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문화산책] 꽃무릇, 죽음이 꿈꾸던 태양

이홍석 승인 2023.09.24 20:40 의견 0
이홍석 아티스트, 문화비평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문화산책] 배롱나무꽃이 한올 한올 떨어지는 9월이면 어김없이 꽃무릇(Lycoris radiata)이 예상치도 않았던 곳에서 땅을 뚫고 올라온다.

그도 그럴 것이 얼핏 맥문동 잎처럼 생긴 꽃무릇의 잎은 꽃이 지고 나면 10월에 돋아서 상록수처럼 푸른 상태로 겨울을 지내다, 이듬해 5월이 되면 차차 시들어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꽃무릇이 자랐던 자리엔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되는 것이다.

9월 초에 잎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 땅에서 불현듯 꽃대가 다시 솟아나기 시작하고 한 대에 4~5개의 붉은 꽃을 커다랗게 피우는 여러해살이 알뿌리 식물이다.

꽃무릇은 양쯔강 유역의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은 그 정확한 연원을 찾을 수는 없으나 구전 설화나 옛 속담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뿌리를 내린 지 제법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자발스러운 귀신은 무릇죽도 못 얻어먹는다."

기근이 심하던 시절(경신 대기근, 현종 1670~1671)에 사람들은 꽃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불리고 갈아서, 가라앉히면 녹말을 얻었는데 그것으로 '무릇죽'이라는 죽을 쑤었다고 한다.

그러나 꽃무릇의 알뿌리에는 독성이 강한 알칼로이드 성분인 리코린(lycorine)이 함유되어 있어 이 독을 걸러내지 않고 뿌리를 그대로 먹게 되면 심한 중독을 일으키게 된다. 구토, 설사와 같은 증상과 더불어 심할 경우 저혈압이나 심장 부정맥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독성이 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독성을 제거하지 않고 자발없이 '무릇죽'을 급히 쑤어 먹으면 큰 탈이 난다는 생활의 지혜가 담긴 속담이다.

일본에서는 꽃무릇을 '피안화(彼岸花)'라고 부르는데 알고 보면 사연이 기괴하다. 말 그대로 피안에 피어난 꽃, 이 세상 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나 정작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나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는 의미에서의 피안을 뜻하는 것이 아닌 더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즉 비통한 죽음을 상징하는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에도 시대(덴메이 3~8년, 1783~1788)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에 30만 명 이상이 기근으로 아사했다는 '덴메이 대기근'이라는 참담한 역사 안에서 피안화의 등장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도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이 꽃무릇을 데쳐서 먹었는데, 이 꽃무릇마저 사라지면 살기 위해서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잔혹한 삶과 비통한 죽음의 신호를 알리는 경계에 선 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피안화’는 일본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의미가 되었다. 일본인에게 마냥 이 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9월부터 불쑥 솟아올라 오는 꽃무릇 또는 피안화는 그 괴이한 모양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최근 일본 애니의 수작으로 꼽히는 '귀멸의 칼날'에도 '푸른 피안화'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그만큼 일본인에게 피안화의 역사적 · 생태적 각인은 큰 것 같다.

극 중, 오니(オニ, 일본의 요괴)의 수장인 '무잔'이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푸른 피안화'인데 이야기 속에 푸른 피안화는 낮에 활동할 수 없는 오니들에게 '탄지로와 네즈코' 남매처럼 태양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깃든 것으로 등장한다.

과거, 에도 시대의 붉은 피안화가 현실 세계에서 죽음을 상징했다면, 이제 현대 일본의 애니에서 푸른 피안화는 삶을 상징하고 있다. 오니가 피를 굶주리는 존재로 등장하는 관점에선 그 굶주림의 연속은 깊이 각인된 듯 싶기는 하지만.

서양에도 한·중·일 삼국의 꽃무릇이 전해지고 관상용으로 인기가 있어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원래 수선화과인 꽃무릇의 학명이 'Lycoris radiata'인데 서양에선 이를 쉽게 'Red Spider Lily(붉은 거미 백합)'라 부르고 있다. 꽃의 모양을 매우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복잡한 역사적 속내나 슬픈 서사 없이 있는 그대로 부르는 것이 때로는 경쾌하다. 사물에 얽힌 복잡한 의미보다 직관적 형태를 드러내는 이름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에선 이맘때 상사화(Lycoris squamigera MAX.)와 꽃무릇(Lycoris radiata)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두 개의 꽃은 같은 수선화과이긴 하지만 엄밀히 다른 종이며 다르게 생긴 꽃이다.

상사화는 꽃 색깔이 분홍에 가깝고 꽃무릇보다 1~2개월 빨리 피었다가 진다. 상사화에 얽힌 남자 승려와 불공드리러 간 여자 사이의 뻔한 남녀상열지사는 소개하지 않겠다.

그러나 상사화에 얽힌 남녀의 이야기가 대중에겐 더 통속적이라, 상사화 축제라는 이름이 많은데, 가보면 어김없이 꽃무릇이 대부분인 안타까운 생태적 무지의 현장이 대다수다. 검증되지 않은 부실한 지역 축제가 아닌, 제대로 된 생태계 정보를 가지고 행사를 했으면 싶은 마음인데 관련자들이 달라질지는 알 수 없다.

예전 같았으면 상사화가 질 무렵에 꽃무릇이 피었다. 지금은 급격한 기후변화로 산책길에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제멋대로 생태계가 요동을 치고 있다. 지속적 연구가 없어서 과거의 생태 자료가 현재의 생태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겠다.

꽃무릇, 무릇죽을 먹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이 꽃이 얼마나 삶에 대한 강렬한 신호였을까? 구토와 설사를 하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었던 또는 피안화가 지고 나면 사람까지 먹어야 했던 에도 시대의 사람들까지도.

사진에 꽃무릇을 담겠다고 거대한 망원렌즈를 들이대고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소리치는 무뢰한들이 올해에도 선운사나 불갑사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고요히 이 시대를 살아갈 뿐이다. 삶과 죽음의 숭고한 예의에서 벗어난 그런 시절을 따라다니는 사진 따위의 현상이 예술일 리 없으며 별다른 가치가 없겠다.

홀로 만나는 몇 송이 꽃무릇이면 이미 가을의 산책은 그런대로 호젓하니 족하다. 꽃무릇은 '괴이발랄'한 형태로 단지 시선을 사로잡는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어쩌면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며 사유할 수 있는 너무도 인간적인 그래서 더 애틋한 상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이홍석]

[사진=이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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