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담(詩談)] 왕가네 당근은 쑥 쑥 자랐어요

박미산 승인 2024.02.22 12:39 의견 0
박미산 시인, 문학박사 [사진=더코리아저널]


[박미산의 시담(詩談)] 왕가네 당근은 쑥 쑥 자랐어요 / 박미산

푸른 몸으로 쪼그리고 앉아있어요 수건 두른 머리위로 땡볕이 걷힐 때까지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어머니, 초록 이파리에 숨어 어머니를 따라 전진하는 왕가의 시선, 몸빼 바지 속에 떨리는 다리 옮기며 땅을 팠지요 무심한 척 호미를 들고, 당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줄줄이 올라왔어요,

저 아득한 당근밭 언제 길을 낼 수 있을까 때론 밭고랑 사이로 탈주의 길을 만들기도 했어요 주룩 주룩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검은 몸빼폭 같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어요 무쇠솥뚜껑을 열다가 한참동안 짚무늬눈물로 서있었어요

어머니, 묵직한 근심은 날이 새면 또 다시 일어났어요 호미로도 부술 수 없었지요 왕가의 마음을 덮었던 이파리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꼭꼭 숨겼던 왕가의 잇몸이 붉은 당근같이 드러났어요, 속내를 드러낸 당근을 호미로 찍어 누르네요 어머니, 이 빠진 당근밭 고랑위로 온 몸을 밟고 오는 석양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어요

-『루낭의 지도』(채문사, 37쪽)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곳은 이북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인천의 해방촌인 남구 도화동이다. 이북내기인 우리 식구들은 방 두 개짜리인 루삥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서울로 마산으로 떠돌아다니셨고 어쩌다 가끔 하룻밤이나 이틀 밤 주무시고 떠났다. 그럴 때마다 동생이 생겼다.

그 동네는 피난민이 살기 전부터 화교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이 고르게 펼쳐진 푸른 당근밭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새벽에 눈 비비고 나와 그 밭을 바라보면 언제 나왔는지 모를 중국인 왕 씨가 앉아서 벌레를 잡는지 구부리고 있었다. 검은 창푸파오를 입은 그의 등은 이슬에 푹 젖어 있곤 했다.

엄마는 왕가네 밭에서 일하셨다. 저녁에 일하고 들어오시는 엄마의 광주리에는 못난이 당근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때 당근을 많이 먹어서인지 우리 형제자매들은 지금도 시력이 좋다. 나는 다 저녁때 기름 반질반질한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는 나무 타는 연기 때문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눈물 콧물을 닦으며 아궁이에 앉아있는 엄마를 자주 보았다.

어느 날부터 부지런하고 착실한 엄마는 일을 안 하고 집에 계셨다. 그리곤 다른 집으로 일하러 다니셨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지나가는 말처럼 엄마에게 왕 씨 아저씨에 대하여 여쭤보았다. 엄마는 한동안 말씀이 없더니 "왕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었어. 우리가 한동안 그 사람 덕에 배를 곯지 않았잖니? 그 사람이 수작만 붙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고마웠을까?"

그리고 엄마는 느리게 말씀했다. 날마다 죽고 싶었다고, 새벽에 일어나면 너희 팔 남매가 엉켜 자는 걸 보고 다시 마음을 독하게 잡아먹었노라고.

김동인의 단편 “감자”가 생각났다. 복녀와 엄마는 가난이라는 생활고를 겪은 사람들이다. 1920년대에서 1960년대로 40여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는 똑같은 구조 속에서 가난을 겪고 그 가난 속에서 경제적인 힘이 없는 여자들이 겪는 고초는 여전했던 것이었다.

***[필자소개]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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