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최의 K리더] 아픈 역사의 트라우마를 승화시킨 ‘문화 파이오니어들’: 한강 작가와 보릿고개 시절 피아니스트 한동일
최근 온 국민들의 오랜 염원이자 국가적 숙원이기도 했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단지 ‘한강 작가’ 개인의 기쁨이 아니었다. K-컬처가 대세인 작금에 문학계 또한 국제적 주목을 받으며 위상을 드높이니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자긍심은 우리 모두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한국 역사의 트라우마, 사회적 억압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더욱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아픔인 현대사가 세계적으로 재조명되고 나아가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노랑무늬 영원》(문학과 지성사, 2018) 등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 상처를 탐구한다. 한국 전쟁과 그 여파로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트라우마와 관련된 복잡한 감정들을 다루었다. 즉 그녀의 글은 전쟁의 잔혹함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파헤치며, 전쟁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한편 이런 한국의 ‘전쟁과 분단’의 배경이 공통점이 되는 1세대 문화 선구자가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에서 피난 온 가족의 일원으로, 전쟁의 영향을 누구보다 깊게 경험한 피아니스트 한동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조차 미미했던 그 시절에 선진국인 미국의 CBS TV 방송 ‘에드 셜리번 쇼’에 출연하여(1954년 7월25일) 신동으로 소개되며 ‘대한민국’을 널리 알렸으니 K-파이오니어의 원조인 셈이다.
다음은 필자가 진행한 <K-Culture & Artist / 한류를 만드는 사람들> 프로젝트 중 피아니스트 한동일을 인터뷰한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한류의 발전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한다.
<K-Culture & Artist / 한류를 만드는 사람들>은 [Classic J]가 정부산하 공공기관의 지원사업에 최초로 선정되어(클래식 출판 부문)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인터뷰하고, 아카이빙 컬렉션을 만들어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우리 문화와 예술인들을 알리는 프로젝트다.
월남 & 도미 배경
Q. 재클린최: 어떻게 월남을 하게 되었나?
A. 한동일: 함흥에 살 때, 2차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군 한 20명 정도가 갑자기 우리 집에 와서 모든 물건을 다 가져갔다. 심지어 피아노까지도. 아버지는 내 아들의 소중한 물건이니 피아노만은 가져가지 말라고 사정했지만, 오히려 러시아군 대장은 부하들에게 아들을 찾아서 쏴버리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때 나는 다행히 할아버지 집에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일 이후 여기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시며 떠날 준비를 하셨고 그래서 우리 가족은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 결정하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김일성 아카데미에서 가르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 아버지랑 어머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 역시 6.25 전쟁 때 한강에서 탱크 들어오는 것도 봤고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쏘는 것, 사람들이 죽는 모습까지 다 봤다. 아직도 생생하다.
Q. 재클린최: 그 보릿고개 시절에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었나?
A. 한동일: 한국은 6.25 전쟁 때문에 다들 힘들었던 시기였다. 함흥에서부터 서울로 월남하면서 정말 너무너무 많이 고생했다. 6.25 전쟁과 피난을 겪으면서 부산에서 제주도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그땐 피아노뿐 아니라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님이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으셨기에 가능했다. 당시 집에 피아노가 있었던 김성복 선생님 댁에 가서 한 시간 연습하고, 그 뒤에는 후암동으로 가서 또 연습하고...당시 아버지 손잡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연습하던 와중에 누군가 미국 오 공군 사령관 강당에 마침 피아노를 들여놓게 되었고, 그곳에서 매일 연습할 수 있다고 알려주더라. 덕분에 그곳에서 연습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며 내 연주를 스쳐 가듯 듣곤 했다. 하루는 어떤 공군이 “일주일 후에 한국과 미국 측 VIP를 위한 쇼가 있는데, 거기서 한 곡을 연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 1953년 10월 초, 만 11살 때였다. 그때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쳤는데 우연히 내 연주를 들은 E. 앤더슨 장군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며 스폰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당시 한국에는 25개의 여러 공군기지가 있었는데, 모든 기지에서 내가 연주를 할 수 있게 연결해 주었고 연주가 끝나면 당시 군인이 쓰고 있던 모자를 쭉 돌려 5전, 10전, 25전 이렇게 모자 속에 십시일반 넣어주셔서 미국에 가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나를 줄리아드에 데리고 가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Q. 재클린최: 미국 가는 경비 충당이 힘들었을 텐데.
A. 한동일: 그 당시 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있는 공군기지도 다 돌아다녔는데, 그때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곳은 공군 병원 환자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미국에서 유명한 VIP가 왔다고 하더라. 누군지 짐작이 가는가? 바로 ‘마를린 먼로’였다. 당시 마를린 먼로가 하얀 스웨터를 입고 걸어 나오니, 군인들은 함성을 질렀고 그곳에서 돈이 많이 모였다. 4,350불 정도. 그때 또 장학금 펀드를 받기도 했다. 줄리아드 음대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줄리아드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전쟁 중이고, 어린 소년이 피아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full scholarship을 주었다. 오직 한국 학생인 나를 위해서였으니 너무나 감사했다. 그 당시는 정말 모두가 굶어 죽을 것 같이 힘든 시기였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피아노도 없었을 적에 공군 사령관에 가서 피아노를 쳤던 게 내게는 행운의 시작이었고, 후원해 주셨던 사무엘 E. 앤더슨 사령관님 덕분이었다.
‘대한민국’이 뿌리, 감사의 인연들
Q. 재클린최: 언제 가장 고국 생각이 났었나? 본인의 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나?
A. 한동일: 1955년 앤더슨 장군이 장학금 펀드를 더 모아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텍사스에 몇 군데를 더 arrange 해주셔서 연주했다. 당시 나는 ‘쇼팽 발라드’ 1번을 쳤는데 연주 후 앙코르 요청이 들렸고, 무대로 나간 나는 나도 모르게 ‘애국가’를 연주했다. 무대 뒤에서 나의 연주를 듣고 있던 앤더슨 장군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시더라. 미국으로 간 지 1년 정도 지난 시간이었지만,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어린아이였지만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도 늘 기억했다.
Q. 재클린최: 단지 ‘행운’이라고 하기엔 그 이상의 교훈이 있을 것 같다. 앤더슨 장군의 사랑과 배려를 통해 느낀 것은 무엇인가?
A. 한동일: 당시 학업뿐만 아니라 앤더슨 장군이 영주권도 나오게 해주셨고 시민권도 도와주셨다. 시간이 지나 그분이 은퇴할 나이가 다가왔을 때 “너는 나의 아들이다.”라고 하셔서 나는 “모든 것이 장군님 덕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장군님이 하신 말씀은 평생 제 마음속에 남아있다. “아니야, 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다 너 스스로 한 것이다. 네가 다 이루어낸 거야.”라고. 그분은 내가 ‘self respect’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고, 나는 그것이 평생 가슴에 감사와 존경으로 남아있다. 너무 감사한 경험이었다.
Q. 재클린최: 1960년대에 백악관에서 초청연주는 어땠나?
A. 한동일: 1962년, 내가 21살 때였다. 백악관에서 초청받아 연주하게 되었는데, 빨간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기억나고, 그때의 연주와 느낌도 모두 기억난다.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쇼팽 녹턴, 드뷔시 프렐류드, 스카를라티 소나타를 쳤었다. 이스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재클린 케네디가 올라가면서 ‘Hi’하고 인사하셨고 그때 거장 ‘파블로 카잘스’도 만났다. 정말 원더풀이었다. 케네디도 만나고. 하지만 다음 해에 케네디가 죽었다. 나도 지나가는 미국의 역사를 다 겪으면서, 묵묵히 걸어왔던 것 같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지나가더라.
50, 60년대,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다
Q. 재클린최: 1954년 7월에는 미국 CBS TV <에드 셜리번 쇼>에 신동으로 출연해 ‘한국’을 알렸는데, 196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서 제24회 리벤트리(Leventritt) 국제콩쿠르의 우승자가 되어 당시 존재감조차 미미했던 세계시장에 ‘대한민국’을 각인시켰다. 이 순간을 회상한다면?
A. 한동일: 당시 80여 명의 참가자 중 내가 제일 먼저 했는데, 아주 중요한 경험이었다. 콘체르토가 3개 필요했는데, 베토벤 3번, 프로코피에프 2번, 그다음 라흐마니노프였다. 세미파이널에서 열다섯 사람 정도 올라갔고, 파이널에서는 5명이 있었다. 또 그때 나는 베토벤 소나타의 2악장을 쳤다. 3번의 2악장을. 나는 이미 뉴욕필과 프로코피에프 2번을 연주한 후였고 심사위원들은 베토벤 소나타 2악장을 통해, 나의 음악적인 깊이를 보고 싶어 했다. 당시의 2악장은 내게 굉장한 의미가 깊은, 온전한 나의 음악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에도 ‘진정한 위너(winner)’라고 기사가 실렸더라.
스승과 제자
Q. 재클린최: 반 클라이번(Van Cliburn), 존 브라우닝, 백건우, 게릭 올슨 등 많은 유명 제자들을 양성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로지나 레빈(Rosina Lhévinne)을 사사했다.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나? 가장 가슴에 새기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A. 한동일: 스승님 로지나 레빈(Rosina Lhevinne)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해 주셨던 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 중 첫 번째는 레슨인데, 매우 엄격한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맨 처음 뵈었던 어린 시절,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등을 쓰다듬으시면서 한국에 있는 어머님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유연한 터치’에 대해 강조하셨는데, 평생 가장 기억에 남은 레슨이 되었다. 또 선생님과 영화도 몇 번 같이 봤고, 어떤 때에는 전화로 피아노 레슨을 해주신 적도 있었다. 내 인생에 가장 귀중한 순간들이다.
Q. 재클린최: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생각하는 ‘스승과 제자’는 어떤 관계이며 의미인가?
A. 한동일: 의미라는 것은 내가 ‘선생’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69년부터였는데, 내 나이 28살이었다. 그때 벨기에에서 온 박사 학생도 있었고, 독일에서 온 33세 제자도 있었으니 배움은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다. 나는 연주보다 교수 생활을 더 많이 했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것이 가장 자랑스럽다. ‘스승과 제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인생을 함께 간다. 살다 보면 아이들도 생기고, 손자도 생기는 것처럼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다. 어느 날 “점심할래?”라고 하면 제자들과 점심을 먹기도 하고 편하게 지낸다. 나는 그냥 조용히 계속 걸어갈 뿐이다. 인생이 얼마나 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91세 아버지와 함께 선 잊을 수 없는 무대
Q. 재클린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A. 한동일: 1954년 6월 1일에 미국으로 가서 맨 처음 들어본 연주가 뉴욕 필하모닉이었다. 그 당시 프로그램이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5번, 에그몬트 서곡 즉 모두 베토벤 프로그램이었는데, 나는 그날의 연주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6월 1일, 예술의 전당에서 50년 전 프로그램을 그대로 연주했다. 50주년 연주를 기념하는 연주였다. 그때 91세 된 아버지가 서울시향 팀파니 연주자로 참여해 함께 황제를 연주했는데, 나중에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 협주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위한 곡”이라고 보도 되었다. 황제 중간 부분과 마지막에 팀파니 솔로처럼 나오는 부분에서 정말 나랑 아버지만 연주하는 것처럼, 누구보다 경쾌하고 멋지게 연주했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91세 아버지랑 같이 협주한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때 연주가 끝나자마자 뒤에 가서 아버지를 끌어안았고, 그것은 정말로 너무나 귀한 인생의 순간이었다.
결국은 ‘한국’의 품으로
Q. 재클린최: 영구 귀국을 결심한 동기는?
A. 한동일: 나는 만 12살 때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 후 평생을 미국과 유럽에서 살았다. 미국에서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도 다녔고 졸업 후 학사학위와 디플로마, 석사까지 받았고 그 이후 영국에서도 살았다. 미국에서는 거의 50개 주에서 연주를 했던 터라 좀 지치기도 했었다. 또 인디아나 대학교,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북 텍사스 주립대, 보스턴 대학에서 40년을 가르치다 보니, 나중에는 고국이 더욱 그립더라. 나는 늘 ‘엄마의 고향’이 궁금했고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더욱 생각하게 되더라. 대한민국을 더 알아가고 싶었고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시골마다 가고 싶기도 하고 전국을 구석구석 누비고 싶었다. 물론 통일이 된다면 고향인 함흥에도 가보고 싶다. 나는 아직도 함흥집 주소를 기억한다. 나는 루빈스타인을 정말 존경했는데 오래전에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기차로 연주 여행을 하고, 그 이후 한국에서 부산까지 내려와서 요코하마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속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한국문화를 더욱 접하고 알고 싶어서 영구 귀국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1세대 문화 선구자
Q. 재클린최: 한동일 인생에서 ‘음악’은 결국 무엇인가?
A. 한동일: 늘 question 해야 한다. 브람스 인터메조에도 이 물음이 나오는데,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절망에 빠졌지만 결국은 천사가 와서 안아준다. 이것은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에도 나온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제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나의 답이다.
Q. 재클린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으로서,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A. 한동일: 시골에 내려가서 음악 안 하는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아이들과도 모두 똑같이 소통하고 싶다. 더욱 다양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말하고 싶다. 프로페셔널한 것 말고, ‘사람’으로 소통하고 싶은 것, 그게 나의 진정한 바람이다.
힘든 배경을 승화시킨 문화 파이오니어들
그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 세계만방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을 알리며 국가 위상을 드높였던 피아니스트 한동일은 전쟁의 상처와 그로 인한 감정적 복합성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의 음악은 전쟁의 비극, 고통,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전통 음악과 현대 클래식의 융합을 통해 전쟁의 아픔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며,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한강 작가 역시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인간의 상실, 상처를 감각적으로 묘사하며 전쟁이 남긴 상처와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나아가 그녀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세계 독자에게 전달하며, 문학이 사회적 기억을 보존하고 공감을 형성해 냄을 증명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문학이 가지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국문학의 수준과 가능성을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즉 두 사람 모두 우리 모두에게 ‘자긍심’을 안겨주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전쟁과 아픈 현대사라는 어려운 배경을 통해 깊은 감정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자칫 평생 트라우마로만 남을 수 있는 전쟁의 상처와 그로 인한 인간의 고뇌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 국가의 위상을 드 높인 이들은 진정한 ‘한류를 빛내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K-문학, K-문화를 이루어 온 파이오니어들의 정신과 업적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며 이제 우리 모두 이런 문화 선구자들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아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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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 재클린 최(최경숙)
피아니스트, 예술감독, 융합예술기획자, 교육자, 편집장, 칼럼니스트, 스타일리스트, 뷰티 인플루언서, 해외 문화교류 기획자로 활동 중이며, EBS 기획 다큐멘터리 출연, 독일 보훔대학교 초청 강연 등 문화예술 및 교육계에서 멀티테이너로서의 역할을 하며 독보적인 [재클린] 브랜드를 형성. 자기계발서 <열정의 힘> 저자, 20년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역임
현) 토탈 문화콘텐츠 플랫폼 컴퍼니 <제이컬처그룹> 대표이사, 한국미래음악협회 회장, <월간리뷰> 편집위원 및 칼럼니스트, <월간에듀클래식> 자문위원, <재클린 컬렉션>대표, 뮤지카프렌즈 & 앙상블 음악감독, Art_iN 퍼블리싱 대표, ®뉴욕뮤지카 입시연구소 대표, 국내 유일 휴먼 매거진 [클래식제이] 편집장 및 발행인, <더코리아저널> 이사 및 편집위원. @jacquelinechoi0 classicjourn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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