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작가, 크리에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서울대 미술관 심상용 관장을 만나다... 생성형 AI 시대 예술의 태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심상용 교수를 만났다. 그는 현 서울대 미술관 관장이다.

나는 2021년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일컫는 일련의 AI(Artificial Intelligence)를 수용한 미술적 또는 사진적 구현과 재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최초로 갤러리에서 가상화폐(비트코인, 이더리움, 도지)를 통한 미술품 결재 시스템과 NFT 유통 단계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 최초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새로운 시도에 관심이 상당히 있었다.

어쨌든, 생성형 모델(Generative Model)에 관련하여 그 기반이 되는 ‘VAE’나 ‘GAN’ 또는 ‘StyleGAN3’나 ‘Diffusion-Models’를 통해 내린 명령이 이전의 프로그램보다 더 정확한 이미지를 출력하는 응용 과정을 실험했다. 기술적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어떤 종류의 실험이던 실험이라고 하는 것은 느리고 답답하고 많은 노동력을 갉아먹는다. 사람들은 현재의 인공지능이 명령만 내리면 무엇이든 척척 내놓는 걸로 생각하지만, 부시맨의 콜라병처럼 한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물건은 아니다.

나는 한국에 생성형 인공지능이 잘 알려지기 전인 초창기 ‘Midjourney AI’ 베타테스터로 커뮤니티의 실험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Adobe에서 야심 차게 준비하던 ‘Firefly’ 역시 베타테스터로 참여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과학자와 기술자들만의 노력으로 발전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에 참여하며 알게 되었다. 거기엔 적극적 ‘user’ 층과 연구자와 다름없는 커뮤니티의 실험과 검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기의 생성형 인공지능은 사실 처참한 수준이었다. 인간이 ‘의도한 프롬프트(text-to-image)’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고 명령의 결과를 정확하게 구현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 이런 멍청한 물건이 도대체 어디에 쓰일까 싶을 정도였다. 쉽게 예를 들자면, 고양이 실물 사진과 고양이를 간단하게 선으로만 표현한 캐리커처를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24시간 잠들지 않고 학습하는 AI의 환경이나 능력, 그 과학적 생태계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놀라운 기술적 성과와 AI 진화의 결과를 마침내 꺼내 놓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인간의 전통적인 창작과 AI의 창작(?)이 다투는 시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왼쪽)과 생성형 AI가 현실의 인물로 만든 우체부 룰랭(오른쪽). [사진 이홍석]


현재의 생성형 AI 기술은 2013년 디데릭 킹마(Diederik P. Kingma)의 논문에 ‘VAE(Variational Autoencoder)’가 발표되고 불과 1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술적 특이점'인 임계점의 목전까지 도달했다. 인간의 지능을 기술적 지능이 뛰어넘는 지점을 AI의 임계점이라 하는데, 그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현재의 AI,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ANI(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를 뛰어넘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와 또다시 이를 뛰어넘는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가 등장하게 될 기술적 특이점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사실 혼재된 시대.

간단히 설명하면 ANI는 협소한 인공지능으로 아직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지 못한 상태이지만, AGI 단계에 이르면 인간과 같은 일반 지능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지적 수행 능력과 AI의 능력이 서로 구분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고 ASI는 심지어 인간을 초월한 지능을 갖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머지않은 미래에 많은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때까지 마련되지 않은 기술과 인류 사이를 조정할 새로운 법과 제도 그리고 AI 시대에 맞는 상식과 같은 것들이 기존의 인류가 고수해왔던 많은 전통적인 것들과 충돌할 것이다.

현재 창작이 관여하는 예술에서 AI의 사용에 대한 미숙한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측 가능한 미래의 혼란이다. 기술은 통상적으로 예술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기술의 통상적 태도다. 하지만 예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태도이지만, 급변하는 그러나 너무도 체계적인 21세기 기술의 습격에 대비하여, 준비하지 않고 그것을 타박만 하려고 하는 것은 예술의 이해가 자신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될 수 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 소장된 고흐의 작품 ‘우체부 룰랭’(왼쪽)과 생성형 AI가 현실의 인물로 만든 우체부 룰랭(오른쪽). [사진 이홍석]


솔직히 현재의 예술이 과거의 예술만큼 치열한 연구가 없다는 것, 발상의 전환이 없다는 것, 창작의 거버넌스가 이데올로기처럼 변질하였다는 것에 예술계 학자들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그 점에서 서울대 심상용 교수와 나는 짧은 만남에서 '뒤샹(Marcel Duchamp)'의 위대한 반란, 그러니까 1917년 R. Mutt의 이름으로 발표한 <샘> 이후에 100년이 넘도록 전 세계가 그에 매몰되어 미술적 진지함(연구)을 잃어버린 것, 내재적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 미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뒤샹 이후, 개념에만 도취 된 미술 행태를 비판할 수 있는 학자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서울대 미술관 심상용 관장과 나는 AI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인간이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큰 방향은 같았으나 세부적 쓰임에 대해서는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있겠다는 말을 그가 남겼다.

어쨌든 다행한 것은 미술학자들도 AI의 담론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AI의 역할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다. 2024년 부산문화재단에서 우수예술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AI와 사진의 미래'라는 프로토타입의 개인전을 열었고, 전시된 모든 작품은 생성형 AI를 통해 구현했다. 물론 생성형 인공지능에만 맡기고 화자인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심상용 교수는 이를 'AI의 기여도'라 표현했다.

여기서 우려되는 문제는 AI의 '임계점'이 곧 들이닥칠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협소한 인공지능으로 창작한 현재의 창작물에 대해서도 음악, 영화, 미술 모든 영역에서 다툼이 있다. 전자에도 말했지만, 이는 새롭게 등장한 기술과 ‘핸드메이드(handmade)’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전통과의 충돌이다. 뒤샹을 빌리면, 107년 전 이미 미술의 전통적·심리적 '핸드메이드(handmade)'는 '레디메이드(Ready-made)'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받은 바 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일사불란하게 뒤샹을 추종하는 현대 예술가들의 나태와 이기가 다시 비판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2023년 생성형 AI로 제작한 작품 ‘The Life of Tree’(왼쪽)와 실제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에게 설명하는 도슨트(오른쪽). [사진 이홍석]

예술이 인류사에 있어서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함의(含意)다. 그러나 함의가 어떤 개인들에겐 항상 옳은 것도 아닐 것이다. 보편적 함의가 그럼에도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인류가 만든 정상적(이것도 의심되어야겠지만) 사회가 다수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단순한 기호나 취미가 아니다. 이를 업으로 삼은 자들에겐 더더욱 그렇다. 기호나 취미로서의 예술은 그것이 사회에 구현하는 일종의 긍정적 파편이다. 예술은 제도와 정치보다 앞서고 종종 교육과 상식에 앞선다. 앞선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나 위치가 아니라 태도다. 과거이자 현재의 것들이 미래이자 새로운 것들과 마주할 때 예술은 늘 고민하고 그 시대의 담론을 형성하며 길을 모색한다. 예술은 때로 철학보다 앞서 인류를 이끌며, 그것의 빛나는 윤슬을 사회구성원들이 감상하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거대한 함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신념을 잃고 인기와 명예에 혼탁해지면, 과도한 아트페어와 비엔날레, 각종 경매에서 예술을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하면 문화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본이 끼어들어 오염시킨 현대 예술의 파행이 낳은 파급을 대게는 침묵으로 동조하거나 심지어 모르는 척하고 있다. 잘 못 가르친 현대 예술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시대다. 예술이 스타를 만들기 위해 자본의 개입을 너무도 쉽게 허락하는 시대다. 다행히 창작에 있어서 일부 문학은 그나마 건강하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패배주의가 만연하는 한국 문학의 허약한 체질이 AI의 창작에 직면한 위기를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시 AI에 패배를 선언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2024년 생성형 AI로 제작한 작품 ‘Anthropocene’(왼쪽)과 우수예술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전시 중인 장면(오른쪽). [사진 이홍석]

나는 젊은 작가들을 지도(?)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심사할 때, 대개 그들에게 묻는다. 작가로서 당신은 이 사회의 리더인가 아니면 팔로워인가? 임계점을 넘은 미래의 AGI나 ASI는 인간에게 나와 같이 물을 것이다. 그것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당신은 리더인가 아니면 AI의 팔로워인가?"

창작이 ‘심리적 핸드메이드 상태(psychological state of handmadeness)’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역으로 우려하는 그것들의 지배 상태에 놓일 것이다. 나는 필름으로 사진을 시작한 세대였지만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자 누구보다 빨리 그 새로운 도구와 창작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당시 각종 사진 심사에서 디지털 사진은 출품을 불허한다는 것이 한국의 우스꽝스러운 사진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촌극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AI를 도구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는 작가 개인의 몫이다. 그러나 AI를 통한 창작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필름과 디지털의 다툼처럼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2022년 광주아트페어에 내가 출품했던 프로토타입 AI 회화를 휠체어에 앉아서 바라보던 지체 장애가 있는 소년에게 내가 했던 약속, 소년의 용기와 상상력만 충분하다면 그리고 앞으로 더 편리하게 구현할 수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지면 그도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 거라 말했던, 나의 그 간절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022년 생성형 AI로 제작한 작품 ‘Swimming Pool’(왼쪽)과 전신지체장애를 가진 소년에게 희망을 준 전시풍경(오른쪽). [사진 이홍석]

동생의 휠체어를 밀던 스무 살 남짓의 형은 내게 몇 번이고 물었다. 진짜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이미 그런 세상이 수년 만에 성큼 도래했다. 그 소년이 꼭 화가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내가 AI의 유용성에 가치를 두는 태도다. 창작의 밥그릇 싸움이 아닌, 예술이 진정 인간을 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Web 3.0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예술도 이제 생산자와 유통의 경로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예술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생산하고 유통하고 그것의 권리를 인정받는 시대가 온다면, 그 시대마저도 예술가들은 앞설 수 있는 지적 존재가 되어야 하기에.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전대미문 창작의 풀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 그것은 곧 넘쳐흘러 21세기 전통을 유지하려던 예술을 덮칠 것이다. 덜 숙련되고 쉽게 생산되고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 치부하기엔 파급력이 클 것이다. 아무리 중국을 탓해도 저가의 중국산 제품들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갈수록 정교해지며 AI가 이끄는 대량 창작의 시대를 직면한 예술가들, 그렇기에 더더욱 예술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서울대 미술관 심상용 관장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