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준 종횡무진] 나는 죽음 앞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타인 앞에 던져진 존재다.
김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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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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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준 종횡무진] 나는 죽음 앞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타인 앞에 던져진 존재다.
: 레비나스 내 맘대로 읽기/ 이창준
인간은 자연이 주는 요소들을 향유한다. 나아가 노동과 소유를 통해 자기를 옹립한다. 하지만 노동과 소유는 타자에 대한 착취가 있다. 음식을 섭취하고 물건을 만들고 주거공간을 짓는 행위는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고 보존하기 위해 타자성을 없애고 내 것으로 동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동과 소유를 통해 동화와 흡수에 충실함으로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하지 못한다. 레비나스는 이를 창문없는 단자(monad), 고독이라고 말한다. 이 고독은 분명 안온함이고 친밀함이고 행복이지만, 동시에 지겨움이자 역겨움이자 어리석음이 된다. 그때 우리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 타자와 맞딱뜨림으로써 자신의 고독, 즉 자신의 내면성에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나와 다른 것, 가늠할 수 없는 것과의 충돌이다. 타자와의 만남, 그 얼굴과의 만남은 마법이고 신비이며 마침내 나를 끝없는 탐구와 욕망으로 이끈다. 내게 없는 것,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그에게 응답하는 존재, 책임(responsibility)을 진 윤리적 존재로 변모한다.
타자와의 만남는 죽음 앞에 던져진 나의 사멸성을 극복하게 해준다. 경험할 수도 없는 죽음 앞에 자신을 던져 놓는 일은 우리를 끝없는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지만, 타인 앞에 던져진 나는 고독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마법과 신비의 세계로 들어선다. 나의 유한함은 타인과 만남으로써 무한함과 만난다. 타인은 일방향으로 흐르는 역사적 시간을 멈춰 세우고 절대의 시간을 선물한다.
타인을 마주한 시간은 타인의 얼굴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타인의 얼굴과 말은 어떤 주제에 대한 표현이고, 표현은 무언가를 ‘의미함’이다. 말과 얼굴의 의미함은 나의 모든 의미부여에 앞선다. 어떤 신비, 어떤 무한의 계속되는 누출이며, 아직 내게 오지 못한, ‘아직 아님’의 상태의 지속이기 때문이다. ‘아직 아님’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금 여기에 누적되는 현전(presence)의 시간이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타자에게 받쳐진 상태가 될 때, 우리는 죽음을 향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 맞선 존재가 된다. 이것은 오로지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말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중심의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책임있는 윤리적 주체가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홀로있는 시간에 있을 수 없다. 타인의 말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만이 죽음의 공포를 떨치는 절대의 시간이다. (출처 이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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