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웅 중구난방] 트라우마는 왜 지워지지 않을까
1978년에 상영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Deer Hunter)』는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에 빛나는 미국영화이다. 당시 반전(反戰), 인종차별 문제 등으로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무려 3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매우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영화로 많은 시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이 영화에 ‘러시안룰렛’이 등장한다. 알다시피 룰렛(roulette)은 카지노에서 36개의 숫자가 적힌 둥근 판을 돌린 뒤에 주사위를 던져놓고 숫자판이 멈췄을 때 주사위가 놓여있는 숫자를 맞춘 사람이 여러 경우에 따라 큰 배당을 받는 게임이다.
하지만 ‘러시안룰렛’은 그것과는 좀 다르다. 총알 6개가 들어가는 권총의 탄창에 한 개의 총알만 넣어놓고 탄창(실린더)을 돌린 뒤,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숨막히는 죽음의 게임이다. 총알이 발사돼 머리에 맞고 죽을 확률이 6분의 1이다. 강압에 못 이겨 ‘러시안룰렛’을 해야 할 경우 방아쇠를 당기기 전 그 충격과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같은 고향, 같은 직장에 다니던 세 친구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베트콩의 포로가 되어 그들의 가혹한 고문으로 ‘러시안룰렛’을 하고 난 뒤, 처절하게 피폐되어 가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약 30%가 전쟁 후유증, 즉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한다. 여러 영화들에서 그들이 알콜중독, 마약중독, 정신분열, 살인을 비롯한 범죄행위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주며 트라우마가 얼마나 무서운 정신질환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서 ‘트라우마(trauma)’는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일어나는 정신적 외상(外傷)으로 정의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충격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했을 때 강렬하게 느낀 마음의 상처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게 되는 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쟁이나 쓰나미, 지진, 화산폭발,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해, 대형사고 등을 비롯해서 신체손상을 입었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충격이 대표적이다. 자기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목격했다면 그 충격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남에게 심한 폭력을 당했다거나 강간 등, 성폭행을 당한 경험, 부모의 이혼 등 불완전한 가정, 부모, 형제, 일가친척으로부터 상습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받았다거나 집단따돌림을 당했던 경험, 집에 불이 나서 크게 놀랐던 경험 등이 모두 트라우마가 된다.
어린아이가 무심코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댔다가 깜짝 놀라고 나면 여간해서 주전자에 손을 대지 않는다. 개한테 물린 경험이 있으면 강아지도 피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에 대한 누군가의 치욕적인 말 한마디에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은 사소한 트라우마지만 잇따라 경험하거나 자꾸 쌓이면 큰 트라우마가 된다.
트라우마에는 일시적 트라우마가 있고 장기적인 트라우마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박혀 꿈에 나타나거나 툭하면 머릿속에 떠올라 큰 고통을 겪게 된다. 한동안은 트라우마가 없었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도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트라우마가 지속되면 극심한 불안, 공포, 무력감, 자존감 저하, 수면장애, 우울증, 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 등에 시달리며 마약을 비롯한 약물을 남용하거나 느닷없이 분노를 폭발시키고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는 등,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우울증, 공황장애 등이 심해져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저명한 범죄심리학자인 컬럼비아 대학 마이클 스톤(Michael Stone) 박사가 수많은 흉악범들을 면담한 결과, 70% 이상이 어렸을 때 심하게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뿐 아니라 전체 인구의 약 8%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면 자신이 경험한 충격적인 기억들은 왜 사라지지 않고 트라우마가 될까? 또한 트라우마는 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반복되며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까?
미국의 심리학자인 바브 메이버거(Barb Maiberger) 박사는 그의 저서 『트라우마, 기억으로부터의 자유(Emdr Essentials; A Guide for Clients and Therapists)』에서 트라우마의 지속성에 대해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뇌는 특유한 방식으로 기억을 정리하는데 어떤 일은 차츰 잃어버리고 어떤 기억은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뇌가 그것을 정상적으로 정리하지 못해서 트라우마로 남아 뇌에 각인된다. 그리하여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되살아나 정상적인 사고
그는 이렇게 우리 뇌가 처리하지 못한 기억을 뇌과학자들이 ‘얼어붙은 기억’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얼어붙은 기억’은 자기 자신과 세상 그리고 앞날을 바라보는 시선을 왜곡시켜, 자존감을 크게 떨어뜨리거나 심한 감정기복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 때문에 우울증, 절망감, 공포, 과도한 긴장, 자살충동, 수면장애 등을 겪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자신의 뇌가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이 경험한 것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곧 잊어버리는 것도 있고, 가끔씩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도 있으며,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더욱이 우리 한국인은 쉽게 잊는 편이어서 아무리 슬픈 기억도 한 달만 지나면 잊어버린다고 한다.
우리 뇌가 많은 경험을 잊어버려야 마음이 편해지고, 또 새로운 경험들을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의 객관적인 크기나 심각성보다 인간 개개인이 자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뇌의 기억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비정상적인 것과 맞부딪쳐도 불현듯이 ‘얼어붙은 기억’이 되살아나서 트라우마가 지속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트라우마를 겪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은 왜 그럴까? 그들은 충격적인 경험이 전혀 없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정신적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트라우마가 생기는 주요 원인이 정신적 외상 이외에 또 다른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관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트라우마가 유전적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도 배제할 수 없다. 부모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면 자녀에게도 트라우마가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외적인 환경과 사회적 상황 등도 자신의 ‘얼어붙은 기억’을 되살려내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불안과 불확실성이 우울증, 불안장애 등의 정신질환으로 발전하고 그것에 지난날의 충격적이고 나쁜 기억들과 겹쳐 심각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치유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조기 판단이 중요하다.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판단되면 하루라도 빨리 전문가와의 대화와 상담, 약물치료, 정신치료 등으로 상당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바브 메이버거는 트라우마 치유방법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를 개발해서 큰 효과를 얻고 있다. 대체적으로 특별히 고안된 안구(眼球)운동 등을 통한 트라우마의 강력한 치료법인데 효과가 빠르고 재발률이 낮을 뿐 아니라 부작용이 적어서 트라우마 치유에 가장 우수한 치료법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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