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문화산책] 스페인을 여행할 때 경이로운 예술과 건축 또는 몽환적 풍경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면 '이베리코 베요타(Iberico Bellota)' 하몬을 어디서나 매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도시에서 도시로 또는 지방으로 넘어갈 때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곳의 풍속한 시장을 찾아 질 좋은 베요타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아무런 와인 또는 아무런 맥주에도 일품인 것이 나처럼 입맛 대충인 주객도 홀릴 만큼 그 풍미가 매력적이다.
'베요타(bellota, 도토리와 야생 방목)'는 이베리코 중 최고 등급이고 중간 등급인 '세보 데 캄포(cebo de campo, 사료와 방목)'와 그보다 낮은 등급의 '세보(cebo, 사료)' 등으로 분류된다.
‘이베리코 베요타’는 순종 100%인 이베리코(스페인 돼지품종)를 반드시 도토리 수확기인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야생에 방목해서 키워야만 받을 수 있는 등급이다.
***Barcelona, Reino de España, 2013, Hongseok LEE
이 시기에 충분히 야생에서 도토리를 먹고 성장한 이베리코는 '올레산(oleic acid, 불포화지방산의 일종, 콜레스테롤이나 혈압 조절로 알려짐)'이 풍부하여 육질과 함께 고유한 풍미를 지니게 된다. 올레산은 이베리코 베요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하겠다.
'올레산(oleic acid)'은 로렌조 오일(Lorenzo's oil)의 주성분인데, 1993년 발표된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의 영화 <로렌조 오일>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ADL(부신 대뇌백질위축증)'이라는 희소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어가는 어린 아들 로렌조를 살리기 위한 부부의 눈물겨운 여정을 담은 영화인데 올레산은 올리브유에도 풍부하다.
반면 한국에선 도토리의 올레산 성분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세계적으로 도토리를 직접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 유일한 국가인데도. 대개 다른 국가에선 도토리를 약용이나 공업용 또는 돼지나 동물의 사료 등으로 쓰고 있다.
'도토리'는 돼지의 옛말 '돝'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1417년에 쓰인 『향약구급방』에 지금의 도토리를 '저의율(猪矣栗)'이라 한자를 빌려 표기했는데 이는 '돝의 밤'이라는 뜻이다.
이후 '도토밤’과 ‘도톨왐’ 등으로 나타나다 음운 탈락 등 16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도토리'로 고정되었는데 음운변화의 과정이 다소 복잡하다. 그러나 우리말 '도토리'는 그 어감도 예쁘고 대상을 가리키는 뜻도 매우 직관적이다.
흔히 도토리 하면 다람쥐와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사실 도토리는 멧돼지의 가을철 주식이다. 다람쥐는 잣과 같은 작은 씨앗 종류나 열매 그리고 곤충과 작은 동물 등을 먹는다. 가을에 도토리가 기후변화나 산불로 열리지 않거나 소실되면 멧돼지들이 민가로 내려오는 이유는 도토리가 바로 그들의 식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토리를 주워갈 때 미안해야 할 대상은 다람쥐가 아니라 사실 멧돼지인 셈. 다람쥐는 소량의 도토리만을 겨울 비상식량으로 비축할 뿐이니 애교 수준이다.
**도토리와 상수리는 서로 조금 다르게 생겼는데 현재는 구분하지 않고 참나무과 열매의 총칭으로 모두 도토리라 표기하고 있다.
한국에 자생하는 참나무는 졸참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일일이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종이 분포하여 있다.
하지만 열매를 구분하는 법은 크게 어렵지 않다. 처음부터 도토리라 불렸던 것은 열매 뚜껑이 매끈하고 열매 모양은 길쭉하게 생겼다. 나뭇잎은 손바닥처럼 넓고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면에 상수리 열매는 뚜껑이 털 달린 모자처럼 거칠게 생겼고 열매는 공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겼다. 나뭇잎은 다소 가늘고 길다.
한국에선 도토리로 묵을 쑤어 먹는데 지금은 예전처럼 산에서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도토리를 수확했다가 겨울까지 도토리묵이나 묵국수 또는 묵사발 등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도토리묵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인 맛은 이베리코 베요타의 ‘올레산’ 풍미보다는 도토리 고유의 텁텁하고 쓴맛을 내는 바로 '타닌(tannin)' 성분이다. 한국인이 의외로 사랑하는 맛은 참나무 열매 도토리의 타닌. 참나무통에 오랜 시간 숙성시키며 타닌의 맛을 더하는 와인이 서양에 있다면 그에 못지않은 한국식 타닌을 즐기는 맛의 미학이 도토리에 있다.
간혹 어려서 먹었던 도토리묵의 쌉싸름한 맛이 그리워 산 아래에 있는 식당에 들를 때면 기대감에 도토리묵을 주문해보지만, 이제는 고유한 타닌 맛을 그대로 내는 도토리묵을 맛보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
묵에 들어가는 도토리 함량도 부족하고 대개는 무얼 섞었는지 품질을 알 수 없는 중국산 도토리(?) 전분을 사용하기 때문이란다.
어쨌든 도토리묵이 아무리 먹고 싶어도 국유림에서 임산물 채취는 불법이겠다. 도토리가 줄어들면 다람쥐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본의 아니게 멧돼지는 도시까지 내려와 거리를 방황하게 되는 해괴한 상황을 연출한다. 그건 피차 곤란한 일이 아닐까 싶다.
몸에 좋은 올레산(oleic acid)이 풍부해 콜레스테롤도 잡고 혈압도 안정시킨다고 하여 당장 도토리를 직접 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가 매일 먹는 올리브유에 다량 함유되어 있고 다른 견과류에서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으며 이베리코 베요타 하몬도 마음만 먹으면 마트에서 구입하여 먹을 수 있으니 직접 산에서 도토리를 채취하는 수고를 덜어도 되겠다.
내가 산책하는 호수 주변엔 올해 도토리가 풍년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도토리 열매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진다. 자루로 쓸어 담아도 넘칠 정도로 지천이다. 다행히 외진 곳이라 그대로 땅으로 호수로 떨어진 도토리들은 온전히 다음 생태적 변화를 기다린다.
간혹 도토리를 주워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과하게 가져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우리 세대만 해도 도토리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대전 구즉동엔 묵국수가 유명하다. 처음엔 이게 무슨 근본 없는 음식인가 싶었는데 먹다 보면 입에 ‘추릅추릅’ 감기는 감칠맛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쓰고 텁텁한 도토리마저도 맛있는 음식으로 둔갑시켜 버리는 세상 놀라운 조상들의 기술이 한때 멧돼지와의 경쟁 구도를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번 주엔 이미 시작된 가을 단풍과 함께 묵국수나 한 그릇 먹으러 나서보는 것도 괜찮겠다. 난데없이 이베리코 베요타와 도토리묵을 함께 곁들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저작권자 ⓒ 더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