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인간의 욕구
(2024년 12월 1일)
12월만 되면, 내가 늘 소환하는 시를 공유한다. "12월의 독백"이다.
12월의 독백/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
오늘은 12월의 첫날이며,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대림(待臨)이라는 말은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온 것이다. 이 대림 시기의 첫 주일부터 한 해의 전례 주년이 시작된다. 곧 교회 달력으로는 대림 제1주일이 새해의 첫날이다. 그리스도의 '상생'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절기이다. '강생'은 하느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가리킨다. 영어로 incarnation이라 한다. 하느님의 공현(에피파니, epiphany)이라고 믿는다. 나는 대림 시기를 위로의 새로움과 기뻐하는 기대로 보내고 싶다. 대림 시기는 위로와 희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죽은 줄 알았던 것이 눈앞에 다시 등장하는 신적인 현상인 ‘에피파니(epiphany)'다. 사실 우리의 몸 안에서도 천지개벽 하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우리는 인식하려 하지 하고 매일 똑같은 날들로 소일한다. 신은 인간에게 24시간이란 하루를 공평하게 선사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一生)이고 어떤 사람에겐 찰나(刹那)이다.
대림시기는 바로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와 극기, 회개(Metanoia)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며 " 당신은 하늘을 뚫고 내려오십시오"하고 기도하고 있다. 대림 시기동안 교회는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기도, 단식, 자선의 행위를 적극 권면하고 모든 신자들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연대 의식 속에 몸과 마음을 정리하여 주님을 기다리기에 합당한 준비를 한다.
2025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이다. 이젠 '잘살아 보세'식 성장론은 멈추어야 한다. 유대인들의 안식제도를 이용해 약자들이 다시 기회를 갖는 제도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의 희년(禧年) 제도(Jubilee) 같은 것을 말한다. 희년은 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를 말한다.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이 때가 되면 노예를 석방하고 매매했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는 단어가 뜻하는 바 그대로, 현재의 가난과 고통이 대를 이어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현재 우리 사회는 가난과 고통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없으니 차라리 세대를 잊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0%대의 출생률로 떨어졌다. 수치이다. 그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빨간 불이다.
우리는 욕구를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탐욕까지 셋으로 나눈다. 배고프면 먹고, 배움에 목마르면 교육받고, 아프면 치료받는 기본적인 욕구는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보장받아야 한다. 기본적 욕구조차 충족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상대적인 욕구는 회사에서 벌어들인 총량이 같더라도 내가 남보다 좀 더 갖고 싶은 욕구이니, 이건 갈등을 두려워 말고 지속 가능성을 위해 타협하며 분배하면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욕구조차 못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혼자 다 차지하겠다는 탐욕은 개인도 망치고 시화도 망친다. 그러니 개인은 절제해야 하고, 국가는 제도로써 이를 금지해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기억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구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구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다.
•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욕구로 식사나 성적 욕구와 같은 감정들이다. 이런 것들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절제하고, 제어해야 한다.
• 자연스럽지도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력(財力)이다.
우리는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 속의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이다. 그에 따르면 고통과 근심의 원인은 자연스럽지 않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걱정거리를 없애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개인적인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욕구, 욕망과 욕심은 다르다. 욕구는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것이라면, 욕망은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간절하게 바라는 것 또는 그 마음이고, 욕심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사주 명리학에서는 인간 욕망의 범주를 '재색명리(財色名利)', 돈과 색 그리고 명예와 돈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재다신약(財多身弱)'이란 팔자가 나온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진다'는 의미이다. '재다신약' 팔자를 가진 사람이 돈이 들어 오는 운을 만나면 죽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감방, 부도, 이혼, 암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두세 개가 동시에 걸리는 수가 생긴다. "재다신약'은 돈 들어오는 해가 가장 겁나는 해라 한다. 그리고 '관고신약(官高身弱)'이란 말도 있다. '벼슬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돈 많고, 지위가 높다고 부러워 할 일 아니다. 이런 팔자를 가진 사람이 명을 오래 이어가려면, 책과 공부 그리고 '호학지사(好學之士)'를 가까이 하라고 한다. '호학(好學)'이 자기 몸 약한 부분을 보강해 준다는 것이다.
세계 증산 층들의 기준이 다르다. 한국은 '30평 이상 아파트, 1달 월급 5백만원, 자동차 2.000cc, 예금 잔액 1억원, 해외 여행 매년 1회'라야 중산층이라 한다. 그런데 영국은 '페어 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자적으로 행동 하지 말 것'이고, 미국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약자를 도우며 불의에 저항하고, 테이블에 정기 구독지가 놓여있음'이며, 프랑스는 '외국어 하나 구사,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다를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남다른 요리를 할 줄 아는 것'이라 했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되었던 이야기이다. 선진국에 비교해 한국은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 그저 물질적인 것만 바라 보지 말고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좋겠다. 잘 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목표와 노력, 올바른 생각과 긍정적인 자세로 이웃과 가난한 사람들에 베풀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잘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대림 시기에 기도안에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이 아닐까?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프란체스코 교종의 말씀을 공유한다. 오늘 아침 민들레 국수집의 이종 사촌이 페북에 올린 글이다. "가난한 이들, 이주민들, 병자들, 죄수들, 사회에서 가장 작고 잊힌 이들과 함께 머무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는 걸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가장 취약한 형제자매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맞이 할 예수님은 고통받는 낯선 이웃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 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든가, 헌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 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 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 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 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님의 모습만이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우리 주위에서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그런 존재 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고아들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그 미물은 그냥 지나치면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그 대상이 신적인 존재, 즉 거물이 된다.
‘낯선 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나 생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수일 수도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만나 밤새 씨름한 무명의 낯선 자는 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얌체’를 의미하는 ‘야곱’이 아니라 ‘신과 씨름 하여 이긴 자’인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을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님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님이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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