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품격 있는 어른'이 되는 길 (2)

박한표 승인 2024.09.29 12:56 의견 0

박한표 인문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품격 있는 어른'이 되는 길 (2)

어제는 고전인문학자 고미숙의 "나이듦 수업" 강의 내용을 살펴 보다가 여기서 멈추었다. "부유하면서 정신적 가치도 풍요롭기는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이 중요하다.

물질적 가치를 선택해서 완전히 동물 이하로 살거나, 정신적 가치만 추구하며 모든 물질적 혜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게 아니고, 물질과 정신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이다.

두 가지를 다 원한다면, 그건 탐욕(貪欲)이다. '탐貪자'는 조개 '패'자에 이제 '금'자로 이루어져 있고, '빈貧'자는 조개 '패'위에 나눌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청빈(淸貧, 맑은 가난)은 그것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마하트마 간디)

우리가 100년을 산다는 것은 100년 동안 정확하게 생로병사의 스텝을 밟아가는 것이다. 25년씩 잘라서 인생을 봄-여름-가을-겨울로 사는 거다. 예전에는 60이 환갑이었다. 태어난 해와 똑같은 간지가 돌아오는 시절, 이게 환갑이다.

60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으로 보이지만 그때는 이 생로병사,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거친 존재의 충만함이 있었다. 이 계절들을 모두 겪어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그래서 노인 문화가 전체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겨울을 겪어 봐야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말할 수 있지 않느냐는 거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고,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루소는 말했다.

공자(孔子)는 일찍이<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종심'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從心所慾, 종심소욕) 법도(法度)에서 벗어나지 않았다(不踰矩, 불유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70세는 장년에 불과하다. 75세부터 100세가 노인 연령이 란다. 현재 나이에 0.7을 곱해야 우리에게 익숙한 인생의 나이가 된다고 한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노인은 그 마을의 도서관이고, 사원이고, 한 권의 책이다. 노인이 가진 풍부한 경험과 지혜의 깊이를 빗댄 비유이다.

철 없는 상태로 대부분을 보낸 삶은 산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시간성이 매우 중요하다. 나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은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핵심이지 그저 양적으로만 시간이 늘어난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이제부터 라도 지혜를 연마해서 인생의 이치를 터득해야 겠다'라 생각하는 문화가 부족하다. 그냥 '막' 살면, 늙는 게 두렵고, 죽는 게 무섭다. 대신 '100세를 살았으니 충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살면, 죽을 때 두렵고 무섭지 않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거친 노인의 지혜, 여기서 나오는 자유가 충만한 것이다. 아쉬움과 미련이 없는 거다.

100살을 살아도 생체리듬대로 살면 두렵지 않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남자는 8살, 여자는 7살이 기준이라 했다. 그러니까 남자는 8*8=64세, 여자는 7*7=49세가 자연스러운 폐경기가 된다. 각각 폐경기 이후에, 여성은 자기 안에 있는 양기, 남성적 기운이 나오고, 남성은 자기 안에 있던 음기, 여성적 기운이 나와서 음기와 양기가 섞인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제 사랑이 아니라, 우정의 시간이 시작되는 거다. 여성과 남성 모두 음양이 적당히 섞인 '인간'이 되는 거다. 남성, 여성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전까지는 생식을 해야 하니까 남녀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었다. 남자는 8*3=24세, 여자는 7*3=21세에 아기를 낳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일하거나, 몸 값을 높이기 위해 학교를 다녀야 한다. 청년의 '에로스'가 모두 노동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중세 정치에서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받는 기준은 GDP나 생산력 등이 아니라, "환과고독(鰥寡孤獨-홀아비. 과부, 고아, 늙어서 돌볼 이가 없는 노인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끈이 떨어진 존재'들을 구제하면 좋은 왕이라고 보았다. 사실 외로운 사람이 많으면 천지의 따뜻한 기운이 다 얼어붙는다. 음양의 조화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분명히 에너지장이 있다.

평소 나의 지론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평균 수명을 가진 직업은 성직자와 지휘자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감동하기 때문이라 한다. 평범한 우리도 날마다 감동하며 살면 오래 살 수 있겠지? 감동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그 따뜻함이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매사에 감사해 하고, 모든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오래 산다. 사랑은 따뜻함에서 오는 것이고, 그 따뜻함은 우리가 감동받았을 때 얻는 에너지와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 산다, 건강하다, 양생(養生)을 한다는 건 내 몸과 시공간의 리듬을 맞추는 거다. 봄에는 봄에 맞는 양생을,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양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에 맞게, 노년은 노년에 맞게 리듬을 밟아야 되는 데, 이 리듬이 어긋나는 데서, 병과 괴로움이 시작되는 거다. 청년들은 결혼도 임신도 못하고 이 사회에 편입되지 못해서 괴롭고, 노인들은 그 많은 시간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그 사이에 낀 중년들도 행복하지 못하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젊음의 에너지를 계속 산업에 투여해서 화폐로 바꿨던 거다. 그러는 사이, 국가가 압축 성장을 하고,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그 청춘들이 노년이 된 다음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다. 아직도 봄-여름의 열기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가을-겨울을 알지 못하는 노인 존재들이 방황하는 거다.

동양 사상으로 보면, '목↔화↔토↔금↔수↔목↔화↔토…', 이 기운들이 계속 순환하고 상생하는 거다. 다음 그림과 같다.

[사진=박한표]

각각 봄(목)-여름(화)-환절기-(토)-가을(금)-겨울(수)로 순환한다. 봄에서 여름은 발산한다. 이게 청춘의 에너지, 다시 말하면 열정적으로 실험하고 모색하는 에너지로 이게 중년까지 가는 거다. 계속 이런 상태만을 유지하라고 명령하는 게 자본주의이다. 이런 식으로 발산만 하면서 우리는 살 수 없다.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수렴하는 시간이 있다. 발산하고 수렴하여 식힌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이 이치를 우리들의 하루 24시간에도 적용 가능하다. 새벽 3시에서 오전 9시 반이 봄이라서 이 시간에 일어나고 기지개를 펴는 거다. 여름은 오전 9시 반에서 오후 3시 반으로, 에너지를 펼치고 창조하는 시간이다. 다시 오후 3시반에서 저녁 9시 반 까지가 가을, 열매를 거두는 시간이다. 저녁 9시 반부터 새벽 3시까지가 겨울, 열매마저 버리고 씨앗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쉬고 자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음주가무와 게임, 쇼핑, 드라마 다시 보기 등으로 잠을 안 잔다. 왜? 이런 것들이 다 '상품'이다. 자본주의 이 짧은 쉬는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돈을 계속 쓰라고 요구한다. '낮에는 노동해서 돈 벌고, 밤에는 소비를 하라'고 명령하는 거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계속 일을 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물질을 어느 정도 축적하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자유인, '프리랜서'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만큼 벌고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나의 노동과 삶을 조절하는 때를 맞이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일을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화폐가 필요한 거다.

사실 늙고 병들고 노쇠해 진다는 것의 축복은 많은 게 필요 없어지는 거다. 동서고금을 말론 하고, 양생의 원칙은 소식(小食)하는 거다. 그런데 최근 너무 많은 '먹방'의 유혹에 빠진다. 쉬는 시간에도 무언가 먹고 사고 소비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청춘의 아류로 남아버리게 된 것이다. '청춘'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다음으로 이어간다. '청춘'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늘 좋아하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공유한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 세이든 십육 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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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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