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고독한 세상의 연결자-고흐와 룰랭의 상속
우체부 조제프 룰랭(Joseph Roulin, 1841~1903)은 남프랑스 예술의 도시 엑상프로방스에 인접해 있는 ‘랑벡(Lambesc)’에서 태어났다.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아내 오귀스탱 알릭스(Augustine-Alix Pellicot)도 랑벡 출신으로 이들은 단란한 노동자 계급의 가정을 이루었다.
이후 조제프는 아를(Arles)의 기차역에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1888년 아를로 이주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곧바로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고흐의 찬란한 작품들이 꽃피었던 아를 시기에 룰랭과 그의 가족은 삶의 따뜻한 동반자였으며, 무엇보다 초상화에 열정을 품고 있던 고흐에게 헌신적인 모델이 되어주었다.
초상화를 위한 모델을 구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가난한 고흐에겐 그가 열망하고 있던 초상화를 그릴 좋은 기회였고, 우키요에(浮世絵)의 영향으로 자포니즘(Japonism)에 심취해 있던 그에게 룰랭과 그의 가족들의 인상적이고 다양한 모습은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룰랭은 고흐와 자주 술을 마셨으며 그의 가족들은 고흐를 식사에 초대하곤 했다.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이었던 동생 테오와 주고받는 편지들을 룰랭이 전달했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룰랭을 소크라테스에 비유하며 "그는 모진 성격이 아니고 우울하지 않으며 철저하지도 않다. 그는 행복하지 않으며 항상 완벽할 정도로 정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영혼이 선하고 감정이 충만하며 신뢰가 가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했다.
고흐가 행복했던 최고의 시기와 고갱과의 불화 이후, 아를의 병원에 입원했던 가장 힘든 시기를 룰랭이 함께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 애틋한 인연은 안타깝게도 룰랭에게 내려진 전근 명령으로 그가 마르세유(Marseille)로 떠나며 막을 내렸다.
나는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 여섯 점 남짓의 조제프 룰랭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고흐 그 자신의 초상화보다 더 강렬하게 이끌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고흐의 초상화에 대한 열망은 무엇을 향했을까? 룰랭은 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룰랭은 왜 기꺼이 고흐의 그림이 되었을까?
"the only thing in painting that excites me to the depths of my soul, and which makes me feel the infinite more than anything else." - Vincent van Gogh
고흐는, 초상화 연구에 대해 그림은 자기 영혼의 깊은 곳까지 자신을 흥분시키고 다른 무엇보다도 무한한 것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다시,
"in a picture I want to say something comforting as music is comforting. I want to paint men and women with that something of the eternal which the halo used to symbolize, and which we seek to communicate by the actual radiance and vibration of our colouring." - Vincent van Gogh
음악이 위로를 주는 것처럼 그림으로 위로를 주고 싶다. 후광이 상징하는 영원한 무언가를 남성과 여성에게 그리고 싶고, 색채의 실제 광채와 진동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영혼, 위로, 후광의 상징, 영원, 여자와 남자, 진동 그리고 전달과 같은 언어들이 고흐가 룰랭과 그의 가족들을 그리며 남겼던 말의 흔적이다. 아를에서 그의 그림은 더욱 미묘한 조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1888년 아를로 이주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룰랭을 통해 그는 19세기에서 21세기인 현재로 그리고 더 먼 미래까지 인간이 무엇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각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혹시 편지를 쓴 것은 아닐까?
룰랭의 초상화는, 그리고 고흐 그 자신을 포함하는 그의 모든 초상화는 편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언어다.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음악처럼 세상을 위로하며 빛내고 진동하는 색채이며 광채이자 이는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하는 아름다운 언어다. 나는 이 어려운 시절에 룰랭의 초상화를 꺼내 보며 이렇게 단정 짓고 말았다.
마침, 작가 한강이 어제 스톡홀름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에 고흐의 색채와 광채의 진동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다"며 "이러한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문학에서 제기되어 왔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우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질문했다.
그에 이어 "가장 어두운 밤에도, 언어는 우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묻고, 이 행성에 사는 생명체의 관점에서 상상하기를 고집한다"며 "언어를 다루는 문학 작품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갖고 있으며 이를 읽고 쓰는 행위는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라 했다.
19세기 고흐와 룰랭도 그들이 태어난 이유를 알고 싶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자 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 19세기에서 보낸 그들의 편지를 받았다. 미술품으로서 고흐의 걸작이 아닌, 걸작에 협력한 룰랭의 단순한 친절이 아닌, 그들이 함께 남기고자 했던 사람의 따뜻한 체온과 그 아름다운 영혼의 진동이 색채와 광채로 미술의 언어로 시대를 넘어 전달하고자 했음을.
안녕! 룰랭 씨
이쯤에서 나는 고흐의 그림 안에서만 보았던 아를에 살았던 룰랭을 실제로 만나고 싶었다. 마침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대다.
며칠 동안 작업실에서 나는 수많은 룰랭을 소환했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 세상은 민주적 언어를 포기한 자들로 인해, 겨울에 거리로 내몰린 시민들의 시름만 더 깊어져 가고 있다. 커피를 스무 잔 정도 마시며 사흘 정도를 보내고 마침내 나는 미소 짓고 있는 룰랭 씨를 만들었다. 아니 그를 만났다.
생성형 AI에 수많은 언어를 전달했다. 아무리 정교하게 프롬프트를 짜고 레퍼런스를 주어도 우체부의 모자와 제복 때문에 인공지능은 끝없이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인물들을 만들어 냈다. 러시아 장교나 무솔리니 같은 자들이 튀어나왔다. 무솔리니는 고흐와 룰랭의 아름다운 시절인 1888년 겨우 다섯 살이었으나 후에 나치와 협력하여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의 악마가 되었다.
우리의 언어가 좀 더 아름다웠더라면 인공지능도 이렇게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악인을 뱉어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게 아니라고 계속해서 명령을 입력했지만, 나의 화만 커질 뿐, 그러나 나는 끝까지 인내심을 잃지 않고 더욱더 아름다운 언어로 룰랭 씨를 만나야 했다.
마침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수많은 존재의 그림자로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언어로 이어진 룰랭 씨가 나의 모니터 화면에 환하게 웃으며 등장했다. 순간 복받쳐 오르는 감정, 고흐의 시대에 연결되었다. 룰랭 씨를 만났다. 중학생 때 처음 고흐를 알게 되었고 40년이 넘도록 나를 오묘한 감정으로 이끌었던 우체부 룰랭 씨.
이렇게 우리는 만난다. 기술도 결국 언어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작가 한강 그의 말처럼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님을 원하거나 인간일 것을 포기할 때, 세상은 얼마나 거대한 고통에 빠져 신음하였던가? 내 안에서 조각나고 무너져 가던 인간의 언어가 다시 돌아온다. 영혼이 체온이 빛이 색채가 진동이 전달된다. 고흐의 메시지가 룰랭의 아우라를 통해 이 시대로 돌아온다.
나쁜 말을 전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 더는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에 쉽게 내뱉는 나쁜 언어들. 가령 계엄. 인류는 지금보다 더 고급해야 한다. 끝내 나쁜 것만 학습한 AI를 설득하여 아름다운 룰랭 씨를 만난 것처럼 날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더 익숙하여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남길 유일한 상속이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개인과 사회, 아름다움에 익숙한 국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