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들꽃, 향유보다 독립이 먼저
몇 해 전부터 산책하며 들꽃을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올봄에는 또 어떤 들꽃들을 발견하게 될까 궁금했는데, 3월 산책길에서 처음 만난 들꽃은 '큰개불알풀(Veronica persica Poir.)의 꽃'과 '토종 민들레(Taraxacum platycarpum Dahlst.)'다.
질경잇과에 속하는 큰개불알풀(일본표기, 大犬の陰嚢)은 꽃이 진 후에 씨앗을 담고 있는 씨방의 모양이 개의 불알을 닮았다고 하여 일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식물 명칭이 토속적이어서 마치 우리 조상들이 붙인 이름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자국의 식물도감에서조차 주권 의식 없이 한국의 학자들은 아주 오랜 시간 일제의 잔재로 남겨진 거칠고 모욕적인 식물 명칭들을 그대로 국민에게 유통한 혐의가 있다.
찾아보면 이렇게 굳어진 난잡한 식물 이름들이 제법 있는데, 큰개불알풀이 제아무리 형태를 설명하는 해학적인 이름이라 주장해도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중 가장 혐오를 부추기는 식물 이름은 역시 일본에서 온 '며느리밑씻개(継子の尻拭い)' 같은 천박한 이름이다. '고마리'와 비슷하게 생긴 이 꽃은 '사광이아재비'라는 옛 이름이 버젓이 있는 들풀이다. 여기서 '사광이'는 야생에 사는 고양이인 살쾡이를 뜻한다.
일본어로 '마마코노 시리누구이(ままこのしりぬぐい, 継子の尻拭い)'는 정작 그 뜻이 며느리도 아니고 의붓자식의 밑씻개라는 의미이다.
성적으로 문란한 일본에선 남자가 의붓자식을 당당하게 데리고 들어오면 여자는 그 의붓자식이 미우니 거친 가시가 달린 풀로 뒷일을 처리했다는 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저속한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표현이 한국에선 엉뚱하게 며느리에게 불똥이 튀어 '며느리밑씻개'가 되어버렸다. 이런 꽃 이름이 최근까지 유통되었다는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토착종이며 원래 이름이 없던 것도 아닌 식물에 구태여 일본어를 번역해서 쓰고, 그걸 한층 더 왜곡해서 여성을 비하하거나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계층적 비열함이 기본에 깔려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며느리는 곧 누군가의 어머니이며 누군가의 여동생이거나 누나이다. 또 누군가의 부인이며 동료이자 친구이고 사회의 절반을 구성하는 국민이다. 분별도 비판도 없이 식물에 붙여 우리 민족을 조롱했던 이런 상스러운 명칭들을 유통했던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며 우리 안에서 반성해야 한다.
나는 평소에도 다양한 꽃들에 관심이 많다. 몇 년 전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꾸준히 산책하는데, 겸사겸사 산책로에서 들꽃을 관찰하다 보니 그것들의 이름을 다시 찾아보게 되고, 어린시절 들과 산에서 놀며 보았던 꽃들을 기억해 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다 어처구니없게 우리 고유의 식물 종에 난잡한 일본식 명칭들이 그대로 남아, 아직도 우리 땅의 들과 산에 수천수만 년을 살아온 식물들의 고유한 이름이 사라지거나 훼손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일에 대한 통계조차 찾아보기 힘들어, 얼마나 이런 불쾌한 이름들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며느리밑씻개'는 다행히 '가시모밀'로 순화해서 부르기로 했단다. 그러나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그리고 '가시모밀'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뜬금없이 누가 알겠는가? 차라리 '사광이아재비'라는 옛 이름을 쓰면 '미나리아재비'와 같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내가 오늘 만난 '큰개불알풀꽃'도 역시 늦었지만, 다행스럽게 이름을 바꿨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찾아온다 해서 '봄까치꽃'으로 부르기로 했단다. 역시 썩 수긍이 되는 이름은 아니다.
한국의 식물학은 여전히 관습으로부터 수동적이고 연구에 대해 자주적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국민의 정서를 반영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공개된 언론 보도에 의하면, 사회적 의견 수렴도 없이 십여 명의 식물학자(그들을 권위 있는 식물학자라 불러줘야 할지 모르겠으나)들이 모여서 얼렁뚱땅 이름을 지은 모양새다.
최근, 토종 민들레에 대한 논란도 있는데 2023년 식물도감에서 어떤 사회적 의견 수렴도 없이 그들끼리 뚝딱 민들레를 도감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고 한다. 이제 민들레를 민들레라 부를 수 없는 별 희한한 상황. 털민들레, 산민들레, 흰민들레 등 나눠 부르는 것은 좋으나 토종 민들레를 일컬어 민들레라 부르던 상징은 민족의 고유한 정서인데 이를 어쩌나?
식물은 식물 그 자체에 관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그 땅에 함께 살아온 인간과 끊임없는 공생을 통하여 정서적 유대 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데, 그 섣부르고 성급한 학문적 태도는 여전히 ‘괴랄’하고 후진적이다.
풀이름 하나 짓는 것이라고 쉽게 여겨, 고작 십여 명의 전문가끼리 모여서 그렇게 뚝딱 해치울 일은 아닐 것이다. 여태 저속한 일본어로 한국의 토종 식물과 꽃들에 이름을 더럽혔던 책임이 그들에게 일말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봄에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미는 '봄까치꽃'이 대청호 주변 들판에 가득 피었다. 걷다가 멈춰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아름답고 강인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의 원래 주인이다. 그 존재에 합당한 이름을 짓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겸손과 미덕 그리고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봄이 시작되는 2024년, 이 땅의 들과 산에 피어나는 곱디고운 우리의 들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답고 해학적이던 고유의 이름을 되찾아 진정한 독립이 봄의 산천에도 시작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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