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맥주의 여행, 세 번의 비자 발급
가까운 산에서 ‘트레일 러닝’을 뛰고 난 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은 역시 여름이다. 그러나 그건 ‘라거(lager)’일 때 좀 더 어울리는 이야기다.
가을이 되면 본격적으로 ‘에일(ale)’ 맥주의 풍미가 극대화되는 시기다. 1810년부터 맥주 종주국 독일 뮌헨에서 연간 700만 명이 찾는 전 세계 최대의 맥주 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해마다 가을이면 개최되고 있다.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 2022년 기준 맥주 시장의 크기 7,210억 달러(약 천조 원) 규모의 거대한 세계, 이런 맥주에 대해 정보를 조금만 알고 마셔도 수제 맥주(craft beer) 전문점이나 일반 펍 또는 심지어 동네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조차 대화할 때 사람이 더 근사해 보이는 ‘맥주의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는 식도락에 대한 묘사가 많다.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음식과 함께 어김없이 맥주를 즐겨 마시는데 이 또한 그의 작품에 설치된 장치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정작 하루키 자신도 맥주 애호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자신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맥주를 좋아하고 조개를 먹지 않는 보통 남자’라고 소개할 정도다.
의외로 조개를 먹지 않는 남자들이 많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에서 맥주를 단순하게 술을 마시는 행위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덩그러니 상정된 한 인간의 무기력함이나 상실된 일상 또는 그사이의 고독감을 채워주는 하나의 상징적 물질로 성의껏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키는 좀 더 나이 들어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술의 신선함과 현장의 아우라를 생각한다면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기원전부터 시작된 맥주의 긴 여행 이야기를 빼놓고 맥주 그 자체를 설명할 길은 없다.
맥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일본 맥주의 발생 시기는 전체 맥주의 시간 여행에서 가장 최근의 일이다. 맥주 좋아하는 하루키를 인용하였기에, 예의 일본의 맥주 형편을 먼저 살펴보자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 초기 나카가와 세이베(中川清兵衛, 1848~1916)라는 선구적 인물이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맥주 양조장에서 양조법을 배운 뒤, 1876년 홋카이도에 세운 ‘개척사 맥주 주조소’가 지금의 ‘삿포로 맥주’의 전신이 되었다.
또 하나 일본을 대표하는 맥주 회사는 ‘기린 맥주’인데 재밌게도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William Copeland, 1834~1902)라는 역시 선구자적 인물이 1870년 ‘스프링 밸리 양조장(Spring Valley Brewery)’이라고 요코하마에서 문을 연 것이 그 기원이다. 여기서 잠깐, “아아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부루 라이토 요코하마 와타시니 쿠다사이 아나타카라)”, 모친이 젊어서 즐겨 부르던 일본 대중가요다.
삿포로 맥주는 ‘나카가와 세이베’에 의해 독일식 맥주 양조법(물, 보리, 홉)을 따랐으며, 기린 맥주는 미국식 맥주인 ‘부가물 맥주(adjunct beer)’ 양조 방식을 따랐다. 옥수수, 쌀, 호밀, 귀리, 밀과 같은 부가물을 첨가하는 것이 바로 부가물 맥주인데, 생산비 절감을 위해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맥주가 되었다.
일본에선 한편, 맥주 제조에 가장 중요한 맥아를 줄이고 심지어 물을 타서 그 밋밋한 맛을 감추려고 탄산을 때려(?) 넣은 엽기적 제품을 ‘드라이 또는 슈퍼드라이’라고 판매한 작은 맥주 회사가 있었는데, 그게 시장에 먹혀 뜻밖에도 부도 위기에서 벗어난 일화를 가진 ‘아사히 맥주’가 있으나 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맥아 함량이 기준치 이하로 떨어지면 법적으로 맥주가 아니라 일본에선 발포주(한국에선 기타 주류)에 해당한다. 맥주는 보편적으로 맥아가 67.7%를 넘겨야만 맥주로 정의된다. 이후 아사히 맥주는 한국 맥주 회사들이 물을 타고 탄산을 때려 넣는 엽기행각을 본받게 만든 좋지 않은 선례를 만들었다.
현재 한국은 맥아를 줄인 일본산 수입 맥주들 때문에 1999년 12월 개정된 주세법에 따라 맥아 10% 이상이면 맥주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면죄부 아닌 면죄부를 줬었는데, 결국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국 맥주가 맛이 없어졌다는 더 큰 오해와 불신을 조장한 셈이다. 최근 국내 맥주 회사들은 맥아를 최소 70% 이상 쓰고 있다며 언론을 통해 항변하지만, 세계 맥주 시장에서 여전히 품평이 나쁜 데에는 그 의심의 여지를 지우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 맥주의 역사는 사실 알고 보면 썩 편한 내용이 아니다. 맥주 종주국에서 직접 배워 온 것도 아니고 그들이 설립한 것도 아니어서, 1933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삿포로 맥주는 한반도에 ‘조선맥주’라는 자회사를 설립했고, 같은 해 1933년 일본의 기린 맥주 역시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쇼와기린맥주’라는 자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해방되면서 ‘조선맥주’는 지금의 ‘하이트맥주’로 ‘쇼와기린맥주’는 현재의 ‘OB맥주’가 되었다. 그러니 한국 맥주에서 근본을 이야기하기란 애매한 부분이 있다.
문명의 기원과 함께
기원전 6천 년, 농경사회가 시작된 메소포타미아에선 보리와 밀이 풍부했다. 보리는 쌀이나 밀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농경을 시작한 인류에게 매우 편리한 작물이었다. 하지만 보리는 알갱이가 거칠고 딱딱해서 그냥 먹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리를 단지에 넣고 발효시켜 빵을 만들거나 죽을 쑤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때 어떤 단지에 넣은 보리는 빵이 되지 못하고 상해서 액체가 되었다. 이를 먹어본 사람들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물질에 끌리게 되는데, B.C. 4000년 말기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문명의 절정을 꽃피운 수메르인(Sumerian)들에 의해 맥주는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인류가 만든 술의 탄생이 그렇듯 대게는 이런 우연한 자연 발효를 통해서 발견되는 일이 빈번하다. 맥주의 기원 또한 실패한 보리빵이나 죽에서 유래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맥주 생산 역사가들 사이에선 맥주가 어떻게 처음 발견되었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부는 빵이나 곡물 조각이 젖어 발효되기 시작한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역사가들은 맥주 생산이 수메르인들이 남긴 초기의 기술적 성과였으며 심지어 수메르 문명이 출현하기 전에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문명 초기의 원시 맥주는 지금의 맥주와는 매우 다른 형태여서 곡식을 담은 항아리 위에는 찌꺼기가 떠 있고 항아리 아래에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쓴맛이 나는 잔여물이 가라앉아 있었다. 심지어 걸쭉하기까지 하였다는데 이를 먹기 위해서 고대인들은 갈대로 만든 빨대를 이용했다.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의 증거는 B.C. 4000년 무렵의 수메르 석판으로, 항아리를 가운데 두고 갈대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다. 출토된 그 시대의 항아리에서도 맥주 성분을 검출하였다.
고대인들에게 맥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닌 그 이상으로 얼마나 유용한 수단이었는지, 당시 수메르의 노동자들은 임금을 매일 1ℓ의 맥주로 받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BC 1750)’에는 술집 여주인이 맥주 대금을 곡물이 아닌 은화로 받거나 질 나쁜 맥주를 손님에게 비싸게 팔면 ‘익사의 형’에 처한다는 법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물질을 섞는 행위도 처벌했다. 즉, 지금 현대의 일본식 맥주처럼 물을 타면 사형에 처했다. 그러니 아사히 맥주는 논외로 하는 것이다. 하루키가 아사히 맥주를 마실 리 없다는 작가적 믿음은 나의 생각일 뿐일까. 웃음.
어쨌든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맥주는 이집트까지 번졌고, 이집트에선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하루 4~5ℓ의 맥주를 제공했다. 당시에 여과되지 않은 맥주는 빵보다 더 많은 단백질과 비타민 B를 풍부하게 함유한데다가 높은 열량을 가지고 있어 노동자들을 위한 영양소 공급과 활력 증진에 일등 공신이었던 셈이다. 물론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은 덤이었을 것이다. 이후 이집트에선 왕의 무덤 내부에 포도주와 맥주를 채워 넣은 방과 심지어 양조 시설까지 만들었고 대중들에게도 맥주는 장례식의 필수품이 되기도 했다. 일반에선 벌레에 물리거나 상처 난 곳에 맥주를 바르기도 했고, 체하거나 위장병에 걸렸을 때도 맥주를 약으로 생각하고 마셨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벽화엔 맥주를 제조하는 장면들이 남겨져 있다.
빵으로 만든 최초의 맥주 크바스(Kvass)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출현하여 수메르에 의해 발전한 맥주는 이집트를 거쳐 유럽의 중심인 그리스와 로마에 전해진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그들이 마시던 포도주가 세상 최고라 여겼으며 맥주를 천대하였다. 그들이 야만족이라 무시하던 북유럽의 게르만족(Germani)에게 ‘너희들이나 마시라며’ 전달하였는데 여기서부터 진정한 맥주의 여행이 시작된다. 어쨌든 뜻밖에도 게르만족에게 전해진 맥주는 척박한 환경과 춥고 일조량이 부족했던 북유럽의 그들에게 천둥의 신 ‘토르(Thor, Donar)’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로마인들처럼 와인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때까지 달리 마실 것이 없었던 게르만족에게 맥주는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영혼의 음료였기 때문이다. 폭풍이 일고 천둥이 칠 때는 친근한 농민의 수호신이자 술고래였던 토르가 맥주를 만드는 것이라 여겼을 정도다. 목요일(Thursday)의 어원인 ‘토르의 날(Thor’s day)’에는 이들 게르만족이 삼삼오오 모여 어김없이 맥주를 마시지 않았을까?
한편, 토르가 만들었다는 원시 맥주를 현재에도 만드는 곳이 있는데, 게르만족 옆에 살던 슬라브족(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과 같은 슬라브어 계통을 쓰는 아리안 민족들)은 당시의 원시 맥주를 슬그머니 받아들여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크바스(Kvass)라 불리는 이 맥주는 호밀빵을 찢어서 발효시켜 만드는데, 맥주라 하기보다는 보리 음료 ‘맥콜’에 가까운 맛을 가지고 있다.
검은 기사 흑맥주의 등장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북유럽의 게르만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던 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의해 결국 멸망(로마 대약탈 410년)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리고 급격한 기후변화로 경작지를 잃은 다양한 시대적 사건들이 얽혀서 풍요로움 속에 와인을 사랑하던 로마의 운명과 척박한 환경에서도 맥주를 신의 선물로 여기던 게르만족의 처지가 서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유럽의 중심이라 자처하던 로마에 천대받던 맥주가 지금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술이 된 것이다. 드디어 맥주는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비자를 게르만족으로부터 발급받았다.
게르만에 의해 로마가 멸망하고 정치, 종교, 인문, 철학, 예술, 전쟁 등 정말 말 많고 탈 많은 중세시대가 열렸다. 중세시대는 암흑의 시대로 평가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혼돈 속에서도 게르만족이 사랑하던 맥주는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최고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당시의 수도사들은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지식층이었고 유럽 전역으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했다. 그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맥주 정보를 모으고 기록했으며 더 나아가 수도원에서 직접 맥주를 양조하며 발전시켜 나아갔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으며 맥주의 에르메스로 여겨지는 수도원의 맥주, 벨기에의 ‘베스트블레테렌12(Westvleteren12)’나 ‘레페(Leffe)’와 같은 맥주들이다.
당시 수도사들에겐 금욕적 요구가 엄격하여 하루 한 끼(수분 섭취는 허용)만 먹어야 했으며 심지어 사순절 기간엔 40일간 금식해야 했다. 이때, 흐르는 것만 먹을 수 있게 하였고 사순절 기간에는 하루에 5ℓ 정도의 수분 섭취를 허락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영양가 높은 맥주에 더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사들은 보리 씨앗에서 갓 싹이 난 ‘맥아(엿기름, malt)’에 맥주를 만들기 위한 ‘당화효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아냈고, 맥아의 당화효소를 유지하기 위하여 씨앗을 불로 볶아야 한다는 사실까지 발견했다. 여기서 당화란, 맥아 내에 포함된 ‘아밀레이스(amylase)’ 또는 ‘아밀라아제 효소’를 활성화해 전분을 당으로 바꿔주는 맥주 양조에서 핵심이 되는 단계이다. 그렇게 맥아는 수도원에서 검게 볶아졌고 이것이 흑맥주의 시작이다.
흑기사의 변심 밀맥주가 좋아, 맥주 순수령
유럽 전체로 맥주가 확산하며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각지에서 재밌는 시도들이 발생했다. 보리에 밀(wheat), 귀리(oat) 등 다양한 곡식을 섞어서 양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밀(bread wheat)을 섞어 양조한 밀맥주(Weizenbier, wheat beer)는 보리로 만든 맥주보다 부드러워서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때 맥주를 좀 더 보존하기 위해 계피나 진(Gin)의 원료 중 하나인 주니퍼베리(juniper berry) 같은 향신료를 사용하면서 맥주의 맛을 더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때마침, 벨기에는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13~17세기)’ 무역으로 독일보다 부유한 시기를 맞았는데 이때 밀맥주가 대대적으로 유행하였다. 그 시대에 유행했던 밀맥주의 전통은 ‘벨지안 화이트(Belgian White)’라 불리며 현재의 ‘호가든(Hoegaarden)’과 프랑스의 ‘블랑(Blanc)’까지 이어지고 있다. 벨기에 사람들이 맥주에 대해 독일 사람들 못지않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벨기에만큼 부유하지 못했던 당시의 독일은 밀맥주 소비가 늘고 시장이 커지자, 밀값이 폭등하고 빵값이 오르는 사회적 문제에 시달렸다. 심지어 맥주에 환각효과를 내기 위해 고급 향신료 대신 광대버섯을 섞는 등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이 줄을 이었다.
이에 바이에른주 뮌헨의 공작 ‘알브레히트 4세(Albrecht IV)’는 1487년 11월 30일 독일 맥주의 운명을 가른 ‘맥주 순수령(Reinheitgebot)’을 제정하고 공표한다. 맥주를 주조할 때 물, 보리, 홉 단 3개의 재료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못을 박은 것이다. 그렇게 맥주 순수령이 발표되었지만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밀맥주의 부드러운 맛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일부 지역에서만 밀맥주를 계속해서 생산하도록 예외를 두었다. 현재의 에딩거(Erdinger), 바이엔슈테판(Weihenstephan), 파울라너(Paulaner)는 모두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독일 밀맥주의 대표적인 맥주들이다. 이 맥주 순수령은 벨기에 등의 국가에 맞서 ‘한자동맹’에 대응하고자 제정한 것이기도 한데, 수 세기 유지되다가 1993년에서야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몇몇 밀맥주를 제외한 독일 맥주 대부분은 맥주 순수령으로 인해 맥아(malt)와 홉(hop)의 품종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켰으며 양조 공정의 차별화로 인해 현재 세계 최고의 ‘브루잉(brewing)’ 기술을 가지고 있는 맥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맥주 순수령이 이끈 라거의 등장
기존의 자연 맥주는 실온상태의 액체 표면에서 발효되는 효모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를 ‘상면발효’라고 하며 상면발효 효모로 만들어진 맥주를 통칭하여 에일(ale) 맥주라고 부른다. 과거의 에일 맥주는 수메르인들이 갈대 빨대로 마시던 원시 맥주에서 중세 수도사들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묵직한 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밀맥주가 유행하였지만, 독일에선 맥주 순수령으로 달리 할 것이 없어진 양조 기술자들이 새로운 방식의 발효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실온보다 낮은 온도의 액체 바닥에서 발효하는 효모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이 ‘하면발효 효모’에 의한 라거(lager) 맥주의 시작인데, 이런 라거 맥주는 온도가 낮은 겨울에 동굴이나 창고에 대량 생산해놓고 일년내내 꺼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특정한 시기에만 만들거나 보존이 까다롭던 에일 맥주보다 가격도 저렴해졌다. 게다가 라거의 특징은 에일보다 가볍고 부드러워서 밀맥주와 같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라거(lager)는 독일어 ‘저장하다(lagern)’에서 유래했다. 맥주 순수령으로 인해 효모를 바꿔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던 바이에른이 속한 독일 남부와 또 근처 체코에서 유행한 라거는 독일어로 어둡다는 단어 둔켈(dunkel)을 붙여 ‘둔켈 라거(Dunkel Lager)’라 불리는 전통 맥주가 되었다. 사실 이때까지 과거의 맥주들은 모두 커피처럼 검고 어두운색이었다.
황금 맥주, 페일이라는 미녀의 등장
18세기에 접어든 영국에선 산업혁명(1760~1820)이 시작되며 풍부한 지하자원이었던 석탄의 활용으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영국의 1차 산업혁명은 인쇄술과 석탄의 동력이 견인한 시대였다. 그 가운데에 주목할 일은 맥주 업계에서도 벌어진다. 독일 맥주를 받아들인 영국인들은 가벼운 라거보다는 진한 에일을 더 사랑했다. 아일랜드 지역에선 ‘스타우트(Stout)’라는 흑맥주(사실 흑맥주라는 이름은 모호하다)를 만들었고 잉글랜드 지역에선 ‘포터(Porter)’라 부르는 흑맥주가 유행했다. 하지만 훗날 아일랜드의 스타우트가 잉글랜드의 포터를 압도하고 세계적인 맥주 ‘기네스(Guinness)’로 성장한다.
그동안 맥아를 볶는 과정에서 석탄이 나오기 이전에는 장작을 사용했다. 장작은 정교하게 불 조절하기가 어려워 대부분 맥아를 검게 탈 정도로 볶았고 이런 맥아로 만들어진 맥주는 모두 커피처럼 어두운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석탄은 불의 강도 조절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당화효소를 최대치로 유지하면서도 맥아를 타지 않게 살짝 볶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맥아로 맥주를 만들자 드디어 맥주는 검고 어두운 중세의 색깔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밝고 경쾌한 황금색 빛을 띠게 되었다.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에서 시작된 수천 년 맥주의 여행, 이집트와 바빌론의 영광을 거쳐 그리스 로마인들에게 천대받았고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더불어 천둥의 신 토르의 축복을 받았던 검고 어두운 인류의 맥주는 드디어 그 궁극의 본질적 모습을 차가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서 찾게 된 것이다. 검은 석탄이 검은 맥주를 황금빛으로 만든 놀라운 기적이다.
이제 맥주는 절세 미녀로 탄생했다. 영국인들은 이 황금빛 맥주를 보며 감탄하였고 그 빛이 맑고 창백하여 ‘페일(pale)’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페일 에일(Pale Ale)’의 시작이다. 게르만족에 의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았던 맥주는 이제 아시아까지 이를 수 있는 비자를 영국에서 한 번 더 발급받았다. 영국인들은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이 대단한 발명품 ‘페일 에일’을 배에 가득 싣고 식민지에 세운 동인도회사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창백한 ‘페일 에일’은 건강이 약해서 인도로 가는 긴 항해를 버티지 못하고 늘 상하고 말았다. 원래 아름다운 것은 약한 척하는 법이다. 이에 긴 시간의 항해를 견디기 위해 술의 도수를 높이고 맥주의 보존제로 사용했던 홉을 더 듬뿍 때려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내가 맥주 중에 가장 즐겨 마시는 IPA(India Pale Ale)이다.
역사엔 비극이 끊임이 없으나 그 과정에서 융합되고 변화하는 모든 종류의 문화, 그중에서도 음료 또는 식문화의 결과는 때때로 아름답다. 생명이라는 것은 살아있으니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한다. 그런 물리적 당위성에 작가적 양심은 잠시 주춤거리지만. 맥주는 수메르와 이집트를 떠나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맥주는 합리적, 과학적, 실험적 자세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이제는 인류 모두의 것이 되었다.
페일 에일의 충고, 라거야 너도 함께 가자
19세기 영국의 페일 에일 기술이 바이에른의 뮌헨(둔켈 라거가 유행이던)에 전달된다. 당시 슈테판 양조장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Gabriel Sedlmayr Jr.)’는 영국의 이 신기술을 둔켈 라거(dunkel lager)에 접목하여 최초의 ‘페일 라거(pale lager)’를 옥토버페스트에 출시했지만, 뮌헨에서 둔켈 라거만이 진짜 라거라며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에 옥토버페스트에서 이를 지켜보던 체코의 양조사들은 신기하게 받아들였고 또 다른 페일 기술자 ‘조제프 그롤(Joseph Groll)’을 체코의 작은 도시 ‘필젠(Pilsen)’으로 초대했고 조제프 그롤은 그곳에서 마침내 황금빛 라거를 만들어 냈다. 현대 맥주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페일 라거 원조의 탄생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시작이었다. 필스너는 필젠의 지역명에서 유래했다.
때마침 산업혁명 이후 투명한 유리잔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는데, 이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황금색 맥주가 전 세계를 강타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편, 독일 북부에선 바이에른과 달리 페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벡스(BECK’S)’ 맥주가 탄생하였다. 이후 벡스 맥주는 세계 최초로 맥주를 초록색 병에 담는 선도적인 실험에 앞장섰다. 이전까지는 맥주는 보존 문제로 갈색의 어두운 병에 담겼기 때문이다.
한편, 체코의 3대 필스너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부드바이저 부드바르(Budweiser Budvar) 그리고 스타로프라멘(Staropramen)인데 체코의 ‘부드바이저’는 상표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후발 주자인 미국의 ‘버드와이저’와 끝없는 소송 전쟁을 벌였다. 각기 대륙마다 다른 판결이 났는데 언제 또 소송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파스퇴르의 반격, 조국 프랑스의 배신
역사는 반복된다. 그럼에도 그 반복적인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인류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집트에서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진 맥주를 무시했던 그들이 그랬고, 곧 전 세계 맥주 시장을 지배할 황금빛 페일 기술을 거절했던 독일이 그렇다. 이번엔 프랑스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동시에 미생물학의 기초를 다진 미생물계의 거물이다. 광견병 바이러스, 콜레라, 탄저균 등 수많은 세균을 정복했으며 와인이 신맛을 내는 원인도 밝혀냈다. 그는 어느 와인 회사의 의뢰를 받았는데, 발효가 효모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과 특정 미생물이 와인에서 젖산을 만들면서 신맛이 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효모가 공기 중에 노출되었을 경우 산소에 의해 발효 과정이 억제되는 현상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파스퇴르 효과(Pasteur Effect)’라 이름 붙였다. 발효주를 만들 때 저장 용기를 밀폐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파스퇴르는 나아가 미생물이 맥주나 우유 같은 발효 음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아내어, 술을 신선하게 지킬 공법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바로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Pasteurization)’이다. 이것은 60~80도의 저온으로 액체를 데워서 해로운 미생물을 반복적으로 죽이는 방식인데, 이렇게 하면 100도 이상으로 끓였을 때 변성될 수 있는 원재료의 좋은 성분들은 보호하면서 해로운 미생물들만 지속해서 괴롭혀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런 파스퇴르 공법은 150년이 지나서도 현대의 많은 액체나 반액체 식품에 적용되고 있다.
루이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필요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는데,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독일인들의 자부심인 맥주를 눌러 프랑스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저온살균법으로 만든 맥주를 프랑스에 제안했지만, 프랑스인들은 그의 신기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로마처럼 와인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살균된 맥주의 보관이 수년간 가능해짐으로써 전 세계로 유통될 수 있는 맥주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파스퇴르의 선견지명과 위대한 프로젝트를 놓치고 만다.
결국 프랑스와 긴밀하게 지내던 네덜란드와 덴마크가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을 알아보고 도입하여 맥주를 생산했는데, 세계 시장을 제패하며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한 네덜란드의 ‘하이네켄(Heineken)’과 덴마크의 ‘칼스버그(Carlsberg)’가 그 수혜를 입은 주인공들이다.
파스퇴르의 간절했던 바람과 달리 조국 프랑스는 그의 맥주에 대한 저온살균법을 외면했지만, 그의 이런 연구와 업적은 맥주의 마지막 비자를 발급하는데 일조한 최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편하게 어디서든지 즐길 수 있는 맥주는 최종적으로 파스퇴르가 아니었다면 더 늦어졌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티그리스강을 떠난 원시 맥주의 발전과정은 기원 전후로 해서 인류 문명의 6천 년 정도를 살펴봐야 하는 나름대로 인내심이 필요한 긴 여행이다. 이제 맥주는 드디어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다.
오 아메리칸 스타일,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부가물 맥주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지금처럼 남미나 아시아 이민자가 급격하게 늘기 전, 과거 백인 이민자들이 줄을 이었을 때 한 통계에 따르면 독일 16.5%, 아일랜드 12%, 잉글랜드 9% 등 맥주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국가 출신들이 상당수다. 당연히 신대륙에서도 이들 이민자에 의한 맥주 수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독일식 정통 맥주를 만들어 보고자 했으나 기후나 냉장 시설 요건 등에 따라 그 맛을 구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신대륙엔 옥수수, 밀, 쌀과 같은 자원이 넘쳐났고 막대한 자본을 가진 미국이 본격적으로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다. 맥아 100%를 쓰기엔 가격이 비싸서 경제적으로 맞지 않았던 미국인들은 그들에게 풍부한 옥수와 밀이나 쌀을 맥주에 섞어서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미국의 ‘부가물 맥주(adjunct beer)’ 또는 ‘미국식 라거(American Adjunct Lager)’라고 부른다.
1855년 밀워키에 창업한 밀러(Miller Brewing Company)는 원료에 옥수수를 첨가했고, 1876년 창업한 버드와이저(Budweiser)는 미국을 대표하는 맥주로 쌀을 첨가물로 사용한다. 체코의 필스너인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Budějovický Budvar)와의 상표권 분쟁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버드와이저의 창업자인 독일인 ‘아돌프 부쉬(Adolphus Busch, 1839~1913)’는 미국에 이민한 독일계 이민 1세였다. 그는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맥주를 파는 양조장을 차려 강한 도수의 술을 마시는 미국인에게 생소한 맥주를 팔았다. 그러나 독한 술에 익숙한 미국인들은 음료수 같은 맥주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독일의 대표 음료인 맥주가 잘 팔리지 않아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장래성을 알아본 독일계 미국인 ‘에버하드 앤하이저(Eberhard Anheuser, 1806~1880)’는 그를 불러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정착시켰고 아돌프는 그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미래에 낮은 도수의 맥주가 유행할 것을 예견한 사업가 앤하이저와 그의 딸 ‘릴리’는 미국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아돌프 부시를 설득하여 맥주 사업에 전념, 결국 그 유명한 맥주인 버드와이저를 탄생시키게 된다.
미국식 부가물 맥주는 정통 라거나 에일을 뛰어넘어 전 세계로 퍼지며 멕시코의 ‘코로나(Corona)’, 필리핀의 ‘산미겔(San Miguel Beer)’의 모토가 되었고, 맥주 종주국까지 들어가 소규모 양조장이었던 독일의 ‘크롬바커(Krombacher)’와 ‘외팅어(Oettinger)’를 성장시켰다. 맥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벨기에에선 옥수수를 첨가한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를 탄생시켰다.
아시아, 맥주의 마지막 여행지
아시아는 미국보다 독일식 맥주의 영향이 크다. 이 글의 서두에 하루키를 인용하면서 일본 맥주의 탄생을 이야기했다. 삿포로 맥주의 장인 ‘나카가와 세이베’는 독일에서 직접 맥주 양조를 배웠고, 1903년 중국의 산둥반도(山東半島)를 조차(租借)하여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게 된 독일은 청도에 맥주 회사를 설립했는데 ‘칭다오 맥주(青岛啤酒股份有限公司, Tsingtao Brewery)’가 바로 그것이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맥주 재료에 소변을 누는 엽기적 사건으로 인해 칭다오 맥주는 한순간에 그 이미지가 추락하였다.
한국 맥주는 일제 강점기에 삿포로 맥주와 기린 맥주가 설립한 자회사들이 각각 하이트 맥주와 OB맥주로 이어졌다고 역시 설명했다. 지금도 한국 맥주에 대한 불신이 크다. 맥아 10% 이상이면 맥주로 인정하겠다는 주세법의 개정으로 인해 한국에서 생산되는 맥주가 오명을 뒤집어쓴 부분도 있으나, 일본식 아사히 맥주의 물타기를 재빠르게 배워서 맥주에 물을 탄 과거를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세법에 따라 세금이 맥주에만 과하게 부가되는 현실과 물가정책에서 1970년대부터 짜장면이 50배까지 오르는 동안 맥주 인상률은 정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여 7배 정도 올랐다고 하니, 맥주 제조사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값싸고 부실한 원료를 쓰거나 물을 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다. 미국마저도 원가 절감을 위해 맥아를 줄이고 부가물 맥주를 만들었으니까.
다행히도 2020년 주세법을 개정했는데,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된 맥주의 세금은 원가, 판매관리비, 이윤을 모두 포함한 전체 가격에 세금을 부과하는 종가세 방식이어서 원가에 관세만 포함한 수입 맥주에 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격이 높을수록 세금이 더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새로 개정된 주세법에선 종가세(세율 72%)가 아닌 종량세로 바뀌었다. 종량세는 맥주의 양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어서 이제 수입 맥주와의 불평등한 경쟁은 사라진 셈이다. 국산 맥주, 수입 맥주 모두 리터당 같은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량세에는 허점이 있다. 맥주 회사들이 물가와 연동해 세금이 조금 올랐다고 제품 가격을 크게 인상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셈이다. 종량세의 전환으로 소비자들이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맥주 회사들은 여전히 품질이 떨어지는 맥주를 생산하면서 기업의 양심을 버리고 가격은 멋대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종가세가 기준일 때는 72%의 세금 때문에 가격 인상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2020년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50년 만에 손을 본 주세법을 2023년 다시 3년 만에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정부가 나섰다. 종량세는 유지하되 물가 연동 방식을 폐지하고 탄력세율 제도로 전환하겠다는 것인데, 필요에 따라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기본 세율의 ±30% 범위에서 조정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주요한 골자이다.
어쨌든 한국인도 이젠 세계적인 맥주 명가에서 만드는 고급 맥주의 맛에 익숙해졌다. 에일과 라거를 직접 생산하는 크래프트 비어 문화에 익숙하고, 국내 곳곳에 나름대로 수제 맥주를 잘 만드는 양조장들과 이들이 직접 운영하는 직영점들이 늘고 있다. 불합리한 종가세 때문에 국내에 상륙했던 해외의 브루어리 명가들이 대거 철수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자생적 소규모 양조장들이 수제 맥주를 생산하기에 과거보다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맥주 대기업도 이런 고급화에 동참해서 맥주 가격 인상에만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양질의 맥주를 국민에게 공급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케이팝, 케이컬쳐, 케이푸드에 세계가 열광한다. 물들어 왔을 때 노를 저으라고 이럴 때 한국 맥주도 세계적인 맥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에 조선에서 맥주를 만들었다면
사실 궁금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출발하여 이집트, 그리스, 로마, 독일, 체코, 벨기에, 잉글랜드, 미국, 일본 등을 거쳐 다시 한국까지 맥주가 돌아오는 6천 년의 긴 여정에서, 혹시 한반도에는 더 일찍이 맥주가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이런 마음이었다.
이곳저곳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 초기, 1450년(세종 32년) 왕실 어의 ‘전순의’라는 사람이 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이자 요리책 ‘산가요록(山家要錄)’이 있는데, 여기에 66가지의 다양한 술에 대한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이화주, 송화천로주, 두강주, 죽엽주, 소국주, 감주, 소주와 같이 현대인들도 알만한 술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드디어 정확하게 제목을 ‘맥주(麥酒)’라고 달은 술 제조법이 산가요록의 목록에 버젓이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조선 시대의 맥주 제조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麥酒
白米一斗, 洗浸, 細末, 熟蒸, 好匊五升, 以湯水少和合, 按摩入瓮. 麥米精舂四斗, 本酒入瓮同日洗浸.
經四五日, 更洗水潔而後已, 熟蒸, 不歇氣熱, 移甑, 以冷水注下, 良久, 待冷. 浹冷而止和前酒入瓮, 十餘日後, 用之. 其味香, 例久而不變, 最宜暖節.
맥주
백미 한 말을 물에 담갔다가 씻어서 곱게 가루를 내어 푹 찐 다음 좋은 누룩 다섯 되에 끓는 물을 조금 넣고 잘 비벼 항아리에 담는다. 곱게 찧은 보리쌀 네 말을 밑술 항아리에 넣은 같은 날 씻어 물에 담근다.
4~5일 정도 지난 뒤 다시 물이 깨끗해질 때까지 씻어낸 뒤에 푹 쪄 김을 빼지 말고 시루를 뜨거운 채 옮겨 놓아 그 위에 냉수를 계속 부어 식힌다. 한참 후 냉기가 속까지 스민듯하면 그치고 밑술 항아리에 넣어 10여 일 후에 먹는다. 이 술은 그 맛과 향이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으므로 따뜻한 계절에 가장 알맞다.”
이것이 조선 맥주의 레시피(recipe)이다. 어떤 이들은 막걸리와 비슷하다거나 막걸리를 만들다 쌀이 부족해서 보리를 넣었을 뿐이라는 패배적인 근성을 드러낸다. 자료를 찾다보니 그런 자들을 상당수 발견한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과 글의 행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섣부른 태도이며 문헌 정보를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조급증에 기인한다.
먼저 세종대왕의 시대는 경제, 정치, 과학, 천문, 지리 모든 면에 있어서 조선 최고의 중흥기였다. 쌀이 부족해서 보리를 넣었다는 말은 쌀과 보리가 무려 다섯 말이고 왕실의 어의가 기록했다는 것에 있어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우주를 관측하고 정밀하게 시간을 측정하며 한글을 창제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 배경을 이해했다면, 문제적 조선의 맥주를 만들었던 양조법 행간을 이해해야 한다.
백미(白米) 1에 맥미(麥米) 4라는 비율은 쌀이 술의 중심이 아니라 보리가 술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보리로 만든 술, 즉 맥주(麥酒)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물론 버젓이 산가요록 영인본의 11쪽에서 12쪽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麥酒(맥주)’라고 그 술의 정체를 밝히고 있지만.
여기서 1450년대 조선의 양조기술은 서양보다 한 단계 더 앞서있다. 쌀 한 말은 술의 도수를 높이기 위해서 바닥에 깔아 두는 ‘밑술’이라는 우리 선조들의 양조기술이고 이후 보리를 익혀 네 말을 더하는 것은 밑술에 ‘덧치는’ 술인 ‘덧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최종 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행간에서 최종술이라고 일컫는 보리로 만든 덧술은 당연히 ‘맥주’인 것이다.
물론 현대의 맥주와는 다른 모양이다. 조선의 맥주는 막걸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막걸리는 금방 실온에서 쉬어버리지만 따뜻한 계절에 두고 마셔도 될 정도로 맛과 향이 변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걸리와 전혀 다른 성격의 술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조선의 라거는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한 방송사와 함께 전통음식 연구소에서 실제로 조선의 맥주를 재현한 적도 있었다. 도수는 서양의 맥주보다 높아서 15도 정도가 나온다. 그건 밑술에 덧술을 치는 독특한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다가 만든 막걸리의 실패작이 아니라 철저하게 연구하고 계산해서 만든 조선의 진짜 맥주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요즘, 조선왕조 최고의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맥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단순한 구전도 아닌 명백한 문헌 ‘산가요록’을 통해 전해지는 조선에서 맥주를 만들었던 증거이다. 다만 이러한 조선의 맥주가 전승되어 발전되지 못한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런 조선의 맥주를 차차 연구하겠다는 맥주 양조장이 아직 한국에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루키,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에서 그가 남긴 말이다. 술은 자신의 원산지에서 가장 잘 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맥주 또한 그렇다. 그러나 맥주는 어림잡아 6천 년을 여행했다. 그리고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 자신이 가장 잘 감상 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물론 파스퇴르의 혁신적인 저온살균 공법은 맥주를 실어서 태양계의 끝을 감싸고 있는 오르트 구름(Oort cloud)까지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77년 우주 탐사를 떠나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는 ‘보이저 1호’에 나사의 과학자가 ‘둔켈 라거’나 ‘페일 에일’을 실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외계에 보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선물 중의 하나이거나, 게르만족에게 맥주라는 선물을 내린 천둥의 신 토르에게 보내는 답례일 수도.
47년째 태양계 밖으로 여행하는 보이저호에 BBC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The greatest voyager in history is still travelling.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자는 아직도 여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나는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맥주가 아직도 여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이제 한국 맥주에서 시작되었으면 어떨까 하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 또는 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페일 에일이나 IPA를 마시는 것은 한여름 라거를 즐기는 것만큼 맛스럽고 멋스럽다. 물론 짙은 스타우트나 둔켈도 잘 어울린다. 조선왕조 세종 시대에 주조되었던 조선의 맥주가 계승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 되어 언젠가 세계적 맥주 명가와 나란히 나의 가을 테이블에 놓여 있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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