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 시담(詩談)] 파란 바지
그 애의 부음 소식이 문자로 날아온 건 새벽이었다
해방촌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 가는 것보다 굶는 게 더 쉬웠다 굶어 죽는 아이들, 전염병이 돌아 죽는 아이들, 하늘의 계시라고 개척교회 목사는 말했고 무당은 신장님 단련이라고 해서 굿을 하기도 했다 용케 살아난 우리들은 공장으로 학교로 흩어졌다.
성례는 엉뚱 발랄했다 단 한 벌밖에 없는 파란 바지를 사시사철 입었던 그 애는 히치하이커가 되어 미래를 향해 달렸다 깊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질문도 모른 채, 오로지 먹는다는 것만 생각하고 외항선원과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갈가리 찢긴 채 난파된 몸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포도밭이 있는 시골 외딴곳, 포도송이마다 우울이 매달렸다. 그녀는 점차 말이 없어지고 식탐이 사라졌다 이국의 포도밭에서 말을 잃어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걸어 잠근 그녀의 얼굴이 가뭄 속의 포도 이파리처럼 바짝 메말라갔다
우리가 파란 바지로 불렀던 그녀가 왔다
현해탄을 건너 파란 잔디으로,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채문사, 44쪽)
성례는 옷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가 늘 파란 바지만 입었기에 우리는 그녀를 파란 바지라고 불렀다.
그녀에게는 미래라는 게 없었다.
오로지 굶지 않기 위해 살았던 그녀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녀의 집으로 놀러 갔는데 갑자기 그녀가 서울에 가자고 했다.
차비조차 없는 우리가 어찌 서울에 갈 수 있을지 의아해하는 나를 끌고
도화동 경인 고속도로 초입으로 가더니 차를 세우는 게 아닌가?
갑자기 히치하이커가 된 우리는 차주를 잘 만난 덕분에 그분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차비까지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그분의 당부 말씀과 함께,
이후 나는 공부하느라고 그녀와 연락이 뜸했다.
명랑 쾌활했던 그녀는 이혼한 후, 오빠가 그녀의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
일본 시골로 두 번째 결혼했다.
가끔 나에게 전화로 놀러 오라고 했지만, 한 번도 가지 못한 게 한이 된다.
일본 남편은 착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 년에 한 번씩 그녀의 한국 방문을 허락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일본 시골 생활을 재미있게 말했다.
자기가 그 마을에서 가장 젊어서 마을 어르신들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기도 하고 마을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포도철엔 농장 앞에서 포도를 판다고 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쾌활했기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줄 몰랐다.
그녀가 죽었다는 우성이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을 갔다.
장례식장엔 도화동 살던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상주는 그 애 남매와 전남편이었다.
그 남편은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남편을 계속 쏘아봤다.
나의 매서운 눈빛을 의식했는지 그 남자는 자리를 떠나고
그녀는 다음 날 파란 잔디가 되었다.
*** 필자 소개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백석, 흰 당나귀 운영.
1993년 <문학과 의식>수필 등단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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