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중구난방] 인간의 기억은 믿을 만 한가
36세의 한창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본의 천재작가, 1915년에 발표된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작품 가운데 「덤불 속」이라는 단편이 있다.
부부가 산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남편은 나무에 묶이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는 강도에게 겁탈을 당한다. 그리고 남편이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틈을 타 아내는 도망친다. 관헌들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나무꾼과 떠돌이 스님, 두 사람의 목격자를 찾아낸다. 그런데 현장을 목격한 그들의 말이 서로 다르다. 이윽고 강도가 붙잡혔는데 강도의 말도 다르고, 강도를 붙잡은 관헌의 말도 다르다. 피살당한 남편의 장모도 진술하는데 그녀의 말도 다르다. 어찌된 일인지, 기억이 모두 다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강력사건을 수사할 때, 경찰이나 검찰은 목격자부터 찾아 진술을 듣는다. 하지만 목격자마다 진술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수사경과를 자주 듣게 된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진실은 하나인데 왜 그렇게 차이가 날까?
「덤불 속」도 그렇고, 사람들이 왜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얘기할까? 저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우리의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억’(記憶)이란 과거에 자신이 체험, 경험, 목격한 것, 자신이 습득한 지식 등을 머릿속에 새겨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뇌가 획득한 온갖 정보를 저장하고 인출하는 것이 기억이다. 우리 뇌에 저장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사고(思考), 판단, 결정, 선택이 가능하고 학습, 예상과 상상(추론) 등이 가능하다.
우리 뇌는 기억하는 기능과 함께 ‘망각(忘却)’의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다. 기억의 반대인 망각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떤 일이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망각은 문제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
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자기 나름으로 대수롭지 않았던 잡다한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하고, 낡은 지식이나 정보를 잊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학습할 수 있게 하며 고통스런 경험도 차츰 잊어버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기억과 망각이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의 정신이 건강하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과 망각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남달리 기억력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건망증이 심해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 기억력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숫자에 대한 기억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이름, 남이 했던 말 따위를 특별히 잘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실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뚜렷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늙어가면서 기억력이 떨어지고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은 뇌기능 감퇴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지만, 각종 질병이나 사고도 기억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뇌염이나 간질, 사고 등으로 뇌가 큰 충격을 받거나 뇌기능이 손상됐을 때,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도 여러 감각의 이상으로 그 때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든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도 한다. 술에 만취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자신이 술에 취한 뒤에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을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그런 상황을 필름이 끊겼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은 일반적으로 심한 건망증을 동반한다. 정보 흡수력이 떨어져 방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조차 기억하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색맹이나 시력이상으로 어떤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리적 기억이상도 있다. 현재 자신의 심리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할 때 기억에 이상이 생긴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에 빠져있거나 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조울증 등은 자신의 정확한 기억을 방해해서 기억착오를 가져오게 한다. 개인적인 편견도 기억을 잘못 이끌어낸다.
그러고 보면, 기억과 망각에 대한 개인차, 질병, 심리, 편견 등, 다양한 요인들이 우리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거기다가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습성도 기억의 정확성을 그르친다.
또한 기억은 저마다의 지적수준, 신분과 지위, 학력, 직업, 환경, 성별 등에 따라 서로 큰 차이가 있다. 그에 따라 체험과 경험도 다르고, 기억하는 정보와 지식도 큰 차이가 있다. 아울러 기억하려는 정보의 수준과 가치, 뇌에 저장된 정보량도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한 기억을 되살릴 때, 그 판단과 관점, 수준에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
따라서 우리의 기억에는 객관적 정확성보다 개인에 따라 오류와 착오가 많은 것이 당연하다. 결국 우리 인간의 기억은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처럼 부정확한 우리의 기억이 어떤 사실이나 진실을 얼마든지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 나온 헥터 맥도날드(Hector Macdonald)의 『만들어진 진실』(원제: Truth)에서는 어떤 사실(fact)은 하나지만 관점과 필요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편집되고 조작된다고 했다. 그는 팩트에는 부분적 진실, 주관적 진실, 인위적 진실, 알려지지 않은 진실의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부분적 진실은 어떤 사실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일부분만 보거나 일부분만을 과장해서 마치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것이다.
주관적 진실은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지적하거나 강조하므로써 팩트를 오도하는 것이며, 인위적 진실은 어떤 사실을 근거삼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요즘 흔히 쓰이는 ‘가짜뉴스’가 바로 인위적 진실이다. 알려지지 않은 진실은 진짜 팩트는 감춰지거나 보이지 않아 엉뚱하고 그릇되게 오판하고 왜곡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네 가지 편집되고 조작된 진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관심이나 편향, 그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 자신에게 의미가 있거나 자신의 사고방식에 맞는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며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의도적인 진실의 선택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기억도 그러한 네 가지 만들어진 진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도 사실과 진실에 대해 부분적으로 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시키거나 어느 일부분만 강조하거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덤불 속>에서도 어떤 하나의 사실에 대해 목격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진술이 다르고,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분을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저마다의 감정이나 심리에 따라 서로 다른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신들이 경험했거나 목격한 지나간 일들을 되새기고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회상(回想)이라고 한다. 회상에는 기억과 추억이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억이 지나간 일에 대한 이성적인 회상이라면 추억은 감성적이며 기억이 어떤 사실(fact)에 중점을 둔다면 추억은 감정에 중점을 둔다. 때문에 기억은 머리, 추억은 가슴에서 오는 회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처럼 기억은 이성적인 회상이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작할 수도 있고, 일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말할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어떤 부분을 감추거나 과장하고 조작할 수도 있다. 물론 순간적으로 경험했거나 목격한 사실의 상당부분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우리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크고 작은 집단의 목적이나 이익을 위한 쪽으로 편향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자신의 편견이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 기억의 상당한 부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될 수 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기억은 믿을만 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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