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영 문학박사, 중앙대예술대학원장 [사진=더코리아저널]


[이대영 감성일기] 시간이 주는 선물

우리네 삶에서 가장 귀한 것이 시간이다. 돈이나 그 어떤 물질보다도 내게는 소중하다. 다소의 고난이 있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거나, 한 두 번의 부끄러운 실수가 있었더라도 병가지상사 만회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 그것이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나이 들수록 오류는 덜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의 삶은 죽는 날까지 회개와 성찰과 염치와 깨달음의 연속체가 아닐 수 없다.

페북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지인과 소통하는 소중한 도구이다. 페북은 시간을 압축하여 관계역학과 사회의 정보와 지혜를 나누는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따라서 내게 페북은 깨달음의 시간이고 내가 겪은 현대사이고 내 가족의 내밀한 사연에 대한 기록이며, 지인의 건안을 묻는 우편전신도구이자 세상과 만나는 창이다. 언제든 생각나면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지인의 근황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페북 덕분에 오랜만에 오프에서 만나도 전혀 낯설지 않다. 최신 근황을 알기에 대화가 즐겁고 풍성해진다.

나의 소식도 페북을 통해 공유하는데, 나만 볼 수 있는 자물쇠(🔒), 누구든 읽을 수 있는 지구본(🌎), 그리고 친구끼리 등 세 종류로 나누어 쓴다. 비밀일기 아니라면, 남이 봐도 되는 일기장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선 대선 등 이념 갈등이 심할 때에는 댓글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내 직계 후배가 내 글에 댓글을 썼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골수 좌파이다. 물론 그런 후배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댓글에 잘지내고 있냐 답글을 달았다. 그랬더니 지인들이 어떻게 그와 친구일 수 있냐고 해서, 그럼 대학후배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냐, 나는 말도 안되는 일로 이미 새까만 후배들로부터 페절도 당했지만, 그런 비이성적 행위는 이념도 사상도 그 토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코흘리개 철부지들이나 하는 짓이고, 나마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철없는 사상에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잖는가.

다행히 지인들은 내 뜻에 동의하여 논쟁이 일단락 되었다. 요즘도 가급적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려 하지 않는 편인데, 맘 편히 제 생각을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 사실 그러한 글이 강박적 문신으로 평생 남는다는 것을 모르기에 단발마처럼 마구 떠드는 것이리라. 침묵이 황금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쓰려거든 수사학과 정염론을 되살려 메타포를 섞어서 쓰면 좋겠다.

페북에는 다양한 이모티콘이 있다. 그 이모티콘 때문에 괜한 오해를 살 때가 있다. 최근에도 어떤 일이 있었다. 사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이모티콘을 주로 이렇게 사용한다. 아마도 몇해전에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중언한다.

"좋아요"는 읽었다. 너의 글과 사진을 읽었다. 그냥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다. 때론 후루룩 보았을지라도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친한 지인들에게는 자주 쓴다. 내게 좋아요 눌러주고 내 일상에 관심 가진 친구들에게 더 자주 쓴다. 기브앤테이크, 팃포탯이니까. 그가 오프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경우에는 그의 프로필까지 자세히 살펴가며 적절한 호칭을 찾아서 쓴다. 그렇게 친해진다.

"최고예요"는 참 좋다. 너의 글과 사진이 따뜻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난 너의 심성과 삶에 감동받았다. 너의 오늘과 내일을 응원한다. 이렇게 온오프에서 아주 친한 사람들과 친밀감을 표할 때 쓴다. 온라인 친구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존경심을 표할 때 쓴다. 사실, 하트표시는 낯간지러워 잘 쓰지 못했다. 지금은 자주 쓴다.

"웃겨요"는 재미 있어서 웃었다. 물론 이것은 조심해서 쓰는데 자칫 비웃은 것으로 오해 받거나 실없는 사람으로 취급 당할까봐서 아주 절친한 사이 아니라면, 가급적 '좋아요'로 대체한다. 이모티콘이 주는 말맛은 밋밋하지만 괜한 오해보다는 낫다.

"멋져요"는 이모티콘 생김새도 그렇고 해서 거의 쓰지 않았고, "슬퍼요" 역시 같은 심정이어서 누르는데, 따로 카톡으로 찾아 위로하곤 한다. "화나요"는 공감한다 기운내라의 뜻으로 쓰는데, 가급적 누르지 않는다. 차라리 좋아요가 편하다.

간혹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글이 있는데, 속내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글이 대부분이다. 사상적 경향이 나와는 아주 많이 다른 경우이다. 꽤 많다. 정치적이든 미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철학적이든 내 뜻에 반하거나, 특히 타인을 이유없이 비하하는 글에는 가급적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좋아요"는 읽었다는 매너인 셈이다. 매너가 신사를 만든다고 했던가.

지금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페벗은 을사년이 시작되면 손가락에 뭐가 잔뜩 묻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주문이다. 이왕이면 금가루가 묻어나면 좋을 텐데. 다른 것이 묻어날 줄 누가 알겠는가. 흐흐.

사실, 내 오랜 친구를 이해시키려 이 긴 글을 쓴다.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우리네 생긴 것처럼 각양각색이고 다양하지 않은가. 외로 보면 다 적 아닌 사람 없고, 바르게 보면 적의 어떤 면을 사랑할 수도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처럼 말이다.

[사진=이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