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담] 용동 큰우물

박미산 승인 2024.06.08 17:50 의견 0
박미산 시인,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미산의 시담] 용동 큰우물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다

두레박을 내린다

손수건을 가슴에 단 갑례, 동순이가 올라온다

또 한 두레박을 퍼 올린다

덕인이, 종찬이, 천기가 두레박에서 쏟아진다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물안개 같은 아이들이

큰 우물을 돌아 배다리로 간다

헌책방을 지나

창영국민학교 운동장

햇살이 머물던 자리에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좌충우돌 파문을 일으키며

심장을 두드린다

조개탄이 이글이글 타고

산더미 같은 도시락이 쓰러지며

사십삼 년이 왁자하게 부서진다

빛보다 빠르게

고무줄 끊고 도망가던 친구

달리기 잘하던 종재는

저 세상을 급하게 달려갔다 하는데

우물 한 귀퉁이에서

낯가리던 물결과 물결이

돌고 돌아 뒤섞인다

우리는 두레박줄을 밤새 당긴다

-『태양의 혀』(채문사, 92쪽)

........

2008년 세계일보 시 부문으로 등단하고 2009년 1월 11일 조선일보에 인터뷰기사가 나간 뒤,

연락 두절되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느 날 인천 창영초등학교 우리 기수 총무인 애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해마을에서 석사논문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동창 모임이 있으니 꼭 참석해달라는 전화였다.

여름에 애자 전화를 받고 석사논문을 제출한 겨울에 모임 장소인 동인천역 앞 금촌집을 갔다.

금촌집 앞엔 용동 큰우물이 있는데, 우리가 어렸을 적엔 그 우물 주위에서 놀았다.

지금은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붕이 씌어져 있어 옛날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우리는 학교에서 파하면 헌책방을 지나 배다리를 건너 시장을 거쳐

큰우물까지 놀다가 각자 집으로 흩어졌었다.

금촌집엔 동창들 삼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사십삼 년이 지나 만난 아이들은 물에 잠긴 듯 캄캄하게 생각나지 않다가

차츰 낯이 익어갔다.

저세상에 먼저 간 친구들도 꽤 있었다.

도시락을 두 개 싸서 와서 나에게 한 개를 준 종재도 저 하늘로 먼저 갔다고 한다.

애자, 갑례, 동순이, 찬희, 정희, 천기, 용석이, 순교, 종찬이, 정상이, 재섭이 등이

좌충우돌 파문을 일으키며 나의 심장을 두드리고, 산더미 같은 도시락 같은 이야기로

우리의 사십삼 년이 왁자하게 부서졌다.

초등학생이 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도 창영 57회 동기들은 구도심이 되어버린 창영초등학교 근처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 필자 소개 /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문화공간 (백석, 흰 당나귀 )운영.

1993년 <문학과 의식>수필 등단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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