(心覺)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광개토태왕비처럼 한 시대 또는 다수의 목적의식과 공력(工力)이 집합된 기념물은 정신(spirit)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시좌구조(view point)’를 정면, 후면, 측면, 사면은 물론이고, 下에서 上으로, 上에서 下로 시선을 다양하게 이동시켜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가능한한 心覺과 心角을 활용해서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필요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전제로 해서 광개토태왕비의 ‘미’에 대하여 간단하게 정리하지요.

광개토탱태왕비는 단순한 기념비나 공적을 선전하는 훈적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고민하고, 공들여가면서 논문을 썼겠습니까? 그 비는 4세기 말부터 새로워진, 또는 새로워질 고구려 자체를 반영하는 상징물로서 주인공의 업적 등의 역사, 고구려 정신, 고구려세계가 후세에 전달하는 멧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美의 본질은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서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는 실체 가운데에 새겨진 글자의 존재와 문장을 넘어 크기와 형태, 장소(place)등의 표상성도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요한 미의식을 생성합니다. 실체와 공간은 기본요소이므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광개토태왕비가 주는 강렬하고 본질적인 미는 ‘장엄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엄미란 크기 및 부피 등과 연관된 ‘웅장미’와 내면의 정신같은 ‘감동미’가 혼합된 미라고 생각합니다. 높이가 6,39m로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큰 금석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존재물은 크기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는데, 이 비는 크기에 걸맞는 미와 함께 독창적인 미를 내뿜고 있지요. 보통 비들처럼 기하학적인 비례에 맞춘 직육면체가 아니고 자연석에 가까운 불규칙적인 입체입니다. 비의 아래 부분은 뿌리가 박힌듯한 형세와 뭉툭한 느낌을 주면서 장중함과 무게감을 확대시킵니다. 또 꼭대기는 평평하지 않고, 불규칙적인데 좌측이 더 높아 경사지면서 움직임을 중복적으로 강조합니다. 특히 정면이 아닌 측면과 사면에서 보면 뾰족한 사각추의 느낌마저 들게 하는 형태입니다. 무한한 운동성과 무한한 방향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볼 때마다 비상하는 듯하며 강렬한 리듬감과 예리한 목표성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생기(生氣)가 가득차 보여 그 자체가 완결된 존재임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는 세운게 아니라 ‘심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형태에서 ‘골계미’도 동시에 떠올렸습니다. 즉 비정형성의 미학을 갖고 있는듯 했거든요. 면이 정형화되지 않았고, 선(line)인데요. 네면을 가르는 모서리의 사선 조차도 규칙적이거나 바르지 않고 휘어졌습니다. ‘색(color)’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를 느낄 때 색에 대한 감정이 가장 먼저 작동합니다. 색은 색채와 함께 빛처리 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입니다. 광개토태왕비는 단색이 아니거든요. 응회암인 탓인지 재(灰)빛을 주조로 삼고, 간간히 연한 녹회색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둔탁한 듯 보이지만 자연스럽고 소박한 분위기입니다. 제가 보기에 고구려인들은 자연스러움, 어수룩함과 무정제성 속에서 형식 논리를 초월한 비선형적 사고와 카오스 논리, 내면의 기(氣)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무위자연의 미와 의미를 추구하였습니다. 물론 흔히 말하는 한국미의 골계미는 보다는 더 역동적이고 적극적이지요.

아울러 ‘후덕미(厚德美, 덕성)’도 느끼고, 이것을 강조하고 싶기도 합니다. 비를 보면 차가운 돌덩이에서 온기가 흘러나오고 덕성이 배어있는 듯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비는 독특하고 어수룩한 형태입니다. 표면은 약간 다듬은 흔적이 보이지만 자연상태를 유지하면서 울퉁불퉁하고, 여러 개의 선들이 불규칙하게 그어져 만나고 흩어집니다. 색조 또한 백색 흑색 등의 강렬한 단색이 아니라 소박한 느낌의 회잿빛이고, 개체나 부분이 강조되지 않고 다양한 색이 드러나지 않게 섞여 있습니다. 깊이감과 부피성을 갖고, 입체성 또한 강렬합니다. 또한 ‘질감(texture)’을 부각시키므로써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저는 볼 때마다 손이나 몸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대상체와의 합일감, 인간적인 미와 따사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당연히 큰 높이, 거대함, 위압, 권위와는 다른 인간애에 가득찬 후덕미가 느껴지는 겁니다. 광개토태왕비에 담긴 후덕미가 건축, 고분변화. 공예품, 춤 등 모든 예술품에서 나타나는 걸 느낍니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은 물론 심각까지 고려하여 관찰하고 음미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즉 사유하게 만드는 형태이니 그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뭔가 차오르고, 의식들이 교류하는 걸 느낍니다. 저는 광개토태왕비가 독특하고, 귀한 가치와 미의식이 담긴 세상에서 보기 힘든 비석 또는 ‘신령석(holy stone)’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고분벽화에서 ‘고구려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아시지만 고구려의 벽화고분은 현재까지 약 100여기가 발견됐습니다. 20여 기가 만주에 있고, 80여 기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영향을 받은 벽화고분들이 몇 군데 더있습니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 순흥, 일본 아스까 지역의 고송총과 키토라 고분,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큐슈 지역의 몇몇 고분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미 그러면 누구나 ‘정중동(정중동)’을 떠올립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풍류(風月) 등과 탈춤 등에서 보이는 춤사위 등을 거론하면서 동적인 요소가 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만. 그런데 고구려는 강렬하고 힘찬 動(dynamics)을 주조로 삼은 靜(calmness)의 문화입니다. 즉 ‘동중정(mo-stability)’의 논리이며, 미였습니다.

혹시 ‘보보스(bobos)’라는 용어가 기억나시나요? 20세기에 들어와 한때 유행했던 용어와 개념이지요. David Brooks가 ‘부르조아지(bourgeois)’와 ‘보헤미안(bobemian)’을 합성해서 만든 명사입니다.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이 혼합된 성격을 반영한 문화용어이고, 그 시대 서양인들의 유행과도 연결됐지요. ‘bobos’라는 의복 상표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제 입맛과 기질에 맞는 용어라서 저도 관심을 기울이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했던 기억도 납니다. 또 21세기, 즉 새천년이 시작될 때 1월 ‘타임(TIME)’의 표지 모델이 ‘칭기스칸(Genghis khan)’이었거든요. 새 천년은 이동성 문화, 즉 디지털 문명의 시대라는 선언이었지요. 한국도 한 때는 칭키스칸에 대해 관심을 갖는게 유행이었지요. 하지만 이동성(mobility) 문화는 한계가 있지요. 생명체의 탄생도 그렇지만, 인류의 삶 자체가 이동성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역사를 보면 유목민족들의 삶과 죽음, 흥망에서 이동성 문화의 한계와 비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은 덜 하지만 역시 ‘정주성(stability)’ 문화, 즉 농경에 집착한 문화도 한계는 있습니다. 이렇게 한 방향의 특성만으로 유형화된 문화는 생활 뿐 만 아니라 사고, 예술 등에도 한계를 노정시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지요? 모든 ‘미’는 고유한 점이 있고, 판단의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조화(harmony)’라고요. 저는 오늘 간단히 말씀드리지만 動과 靜의 조화를 이루는 문화가 바람직하며, 미의식도 뛰어나다고 봅니다. 그리고 거기에 靜보다는 動에 실천의 비중을 조금 더 두고(주도성), 순서를 조금 더 앞에 두는(선차성) 문화, 즉 ‘동중정’ 또는 ‘동화정(動和靜)’, mo-stability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고구려 문화, 고구려 미학은 제가 판단하는 한 ‘동중정’의 성격입니다.

고구려의 동중정 미학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지만 고분의 벽화에서 쉽게 느끼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분벽화는 수렵도, 씨름도, 전쟁도, 식사나 제사의례, 춤처럼 현실적인 주제들이 화려한 색상과 거침없는 붓길로 역동적으로 표현됐습니다. 물론 동적인 요소라 해도 성격과 질이 다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미의 역동성은 강력한 힘을 외부로 발산하는 한편 외력(外力)을 수용하고 수렴하는 질적으로 성숙된 형태입니다. 운동을 표현하면서 직선이 아닌 원, 곡선, 유선형으로 하였습니다. 운동의 형태는 직선, 곡선, 호선, 와선, 나선 등으로 골고루 표현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강건함과 부드러움, 움직임과 정지가 단절없이 조화를 지향합니다. 율동이 느껴지는 유동성이 강하면서도 사유와 정적이 담긴 고요함과 정주성이 함께 있습니다.

6세기 이후에 남만주인 집안 지역의 고분 벽화에는 사신도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이 본격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강렬한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어우러져 역동적인 형태이면서 사유의 분위기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춤무덤 등에서는 남녀 무용수들의 몸짓을 보아도 靜과 動이 하나로 이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mo-stability 문화를 지향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류의 ‘비애’와 ‘애상’, ‘恨’의 문화는 고구려미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제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산성에서 고구려미, 고구려 미학을 소개하려 합니다. 고구려 산성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유럽 등의 산성과는 다른점이 많습니다. 목적도, 기능도, 문화도, 그리고 미도 다릅니다.

우선 제 경험을 말씀드립니다. 십 수 년 전, 그러니까 1995년 어느 여름날 안시성을 찾아 들어 갔습니다. 그 성. 오로지 하나 남은 성. 양만춘 장군이 당태종이 지휘하는 10만 병력과 싸워 승리한 신화적인 성이지요. 힘겹게 땀을 흘리면서 산길을 걸어 점장대에 올라갔습니다. 머리 위에는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에서 넘실거리고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뜨거운 바람결에 남색 도라지꽃 잎들이 나풀거립니다. 서러운 피 냄새를 의식했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와 편안하다는 느낌이 밀려 왔습니다. 순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죄의식을 느껴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할 지 몰랐을 정도였습니다.

또 황해 북부의 간기 배인 바람들 불어오는 장하의 산 골에 위치한 ‘석성’에 갔습니다. 정말 여러번 갔지요. 서쪽 성벽을 타고 올라가 천단에 발을 딛고 선 채로 이마로 빗겨가는 산바람을 맞았습니다. 바라보는 성벽들은 피냄새가 각인된 돌덩어리들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하양 나무등걸처럼 보이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었습니다. 제 선 자리는 ‘연개수영’이라는, 어쩌면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었을 고구려 여인이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기단부를 9층의 돌계단을 만들어놓았는데, 역시 퇴물림양식을 사용하여 유려한 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기단부의 맨 밑바닥 네 면을 둥그렇게 다듬은 굽도리 양식으로 했습니다. 미의식을 고려해서 만들은 것이지요. 백암성 환도성 오녀산성 등-. 여기 저기에 남은 성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에 배인 고구려만의 미의식과 정신세계의 원형을 알아차렸습니다.

산성은 피가 튀기는 전투의 공간입니다. 그것도 청야전술을 사용해 백성들이 다 성안에 들어와 결사항전을 벌이는 실존 그 자체인 성입니다. ‘터(공간, field,place, land)’의 관점으로 보면 능선과 계곡 등을 활용해 곡선을 이루는 등 주변의 자연환경과 혼연일체의 조화를 이룹니다. 멀리서 보면 구불구불 뻗어 간 성벽이 마치 흰 구름이 넘실거리는 듯하고, 한 마리 白虎가 꿈틀거리는 듯합니다.

성벽 자체도 마치 예술품처럼 특별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담아냈습니다. 강도가 높은 수 만 개의 화강암 돌들을 정으로 쪼아서 예쁘고 부드럽게 만들었고, 또한 성벽의 아랫 부분을 각지지 않게 다듬어서 둥글게 돌리고 안으로 물려 가면서 쌓아 올렸습니다. 또 하나 정말 놀라운 일인데요. 고구려인들은 방어 면적을 높일 목적으로 성 벽에서 중요한 몇 군데를 튀어나오게 쌓았습니다. 꿩 ‘치(雉)’자를 씁니다. 유려한 선이며, 상하의 공간 배율, 안정적이면서도 하늘을 날라가는 듯한 자유로움, 퇴물림 공법을 활용해서 벽화에 그려진 선녀의 옷자락같은 유려한 선. 그리고 네 면의 모서리는 표면을 반월형으로 다듬는 굽도리 양식으로 다듬어 둥글게 돌려놓았습니다. 신라인들이 구현한 미의식의 극치라는 첨성대와 어쩌면 이렇게도 흡사합니까? 이 미를 발견하는 순간 저는 이겨내기 힘든 희열감과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학생들에게 현장에서나 강의실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첨성대같은 아름다운 건물이 성벽에 많단다. 그게 고구려란다.”

고구려인들은 미의식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또한 세계관을 다양한 구조와 형태로 표현한 것이지요. 저는 실제로 너무나 많은 장소에서 너무나 많은 유물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미적 완성물은 다른 건축물에도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아, 고구려 미에서 저는 하늘을 향하는 이상과 자유를 희구하는 분위기를 느낍니다.

오늘도 말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제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메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고구려는 문화가 발전하고 예술이 뛰어난 문화국가였습니다. 문화 예술을 통해서 고구려가 지향하는 세계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 국가의 발전목표 등을 표현하고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니까 추상적이나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시좌구조의 변화를 넘어 사고의 ‘틀(frame)’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찾아내고 살려낸 고구려 미는 당연히 현대의 창작에 활용하면서 우리 예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에 대한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문화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만주 지역의 생태환경과 종족, 생활 등의 인문환경을 상실하면서 북방문화와 연결된 문화와 예술의 내용과 형식들이 불완전하게 계승됐습니다. 또한 군사, 정치적인 패배로 인하여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자의식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우리 미를 ‘情’ ‘恨’ ‘슬픔’, 그리고 ‘그늘’로 이해했습니다. 만약 고구려 문화와 미를 복원한다면 단절되고 상실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규명하고 본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수 있습니다. 왜곡을 바로잡고, 모자란 미들도 충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문화와 예술을 총체적이고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유리해집니다. 이렇게 되야 자의식에 충실하고, 정체성을 회복하며 긍정적이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한 ‘흰색(white)’이 아니라 우리가 말해온 ‘빛(bright)’을 담은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을 고대합니다.

여러분. 고구려를 정말 많이 그린 화가가 이중섭인 거 아시지요? 김환기도 그렸고, 어쩌면 박생광은 아슬아슬 넘을 듯 한 것 같기도 합니다만. 김지하가 자주 친 난(蘭)에는 고구려가 많이 담겨 있답니다. 그가 고구려를 칠 때의 눈빛, 우람한 팔과 손가락들, 끝난 후에 짓는 妙한 웃음이 그립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 예술가들은 장르를 막론하고 고구려를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아요. 혹여라도 역사에서 유랑하는 고구려미를 만난 예술가들은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고구려미’를 다른 논문들입니다.

1996 「고구려인의 시대정신에 대한 탐구」󰡔한국사상사학󰡕 7집, 한국사상사학회

2008 「단군신화 해석을 통한 장군총의 성격 이해」 󰡔단군학연구󰡕 19호, 단군학회

2014, 「巫敎에서 본 생명관- ‘무교사관’의 설정을 위한 시도」 『동아시아고대학』 33집

2014, 「국사교과서에 반영된 해양 관련 서술의 검토와 몇 가지 제언」 『고조선단군학』

2014, 「광개토태왕비, 美(beauty) 論(logic) 意(meaning)-광개토태왕비에 표방한 미학과 논리-」 『고조선단군학』 30집

2015, 「고구려 문화 속의 '3의 논리' 탐구 시론」 『고조선단군학회 제64회 학술발표회

그 밖에도 산성 관련 등 논문들과 책들. 그리고 몇 권의 시집들이 있습니다.

***필자소개 / 윤명철

역사학자. 시인.탐험인.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겸 우즈베키스탄 국립사마르칸드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저서 60여권, 시집 17권,논문 160여편. 고구려와 바다, 유라시아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