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모든 일은 마음 먹기이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우리의 삶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라가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지만, 국민은 일상의 삶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연말연시에는 지난해와 새해의 삶을 잘 연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에 민감해진다. 특히 연말에는 새 달력을 걸고 나이도 한 살 더 먹게 되면서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게 된다. 올 한 해를 잘 산 것일까?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연말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창밖의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한 해의 삶을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는 소중한 시기다.

다 마음 먹기이다. 난 지난 해 장자가 말한 "승물유심(乘物遊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 이 말은 '일과 사물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타고 넘어 자유로운 마음에 노니는 삶'을 뜻한다. '실패든 성공이든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라'는 거다. 더 멋진 해석은 '흐르는 물처럼 상황을 타고 노닐어라'는 거다.

원문은 이렇다. "乘物以遊心(승물이유심) 託不得已以養中至矣(탁부득이이양중지의) 何作爲報也(하작위보야) 莫若爲致命(막약위치명)"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遊心)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託不得已), 중심을 기는 데(養中) 전념하십시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는 것"만 하면 된다는 거다.

'노니는 마음으로 세상사(世上事)의 파도를 타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며 자신이 걷는 길을 풍요롭게 가꾸라'는 말이다. 작년에 여러 가지 일들을 잘 가꾸어 놓았으니, 올해는 '승물유심'의 마음으로 한 해를 보낼 생각이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면 어려운 일이 없다. 한 마디로 모든 일은 마음 먹기이다.

우리의 몸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먹고 분주하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인간의 능력은 축복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보람과 교훈을 얻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희망과 의욕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축복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와 자책의 괴로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재앙이기도 하다.

과거의 삶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미래의 삶이 험란하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진다. 이렇게 자신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원망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시간을 넘나드는 마음을 사용하기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축복을 재앙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재앙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인간은 자신의 입장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알프레드 아들러)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물리적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드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정신을 젊게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 환경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삶이 달라질 것이다.

다 '마음 먹기'이다. 나의 처지를 비관하지 말고, 나의 역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변화를 통해 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가끔씩 잠시 멈추고,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지체 시키는 것들을 버리고 가야 할 때가 있다. 그래 결단이 중요하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것을 공유한다.

결단이 중요하다/박수소리

포기는 할 수 없다고 멈추는 것이고,

내려놓음은 할 수 있지만 비우는 마음으로 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멈추는 것이다.

결단이 중요하다. 그건 마음 먹기에서 나온다.

포기는 아쉬운 결정이고, 내려놓음은 깊은 성찰인 것이다.

기쁨 평안 그리고 행복이 삶의 보람이고 보상이다.

그건 옳은 일을 할 때 느끼는 기쁨과 바른 길을 갈 때 느끼는 평안,

바로 그 기쁨과 평안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보상이고 보람이다.

그 기쁨과 평안 속으로 걸어가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영원한 시간이다.

마지막은 마지막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하는 것이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을 마지막처럼 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일곱 째 날, 안식일(sabbath)을 갖는다. 그것은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이 행위를 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한다. 이것이 영어로 '사바스(sabbath)'라고 한다. 안식일은 '편히 쉬다'가 아니라, '강제로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강제로 멈추다'란 의미이다.

'처음'으로 '리셋(reset)'하는 것이 방법이다. 개인 PC를 초기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바쓰’의 의미는 ‘강제로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라'하는 의미다. 안식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날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자신과 친밀해 진다. 우리는 이 친밀함을 집중 혹은 몰입이라고 말한다. 창의성이나 천재성은 이 친밀함의 표현일 뿐이다. 안식일은 고독을 실천하는 날이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사람들과 만나, 우리의 배역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절제를 수련한다.

유대 지식인들은 양적인 시간이 아닌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그 일상을 새롭게 관조하는 습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조(觀照) 행위가 '안식일'이다.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고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어제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저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과감히 잘라내는 것이다. 그 것만이 우리를 다시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하게 해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또한 희년(禧年) 제도(Jubilee)가 있었다. 희년은 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 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말한다.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이 때가 되면 노예를 석방하고 매매했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는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 현재의 가난과 고통이 대를 이어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없으니 차라리 세대를 잊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0%대의 출생률로 떨어졌다. 수치이다. 그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빨간 불이다.

희년(禧年)은 ‘복된 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사야 61장 1-2절을 인용하며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7년마다 가진 안식년을 일곱 번 맞은 뒤 50년째 되는 해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희년을 선포했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50년마다 희년을 기념한 것은 1300년부터다. 1475년부터는 누구나 한번은 그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주기를 25년으로 줄였다. 2000년 대희년 후 다음 정기 희년은 시하인 내년 2025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4일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성문을 여는 걸로 희년의 시작을 알렸다. 교황이 관심을 촉구한 것은 전쟁, 생태위기, 불평등이다. 이스라엘 군대가 살상하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외면하고, 글로벌 자본의 폭리 추구 속에 파괴되는 지구를 껴안지 않고, 커져만 가는 빈부 격차를 바로잡지 않고 어떻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희년의 정신에 따라 국제사회가 생태적 부채를 인식하고 부채 탕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전쟁의 시대에 군비의 일정 비율을 기아와 교육, 기후위기 대응에 쓰도록 기금을 만들자”고 한 말을 주목할 만하다. 부국과 부자들이 만든 기후위기라는 빚을 빈국과 빈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부조리를 해소하는 일이 무기 감축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말했다. “희년은 이 해가 진정으로 복된 해가 되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재생, 세계의 전환을 요구한다.” “산발적인 인류애 행위로는 충분치 않다. 지속되는 문화적· 그리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말은 자본주의와 현실 국제정치 속에서 별로 힘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양심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구라는 ‘공동의 집’을 이만큼이라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25년 만에 다시 맞는 희년의 길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25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다. 이젠 '잘살아 보세'식 성장론은 멈추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안식제도를 이용해 약자들이 다시 기회를 갖는 제도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욕구를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탐욕까지 셋으로 나눈다. 배고프면 먹고, 배움에 목마르면 교육받고, 아프면 치료받는 기본적인 욕구는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보장받아야 한다.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상대적인 욕구는 회사에서 벌어들인 총량이 같더라도 내가 남보다 좀 더 갖고 싶은 욕구이니, 이건 갈등을 두려워 말고 지속 가능성을 위해 타협하며 분배하면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욕구조차 못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혼자 다 차지하겠다는 탐욕은 개인도 망치고 시화도 망친다. 그러니 개인은 절제해야 하고, 국가는 제도로써 이를 금지해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기억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구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구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다.

•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욕구로 식사나 성적 욕구와 같은 감정들이다. 이런 것들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절제하고, 제어해야 한다.

• 자연스럽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력(財力)이다.

우리는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 속의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이다. 그에 따르면 고통과 근심의 원인은 자연스럽지 않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걱정거리를 없애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개인적인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욕구, 욕망과 욕심은 다르다.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것이라면, 욕망은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것 또는 그 마음이고, 욕심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사주 명리학에서는 인간 욕망의 범주를 '재색명리(財色名利)', 돈과 색 그리고 명예와 돈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재다신약(財多身弱)'이란 팔자가 나온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진다'는 의미이다. '재다신약' 팔자를 가진 사람이 돈이 들어 오는 운을 만나면 죽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감방, 부도, 이혼, 암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두세 개가 동시에 걸리는 수가 생긴다.

"재다신약'은 돈 들어오는 해가 가장 겁나는 해라 한다. 그리고 '관고신약(官高身弱)'이란 말도 있다. '벼슬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돈 많고, 지위가 높다고 부러워 할 일 아니다. 이런 팔자를 가진 사람이 명을 오래 이어가려면, 책과 공부 그리고 '호학지사(好學之士)'를 가까이 하라고 한다. '호학(好學)'이 자기 몸 약한 부분을 보강해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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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