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담(詩談)]3 문둥이 마을에도 무지개는 뜨고 /박미산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여우비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문둥이 촌을 지나 공동묘지를 넘는다 신발 소리가 들려온다 발걸음을 멈춘다 따라오던 발걸음이 사라진다
풀벌레, 산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 발걸음 소리만 산에 가득하다 사촌오빠의 등에 업혀 집에 가는 길에 들은 이야기가 귓가에서 윙윙댄다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얼굴에선 땀인지 빗물인지 뚝뚝 떨어지고
목덜미와 등허리에도 송곳 같은 땀이 꽂힌다 반짝 해가 나고 발걸음 소리는 더 크게 들려오고, 넓은 공동묘지에는 적막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고, 이랑진 무덤들은 고요하고, 무지개는 문둥이 마을에도 웅덩이에도 들어앉아 있고
고모님 댁은 한등고선 젖히면 닿을 수 있는 곳 문둥이 마을은 이미 지나쳐 왔고 고래처럼 숨을 들이마시며 내뱉는 사이, 내 엉덩이를 툭 치는 얼굴, 눈썹이 없다 무지개는 되돌아갔고, 우북한 풀이 무르팍까지 올라오던 열두 살 여름
-『루낭의 지도』(채문사, 40쪽)
.....(시인의 회상)
우리가 살던 도화동은 앞쪽으로는 바다가 있었고 뒤쪽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앞쪽으로는 버스가 없어 학교가려면 십리 길을 걸어 다녀야 한다.
그래서 집으로 올 때는 가끔 기차를 타고 왔다.
주안역에서 내려 집까지 오려면 30분은 족히 걸렸는데.
반드시 공동묘지를 넘어야만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되지 않아 공동묘지 옆에 대여섯 가구가 살았다.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한센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던 그 시절.
어른들은 어린 너희들을 그들이 잡아먹을지도 모르니까 절대 그 근처를 가지 말라고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1시쯤 주안역에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여우비가 갑자기 내렸다가 그쳤다.
무덤 위는 수북하게 풀이 올라오고 산등성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한센병 마을에도, 웅덩이에도 무지개가 아름답게 걸려있었다.
비 온 뒤끝이라 그런지 공동묘지는 조용했다.
그 넓은 공동묘지엔 오로지 타박타박 걷는 나뿐.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났다.
마구 뛰었다. 그 발소리도 빠르게 나를 따라왔다.
천천히 걸었다. 뒤따라오던 발소리도 나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는 무서워서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온몸은 땀에 젖고 무서움은 더욱 커져 내 머리끝이 쭈뼛 섰다.
눈썹이 없는 그들이 내 엉덩이를 툭 칠 것만 같아서 산등성이까지 한달음에 내달렸다.
동네가 보인다.
그제야 뒤돌아봤다.
아무도 없다.
내 발소리에 내가 놀랐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에 땀이 밴다.
*** 작가 소개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백석, 흰 당나귀 운영.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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