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준 종횡무진] 사랑의 지속 가능성... 백년해로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생의 사랑의 여정을 살펴보면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 풋사랑, 연애와 결혼, 노후의 사랑이 그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에 이 연결이 끊어진다면 사랑의 지속가능성에 이슈가 생긴 것이다.
백년해로하는 지속가능한 사랑은 어떤 원리로 완성되는 것일까?
첫 풋사랑은 성적 욕망이 일깨워지는 시기인 사춘기의 사랑으로 주체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성적 욕망이 지배하는 사랑이어서 강아지 사랑(Puppy Love)이라고 칭한다. 들뢰즈가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늑대가 성적 늑대 한 마리라는 프로이드에 견해에 반박해 우리 몸 속에는 여러 욕망의 늑대가 모여 군집 생활을 한다고 규정했지만 적어도 프로이드의 주장이 사춘기 사랑에 빠진 청소년들에게는 더 잘 적용된다. 눈에 콩깍지가 작용하는 첫 사랑이 지속적 사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일이 실현되는 경우는 두 사람이 유치원부터 같이 다녔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가족 사이에 서로 친분이 있는 경우다.
나름 지속 가능한 사랑인 연애와 결혼을 지배하는 사랑의 원리는 성적 욕망도 있지만 유전자 복권이라는 변수가 지배적 변수로 등장한다. 성적 욕망의 말은 타고난 외모, 재능, 학벌과 학력, 나이, 태어난 지역, 부모의 재력과 배경이라는 유전자 복권의 마부에 의해서 지배된다. 이들 유전자 복권이 연애와 결혼 시장을 만들어내고 이 시장에서 교환을 통해 가격이 형성된다. 유전자 복권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연애와 결혼이 결정된다. 연애와 결혼은 유전자 복권을 전수 받는 자식이 태어나고 양육이 완결될 때까지 지속된다.
유전자 복권에 의해서 지속되는 사랑이 지속가능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본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답이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듣고 놀란다.
유전자 복권을 전수하는 임무가 끝나면 권태와 사랑의 위기가 찾아온다. 자식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일이 완수되면 상대가 가진 유전자 복권의 장점이 퇴색하고 상대의 단점이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진 유전자 복권과 유전자 복권의 명령에 따라 살았던 삶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만들어서 상대를 침대에 가두고 길들이는 작업에 착수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희랍의 신으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손이 침대보다 짧으면 늘리고 다리가 길면 다리를 잘라가며 상대를 자신의 침대에 맞추는 고문을 일삼는 신이다.
유전자 복권 전수를 마친 부부는 과거의 사랑의 이야기를 잊고 자신의 침대에 맞춰 상대를 잡아다 길들이는 작업을 시작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상대의 침대에 맞춰 자신을 정체성을 포기하면 같이 살 수 있지만 서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론은 이혼이나 졸혼이다. 법정에서 이혼의 사유는 성격 차이다. 부부는 유전자 복권의 마지막 결정체인 성격을 자신의 성격만을 성격으로 생각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운용한다.
더 성숙한 사람들은 사랑으로 결혼하고 정으로 산다는 속담을 진실로 받아들여 참고 사는 동안 더 심오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노후가 끝날 때까지 상대를 진실로 지속가능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가 가진 유전자 복권이 아니라 유전자 복권으로 해결하지 못한 아픔을 받아 들여가며 아픔조차도 사랑해가며 상대를 삶의 공동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긍휼의 사랑을 채득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 영화 찍느냐?"고 농담하는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성격 침대에 상대를 눕혀서 길들이는 사랑은 상대를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연이자 노예로 만드는 작업이다. 어느 순간 부부는 트로피 남편이나 트로피 부인으로 전락한다. 이런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싸움을 초월하는 긍휼이 사랑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환대와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조언한다. 강아지 사랑에서, 유전자 복권의 사랑, 유전자 복권의 사랑이 긍휼의 사랑으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사랑할 수 있는 좋은 것만 선택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편애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편애는 상대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다.
긍휼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아픔조차 사랑하는 사랑의 지고지순한 행위다. 긍휼의 사랑이 없다면 아쉽게도 사랑의 여정은 중간에 종결된다. 긍휼의 사랑으로 사랑이 이어지지 못한다면 서로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백년해로하는 지속가능한 사랑은 실패로 종결된다. (윤정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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