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박한표 승인 2024.09.15 21:21 의견 0
박한표 인문운동가, 뱅샾62 와인 대표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오늘부터 3일 동안,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1)

성경에서 하느님이 하신 첫 질문이 "아이에카(ayyeka)"이다. 이 말은 '너 어디 있느냐?'이다. 이 질문은 인간에게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주역>>에서도 효의 위치와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득위'라고 하고,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있을 때 '실위'라 한다.


각 효는 '득위'하여야 좋은 것이다. <<주역>>에서 이 ‘위(位)’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양효'라 하여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陽)'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는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점은 없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 '처지(處地)'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그 운명도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처지'라는 말에 다시 한 번 방점을 찍고 싶다.

'처지'는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고 하는 표현을 하였다. 눈이 이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立場)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한 타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 '처지'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는 타자의 관점을 취하는 능력으로, 우리가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태에 갇히지 않고 상대방의 상태에 나를 투영해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역지사지'의 능력,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회적 동물이 될 수 있는 거다. 또한 그러한 능력의 정도가 사람의 사회성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능력이 부족해 상대방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병증이 '자폐(自閉)'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는 있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상대방의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때 사이코패스(psychopathy)가 된다. 사이코패스는 반복적인 반사회적 행동과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충동성, 자기중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성격 장애 분류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일까?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 자리가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傷)하는 법이다. 고 신영복 교수는 "70%의 철학"을 말하였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거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30정도의 여유'는 '놀고 먹자'는 것이 아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여백 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별/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깨닫고 그것과 자신의 사명을 일치시키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 했다. 우선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거기서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이다.

기분은 내가 선택할 수 없어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태도(態度)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 중에 필요한 것이 '자기 절제'. '중도', 아니 중용이다. 어느 날, 다른 사람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자공이 공자님께 물었다. 선생님,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장은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러자 다시 자공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현명한 것입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한 말씀 덧붙이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님과 제자들의 이 대화에서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 자기 절제가 곧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불가는 중도(中道)를 이야기하고, 그리스철학과 유학은 중용(中庸)을 논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 이 말은 중국의 옛 시인 백거이(白居易)라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중용>> 제14장에 나오는 "군자거이사명(君子居易俟命, 군자는 평범한 자리에 살면서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말의 거이(居易)를 따온 것이다. '거이'는 거할 거+평범할 이가 합쳐진 말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곳에 거한다'는 뜻이다. 또 그의 자가 낙천(樂天)이라 한다. 이는 <<계사전>>에 나오는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했기 때문에 중앙 정치 무대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은 아마도 평범한 일상을 지향하면서, 다가오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그에 맞는 가장 최적의 인생 방법을 찾아낸 고수라는 생각이 든다.

이집트로 되 돌아 온다.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깨닫고,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지은 것이 피라미드이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우주와 자연의 원칙을 깨닫고 그것과 자신의 사명을 일치 시키는 것을 최선의 삶으로 알았다.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는 2톤이 넘는 정사각형의 돌을 200만 개 이상 쌓아 올려 만든 이집트 건축물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건축물이 5,000여 년 동안 여전히 건재 하는 것은 피라미드가 전체 구조의 중심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라미드가 지면과 지상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그것의 가시적인 중심이 아니라, 실질적인 중심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집트 인들은 이 중심 점을 '마하트'라고 부른다.

‘마아트(maat)'는 고대 이집트어로 ‘자신의 고유 임무’ 혹은 ‘일생 동안 마쳐야 할 의무’라는 의미다. 우리는 개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법'을 '도리'라 한다. 그리고 이 '도리'의 일부를 문자로 기록하여 한데 묶어 '법'이라고 부른다. 수메르 문명은 그 법을 메(ME), 이집트 문명은 '마아트(MAAT)', 인도 문명은 '르타(Rta)', 히브리 문명은 '토라(Torah)', 중국 문명은 '도(道, Dao)'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이다. 국가가 제정한 법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의 지극히 일부이다. 그래 후진 사회는 법률 조항들의 정신인 도리를 무시한다. 선진 사회는 이 법률조항들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의 표현, 즉 도리의 일부라고 여긴다. 게다가 선진 공동체는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고 고양시키는 교육에 힘쓴다. 인생을 놀이로 가정한다면, 그 놀이에는 내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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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한표]

시를 한 편 공유하고, 이젠, 어제에 이어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

오늘 공유하는 시의 "나비"처럼 살고 싶다. 어제 고향에 가,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왔다.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박상옥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2)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다. 또 그것은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최선의 삶이기도 하다. 이 '마아트'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던진 첫 질문 '아예카(너 어디 있는냐?)'에 대한 응답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해진 삶의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하여 삶의 중심을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는 인간의 숭고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의 중심 점, '마아트'는 무엇일까?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 대로 생활하는 것"이라는 <미가서>의 내용이 나의 마아트이다. 맛있는 반찬을 만나면, 씹으면 씹을수록 더 맛이 나는 것처럼, 예언자 미가가 말한 위의 문장은 곱씹을수록 더 큰 깨달음을 준다.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 선행(善行)이라는 거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고언을 했다. 그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 정의 실천하기
▪ 자비 희구하기
▪ 겸손 생활하기

(1) 정의(正義) 실천: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람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希求)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 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한다는 거다.

(3) 겸손(謙遜) 생활 :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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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한표]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3)

다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 '아예카'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란 뜻이다.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으니 시제가 없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개를 의미한다.

▪ 너는 지금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 너는 어제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었느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 너는 내일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을 거냐?)

죄를 범하고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느님이 하셨던 위의 질문은 육체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현실에 대한 비탄의 음성으로 아담에게는 현재 주어진 현재 상태에 관한, 즉 현재 영적 상태를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 지에 관한 내용의 질문이었다. 아담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 그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며 성과를 내야 하고, 결과를 만들며 성공을 꿈꾸는 우리들, 자기 계발과 같은 자기 발전을 생각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나아지기를 계획하고 노력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출발 지가 어디인 가?'라는 현실 인식의 질문은 '자가 진단'의 관점에서도 너무 중요한 질문이다. 그 출발 지를 잘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할 수 있다.

'어디'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깨닫고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자기만의 장소, 신이 개인에게 할당한 장소를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자주 가고, 거주하는 장소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 나의 정신과 육체는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내가 사는 집을 수도 있고,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내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사이트일 수도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 그것이 곧 나의 수준이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확장하였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이대로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괜찮은 겁니까?'

마지막 질문,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이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 영성을 키우는 신앙의 길이 아닐까? 나의 '마아트', '도리(道理)를 잊지 않는 거다.

여기서 나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마태 복음> 제25장 40절을 소환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 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이 말이 '마아트' 아닐까? 이 말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유언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최후 심판을 말씀 하신다. 마지막 날에 예수의 자기 명칭인 ‘인자(人子)’가 천사들과 함께 땅에 내려와, 구원 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을 구별할 것이다. 착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양’은 오른 편에, 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염소’는 왼 편에 몰아넣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하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 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 든가, 헌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 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 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 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님의 모습만이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우리 주위에서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그런 존재 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고아들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그 미물은 그냥 지나치면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그 대상이 신적인 존재, 즉 거물이 된다.

‘낯선 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나 생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수일 수도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만나 밤새 씨름한 무명의 낯선 자는 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얌체’를 의미하는 ‘야곱’이 아니라 ‘신과 씨름 하여 이긴 자’인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을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님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님이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좀 길게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질문(質問)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재화인 패(貝)를 만들기 위해 양손에 도끼 두 자루 '斤斤'를 들고 만들기 시작하는 수고이다. 이 수고로 나오는 해답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수고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만일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비겁한 거다. 말 그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다. 영어의 '죄(sin)'라는 말이 '과 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이 간절하게 열망하는 그것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열망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때 만나는 고통은 소중한 그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좁아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만 가고 싶어 한다는 거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존재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며, 육신을 지닌 존재가 신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도 예수처럼 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베르로도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처럼, 인간은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고통은 '내가 누구인가'를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훈련사이다. 신이 욥에게 한 질문이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욥이 고백한다. "저는 이제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신을 눈으로 보기만 하겠습니다."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맛을 본다는 것, 감각할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모든 것은 사실 기적들이다. 질문이 답이다.

그리고 "네 이웃이 누구인가?" 이 질문도 중요하다. 신은 언제나 낯선 자이다. 왜냐하면 낯선 자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본모습이 신이다. 나의 사람이,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킨다. 내가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 신이 등장한다. 그 이웃이 내 친구이다. 몇 일전부터 성경에서 하느님이 하신 첫 질문이 "아이에카(ayyeka)"에 대한 사유를 했다. 이 말은 '너 어디 있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마아트'라는 이야기를 마친다.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다. 또 그것은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최선의 삶이기 도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해진 삶의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하여 삶의 중심을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는 인간의 숭고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는 길위에서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 묻는다. 잘 살다 가는 것도 실력이다. 그 실력을 위해 오늘도 <인문 일지>를 계속 쓴다. 그곳이 내가 있는 곳이다.

길 위의 거울/고찬규

길을 걷다가

길인 줄도 모르다가

걷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헐떡이며 쉬다가

쉬다가 나는 저만치 있는

나를 보아버렸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벗어난 자 감옥에 갇히고

감옥을 벗어난 자 길에 갇힌다

기도해보지 않은 자 있는가

바람의 채찍에 생채기

나지 않은 자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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