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패션의 인문학 비비안 웨스트우드>
추정치 2억이 넘는 코로나 확진자가 중국에서 쏟아져 나와 전 세계 공항과 공항에 비상이 걸리며 끝이 보이지 않았던 2022년 12월 29일, 마치 종말을 향한 팬데믹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29일은 내게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남겼다.
펑크 패션의 시조이자 여왕으로 칭송받던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Isabel Westwood)가 29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간 분주했던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인간의 시각에서 죽음이란, '순응(adaptation)'을 모르던 그의 패션 언어에 있어서 평생의 업적이 완성되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언어로 전 세계의 젊은이에게 놀라운 저항의 길을 보여 준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한때 흠모했다. 불합리와 불공정 그리고 억압과 복종이 미덕이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이라 히피나 펑크 또는 허무주의나 실존주의를 탐닉하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행동하는 지성을 늘 실제로 옮길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유린당한 한국에선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그 가운데 그나마 유일하게 독재자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은밀하게 상징을 이끌었던 펑크(punk)의 움직임이었다. 그중에서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펑크는 기발했다. 가령, 사회적으로 별것 아닌 것들의 진지한 저항, 살인과 약탈을 일삼던 전쟁(현재도 진행 중인)에 대한 반전과 평화에 대한 고민, 자본의 모순에 빠진 민주주의 권력에 냉소하던 히피의 항변, 고립된 사회적 진실로부터 탈피하려던 음악적 저항, 회화적 혁명, 새로운 구조의 언어를 통해 무엇이라도 해보고자 했던 그 뜨거운 젊음과 열정에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엉뚱하게 패션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평화적이며 우스꽝스러웠으나 파급 적이었다. 그리고 곧, 패션이 세계 공통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 누구보다도 젊은이들은 패션을 통해 빠르게 그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연대해 나갈 수 있었다. 국경도 장벽도 없었다. 잡지를 통해 또는 방송을 통해 패션은 펑크라는 코드로 기성세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소통했다. 단순하게 멋이나 부리고 음악에 몸을 흔드는 것이 펑크는 아니었다.
1970년대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그녀의 남편 말콤 맥라렌(Malcolm Mclaren)은 ‘펑크록(Punk Rock)’의 시작을 알린 독설 전문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매니저와 무대의상을 각각 담당하며 ‘펑크록’과 ‘펑크 패션’의 시작을 알렸다.
1971년 런던 킹스 로드에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렛잇록(Let It Rock)’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고 레코드와 중고 빈티지 의류를 판매하며 본격적으로 그만의 패션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옷을 찢는 것은 기본, 속옷을 겉옷 위로 드러내는 발상의 전환으로 점잔을 빼던 영국 사회에 강력한 충격을 주며 기존의 가치를 뒤흔들었다. 전통적 코르셋(corset)을 최초 의상 위로 드러낸 디자인은 그의 가장 큰 ‘패션 무브먼트(Fashion Movement)’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1978년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 주연의 <슈퍼맨>이 레깅스 위에 팬티를 입고 버젓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비비안 웨스트우드 그의 덕이 아니었을까? 물론 슈퍼맨의 탄생은 이보다 더 빠른 1938년의 ‘액션 코믹스(Action Comics)’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크리스토퍼 리브를 추억하며 그가 슈퍼맨 중의 가장 진정한 슈퍼맨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시 돌아와,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시작과 동시에 환경 운동가로 옷을 만들면서도 사람들에게 될 수 있으면 옷을 적게 사도록 홍보했고,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바른말을 던질 수 있었던 정치적 저항자였으며, 따뜻하고 발랄한 언어로 독재 치하에 울분을 삼키던 한국의 펑크와 히피를 격려하던 누님이었다.
특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기존 체계와 관습에 반발했던, 반예술 운동 다다(Dadaism)와 네오다다(Neo-Dada)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시각 예술로 등장했던 '펑크(punk)'는 역시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적이고 직접적이었으며 유머와 통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이는 동시대에 일어난 음악 펑키(funky)에서 파생된 것으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 둘을 절묘하게 패션의 언어로 치환한 셈이다.
“Punk was about young people figuring out what they wanted from this world.” - Vivienne Westwood
그는 펑크를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했다.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 역시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이런 결의를 남겼다.
“백만장자 록밴드는 자기 사랑 이야기나 세금 불평만 하고 있을 뿐, 실업자들에게 사랑 노래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저항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159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간 이 땅에서 그리고 푸코(Michel Paul Foucault)의 생각처럼 지금의 담론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가 규정 지은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점검해야 할 때는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세월호 희생자 304인의 추모도 곧 10년이 되어간다.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지구적 삶을 끝내버린 2022년 12월 29일, 그리고 2024년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앞둔 학생들과 새로운 사회로 출발을 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사랑했던 내가 저항했던 그 모든 펑크와 펑키한 것들을 뜨겁게 다시 안아본다.
그것이 네오다다로부터 왔든 펑키로부터 왔든 본질은 여전히 우리가 지구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년이 되었어도 안타깝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무어라 해 줄 말이 없다. 다만 미안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 당부할 뿐.
펑크의 여사제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1941~2022) 그는 매우 특별했던 지구별 여행자로 기억될 것이다. 한때, 청년 시절에는 그가 디자인한 티셔츠를 입어본 적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겨진 것은 그의 로고가 새겨진 손수건 한 장이 유일하다. 마치 펑크의 상징처럼 내 젊은 날에 독재에 대한 부적처럼 여태 지니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옷을 거의 구매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입고 있는 셔츠도 20년이 되어 헤지고 너덜너덜한 옷이다. 딱히 수선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기리는 오늘은 그의 ‘패션 무브먼트’에 어울려야 하지 않을까? 적게 쓰고 지구를 더 아껴주는 것.
끝으로 그의 펑키 발랄한 런던 가게에 붙여졌던 이름들을 열거해 본다. 그가 1971년 최초로 열었던 가게 이름은 앞서 언급했듯 'Let It Rock'이었다. 당시엔 레코드도 함께 판매했었다. 이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Sex'
'Seditionaries'
그리고 198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가게 이름을 바꾸었는데 'World's End'이었다. 그는 정말로 펑키하게 세상의 끝으로 가버렸다. 진심으로 그의 또 다른 여행에 축복을 빌며 나의 조촐한 지구적 언어로 그의 영면을 기원했었다.
2024년을 살아내는 젊은이들도 더욱 펑키해졌으면 좋겠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한국에선 카이스트 졸업생과 국회의원의 입을 추접스럽게 손(아직도 바이러스 감염 트라우마가 깊은데)으로 틀어막는 세상이 다시 억압과 복종이 미덕인 것처럼 뻔뻔하게 굴러가서야 되겠는가?
“일부러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왜 한가지 방식으로만 해야 되고, 다른 방식으로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 비비안 웨스트우드
<글. 그림 이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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