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작가, 크리에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유타, 거대한 자연의 철학자
샌디에이고로 향하던 길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벚꽃이 필 무렵이었지만 유타의 높은 계곡과 콜로라도 강줄기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엔 여기저기 잔설이 쌓여있다. 사실 지난 밤에도 눈이 내렸다. 나는 모텔에서 눈을 끔뻑이며 낮에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렸다. 골프장에서 트랙터를 몰고 골프를 치던 유타의 거친 사내들, 할리(Harley Davidson)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던 바이크족들, 주유소 식당에서 주문한 스테이크를 가져오던 인디언 소녀.
그때,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그녀가 내게 무어라 말을 던졌는데 나는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 Martin)이 그려놓은 정제된 사물처럼 간결하게 디자인된 은빛 탱크로리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그만 그녀가 던진 한마디를 놓쳤다.
대꾸 없는 낯선 동양인의 무례함에 그녀는 살짝 뿔이 났다. 바로 느낌이 왔다. 한적한 동네에 한산한 주유소 식당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맥주 한 병을 주문하면서 좀 전에 창밖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노라 말했다.
그녀의 말은 샐러드나 피클은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소녀는 금세 환한 얼굴로 돌아갔고, 식당은 다시 활기찬 공기로 채워지고, 나는 예의를 갖춘 이방인 역할에 집중했다. 이윽고 올림픽 메달처럼 상으로 샐러드와 피클이 더 주어졌다.
A Gas Station On The Road, Utah, 이홍석, 2016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은 평범한 산책길 정도로 만족, 협곡의 깊은 곳까지 탐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겉만 둘러보았다. 떠오르는 태양이 정오를 향하고 유타에서 나는 내내 무언간 심드렁한 상태로 대부분 풍경을 흘렸다. 카메라는 아예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마을을 지나치다 보면 집마다 마당에 버려진 차들이 널려있고, 언제 버려졌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캐딜락 따위엔 풀이 무성하거나 온갖 꽃들을 심어 놓았는데 그 자체가 세상 ‘힙(hip)’한 가드닝이다. 땅이 넓은 유타는 따로 폐차하지 않아도 되는 모양. 낡은 차를 화분으로 쓰다니. 지역 보안관이 이런 일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느슨한 법도 인상적이다.
유타에선 자동차든 건물이든 또는 그 무엇이든 대충대충 던져 놓았는데 골프마저 카트가 아닌 트랙터를 몰고 다니는 그들에게서 묘한 여유와 거부하기 어려운 자만심 그리고 고요한 삶의 은유와 묵직한 어떤 힘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아등바등 살아낸 나의 삶과 선이 엇갈렸다. 아마도 심드렁한 기분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유타의 깊은 시골로 갈수록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하지만 막상 인사를 트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하다. 부산에서 가끔 먹었던 동래파전만큼 크고 푸짐한 스테이크는 샌디에이고로 넘어가려던 나를 유타에 며칠 더 붙잡아둔 재미이기도 하다.
Bryce Canyon National Park, Utah, 이홍석, 2016
점심으로 스테이크 한 장에 맥주를 몇 병 비우면 나른한 잠이 밀려든다. 유타는 너무 광활해서 딱히 목적 없이 돌아다니기에 힘들어 모텔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모텔 ‘네바다(Nevada)’엔 종일 손님이 없다. 늦은 밤에 어쩌다 낯선 여행자들이 드물게 찾아오면 나는 후다닥 로비로 나가 커피를 내리며 새롭게 등장한 인물 감상에 나선다. 모텔 주인은 그런 나와 운명 공동체 또는 한 패거리나 다름없었다. 그가 이제 막 도착한 신선한 인물들의 체크인 시간을 일부러 질질 끌면 나는 감사의 눈빛을 던지며 그에게 말한다. “아이 심심해!” 사실 거의 손님이 없는 모텔에서 일하는 그도 매일매일 심심한 주인이다. 원래는 하루 예정이었으나 떠나지 않고 계속 깐족거리는 나 때문에 그도 분명 덜 심심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유타에 매료되었다. 알고 보면 이들이 일상에서 드러내는 여유와 자만, 언어적 또는 태도적 은유나 모종의 힘은 항거불능의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둔 심심함으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 바쁘지 않은 생각, 바쁘지 않은 행동, 바쁘지 않은 일상, 그들은 하루하루 삶을 찬찬히 바라본다. 공이 오비(Out of Bounds)로 가든 페어웨이(Fairway)에 안착하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마당에 버려둔 자동차에 녹이 슬고 바람에 실려 온 흙이 켜켜이 쌓이는 것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는다. 바람에 실려 온 풀씨 따위들이 발아하여 풀이 무성해지고 이끼가 덮일 때까지 오랜 시간을 내버려 두었다가 슬그머니 꽃을 심는다. 처음부터 꽃을 심지 않는다. 유타에선 집마다 주인을 닮은 독특한 자동차 정원이 자연과 함께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만들어진다.
그들은 자기 마당에서 자란 풀의 나이를 반려동물의 출생일을 말하듯 이야기한다. 자동차는 타고 다닐 때 30년 멈춰서 10년, 그 자동차에 자란 풀과 이끼의 나이는 5년, 그런 식이다. 그리고 이 ‘무생’하며 ‘유생’한 것들은 앞으로 집주인보다 더 오래 존재할 것이라 말한다. 소쉬르와 롤랑 바르트가 유타에 온다면 놀랄 일이겠지만,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도 별문제 없는 그들의 삶. 유타의 거대한 협곡과 강 그리고 광활한 사막보다도 이곳 사람들의 그런 여유로운 태도는 나를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다. 뜬금없이 모더니즘의 질서 또는 그에 연결된 구조주의적 해체를 유타의 기묘한 일상에서 보았다면, 그래서 나 스스로 내 안의 과장되거나 정형화된 모종의 질서를 모텔 네바다(Nevada)에서 해체하였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On The Road, Utah, 이홍석, 2016
샌디에이고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모하비 사막을 건널 작정이고 라스베이거스를 거쳐서 머리에 꽃을 꽂고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갈 것이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사막을 건너면 매서운 북태평양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욕망하지 않아 여유로울 수 있다면, 꿈을 발설하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구속하지 않아 대상을 존중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단 한치도 바쁘지 않아 일상의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면, 유타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유타는 마치 할리 데이비드슨(Harley Davidson)을 타고 달리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트랙터를 모든 소쉬르(Saussure, Ferdinand De)가 페어웨이에서 공을 오비로 날리고 기표인 오비는 몇 개의 기의를 가질 수 있는지 열띤 논쟁을 벌일 만한 그런 곳이 아닐까 싶다.
미대륙을 횡단하며 종종 거대한 자연의 구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또는 그것들이 얼마나 숭고한지 보게 된다. 거대한 자연은 일반 교과나 깊이 있다는 전공에서조차 배울 수 없는 통찰과 사고의 유연성을 강제한다. 콜로라도강을 한번 건너기 또는 그랜드 캐니언의 일부를 넘기에도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얕고 보잘것없다. 방향을 잃으면 그대로 죽음이다. 발을 헛디디어도 역시 살아나기 어렵다. 먼저 가보겠다 서둘러도 역시 생존하기 어렵다. 압도적인 대자연 유타의 풍경, 그 자연의 정점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 조급했던 삶의 모든 기점에서 자잘하게 배어있던 사소한 욕망마저 부끄러워진다.
글 · 사진 이홍석,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